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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에나 Oct 24. 2022

다만 쓸 수 있어서

에필로그

  

  정세랑 작가의 「시선으로부터,」라는 장편소설을 읽었다. 열댓 명이나 되는 다양한 등장인물 중 제일 감정 이입했던 인물은 난정이었다. 아이가 아픈 이후로 마음 붙일 곳이 필요해 끝없이 읽는 것으로 자기를 보호했던 사람. 그런 난정에게 시어머니인 시선은 그만큼 읽었으니 이제 글을 쓰라며 채근한다. 인풋이 있으면 아웃풋이 있는 거라고, 그게 자연스러운 거라고. 그때 난정은 “저는 읽는 걸 좋아하는 거지 쓰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라고 단언한다. 평생 독서광으로 살았지만 쓰기와는 거리가 멀었던 나는 난정의 흔들림 없는 말에서 왠지 모를 위로를 받았다. 그래, 읽기를 좋아한다고 해서 꼭 쓰기로 연결되어야 하나. 생산적인 무언가가 없으면 어때. 읽기 그 자체만을 목적으로 두고 향유해도 좋지 않을까?     


  사실 쓰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다. 행복한 사람은 글을 쓰지 않는다고 했던가. 내가 가장 절실하게 글을 썼던 때는 역시 사는 게 힘이 들 때였다. 하도 울고 다녀서 남편이 “손대면 톡 하고 터지는 봉선화”라고 놀렸던 시절, 어린 두 아이를 키우면서 다른 사람과 쉽게 나누지 못한 마음을 일기장에 풀어내며 버텼다. 그렇게 쌓인 일기장이 몇 권. 여행지에서 들었던 음악을 들으면 그때 여행이 떠오르듯 글을 쓰려고 하면 힘들었던 감정도 같이 떠올라 넘실거렸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내 글은 늘 서랍 속에만 있었다. 주위 사람들이 자기 이름을 단 책을 하나씩 세상에 내놓는 걸 보면 어찌나 부러운지. '언젠가는 나도?' 하는 소망을 품어 보지만 역시 꿈같은 이야기일 뿐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들수록 쓰고 싶지 않은 마음 또한 강하게 올라왔다.     


  대학 선배 언니가 브런치 작가에 도전해보라고 권했을 때도 나는 주저했다. 내 일상을, 특히 힘들었던 시간을 팔아서 글을 쓰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이해받고 싶다는 욕망이 강할수록 내 보잘것없는 일상을 구구절절이 쓰고 싶지 않은 마음, 나의 한숨과 눈물을 굳이 써서 세상에 내놓고 싶지 않은 마음도 컸다. 그때 언니가 해준 조언.           


“파는 게 아니라 나누는 거야. 어떤 어려움이 있었는지, 그걸 어떻게 극복했는지 너의 경험을 나눌 때 그게 다른 사람의 마음에 가닿는 게 아닐까. 우린 잘난 사람들의 이야기에 지쳤잖아. 정인아, 너를 불편하게 만드는 지점(pain point)에 대해 써봐.”      


  아, 파는 게 아니라 나누는 거구나. 멋지고 매끈한 모습만 보여주고 싶어 하는 세상에서 울퉁불퉁한 내 삶의 일부분을 나누는 것도 의미가 있겠구나. 내 고군분투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면... 나를 위한 글쓰기에서 타인을 향한 글쓰기로 한 발짝 더 나가보자, 글쓰기에 대한 인식 전환은 그렇게 일어났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영국의 2021년 봄, 브런치에 작가 신청을 하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영국에서 산 만 3년 동안 내 마음을 두드렸던 일들을 골라 글로 엮었다. 주로 해외에서 아이 키우면서 사는 소소한 풍경들이었다. 처음에 영국에 와 적응하기 힘들었던 때의 한숨과 눈물, 따뜻한 손을 내밀어준 친구들, 잊을 수 없는 환대의 경험, 아이의 성장을 지켜보는 일, 별것 아닌 것 같은데 마음이 볶이던 일들과 다시 생각해도 심장이 쿵 내려앉는 순간들... 어떤 경험은 잊고 싶지 않아서 썼고, 힘들었던 일 역시 노트북 앞에서 차분히 적어 내려가고 나니 어느새 마음이 진정되는 작은 기적을 경험하기도 했다. 외로운 해외 생활에서 글쓰기는 나를 돌보는 최선의 방법이 되어주었다.      


 나에서 시작한 글쓰기는 우리 가족을 넘어 이웃들,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 우리 동네, 영국 사회, 돌아와 한국 사회에 대한 고민으로 확장되기도 했다. 익숙한 내 나라를 떠나 시작한 해외 생활은 감각을 더욱 예민하게 만들었다. 이런 건 우리랑 다르구나, 이런 점은 배울만하고, 이런 건 참 불편하구나, 이럴 땐 이렇게 말하고 행동하는구나, 역시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하구나 등등 한국이라면 그냥 별 뜻 없이 지나쳤을지도 모를 순간들이 새로운 의미가 되어 다가왔다. 언어도 문화도 풍습도 다른 사회에 나를 최대한 열어놓으면서 영국이라는 나라에 다가가려고 애썼다. 고작 3년으로 감히 그 나라를 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생각할 거리는 도처에 있었다. 그렇게 쌓인 글들이 브런치북으로 완성이 되었다.      


  아,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하는 공감과 함께 위로를 받고 갑니다.         

  

  박사논문과 육아 사이에서 매일 줄타기를 하는 후배가 남긴 댓글을 보며 공감과 위로라는 단어에 밑줄을 그었다.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는 동지  의식은 당장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마음가짐을 새롭게 해 일어설 힘을 준다. 내가 쓰는 글이 누군가에게 공감과 위로로 가닿았으면. 그 마음이 다시 나에게 돌아와 다시금 쓸 힘을 주었으면. 그 순간을 상상하며 오늘도 책상에 앉아 깜빡이는 커서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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