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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에나 Oct 23. 2022

영국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법이 우리 뒤에 있다'는 믿음



  이 나라의 여성들은 어떻게 사는지 궁금했다. 영국이라면 세계 여성운동 역사에서 길이 남을 서프러제트(Suffragette)의 나라 아닌가. 서프러제트는 19세기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을 일컫는 말이다. 영국 사회가 민주화되어가면서 남성의 참정권은 점차 확대될 때, 여성들에게 돌아온 건 경멸과 비웃음, 폭력뿐이었다. 평화적인 시위가 번번이 묵살당하자 창문을 깨고, 방화, 투옥, 단식투쟁을 하고, 심지어 목숨을 버리는 폭력적인 방식을 택한 서프러제트, 그 희생의 결실로 1928년 마침내 남성과 동등한 투표권을 쟁취해냈다.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 에멀린 팽크허스트, 현실문화] 대의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조차 아까워하지 않던 기백 넘치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그 땅의 후배들이 사는 모습이 궁금했다.


런던 뮤지엄(Museum of London)의 서프러제트 전시물. 출소 후 환영인파를 맞으러 나오는 여성들의 당당한 기품이 느껴지는 사진이다.

      

  영국에서 살면서 만나는 여성들과 기회가 될 때마다 이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영국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지, 자기 삶에 만족하는지, 일과 삶의 균형은 어떤지 물었다. 내가 만난 사람들은 주로 학교 엄마들이었는데, 대부분 웃으며 만족한다고 답했다. 직종에 따라 업무강도나 퇴근 시간이 다르기는 했지만 대부분 6시 전에 남편들이 집에 도착해 가사나 자녀 양육을 같이하는 분위기였다. 영국 학교는 초등학교 6학년이 되기 전에는 등·하교 시 보호자가 꼭 동행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학교 앞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죄다 엄마들인 반면 영국에서는 아빠들도 자주 볼 수 있었다. 부부가 둘 다 일하는 경우 출근 시간을 조정해서 아침에는 아빠가 데려다주고, 오후에는 엄마가 데려오는 식으로 분담했다.     


  제도적으로도 많은 점이 보완되어 있었다. 영국 회사에서 오래 근무한 친구가 말하길 회사에서 여성들에게 업무와 관계없는 잔심부름을 시키는 일은 거의 없단다. 부당한 차별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성들을 화나게 하지 않기 위해서 남성들이 조심하는 분위기란다. 성관계 시 명백한 동의(sexual consent)를 받지 않은 경우에는 강간죄가 성립될 수 있다. 그녀는 “남성이 억울할 수도 있고, 여성이 거짓말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영국법”이라고 강조했다. 그래서 성교육 시간에 반드시 “상대방의 동의가 없는 모든 성행위는 성폭력”이라고 가르친다고 한다. 부부가 이혼할 때 여성이 싱글맘으로 아이를 키우기로 한 경우, 남성이 상당한 금액을 위자료로 줘야 하고, 국가적으로 한부모 가정 지원이 잘 되어 있다.       


 “Law is behind us."

      

  대화 말미에 친구가 덧붙인 한마디가 내 마음을 울렸다. 법이 우리 뒤에 있다, 우리를 지지해준다는 말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한국에서 여성으로 살면서 법이 실제로 내 편을 들어준다고 느낀 적이 있었던가. 일상에서의 성차별은 말할 것도 없고 성범죄를 당해도 상호 합의라 주장하는 가해자들, 증거 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분을 받은 후 바로 무고죄로 역고소하는 경우를 많이 본 나는 친구의 단단한 신뢰가 부러웠다.   

   

 영국에서 사는 동안 특별하지 않지만 기분 좋았던 순간을 나누고 싶다. 동네 작은 카페에서 말을 걸어오신 할아버지가 나를 ‘this young lady’라 부를 때 그 말이 어찌나 듣기 좋던지. 슈퍼마켓에서 계산할 때 ‘madam’이라 불러줄 때도 씩-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여성으로서 내가 존중받는다고 느껴졌다. 그러다 한국에서 ‘아줌마’라는 비칭, 더 나아가 ‘맘충’이라는 멸칭으로 불리기도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정확히 설명할 수 없이 쓰라렸던 감정도 함께. 언어는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다. 여성을 호명하는 단어만으로도 해당 사회가 그들을 어떻게 대우하는지 유추해볼 수 있었다.     


  그런데 ‘영국은 역시 여성들이 살기 좋은 나라’라고 생각했던 생각을 완전히 뒤흔드는 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사라 에버라드 살해 사건이다. 2021년 3월 3일 밤 9시경 런던 클래팜 정션에서 집에 돌아가는 길에 납치된 사라는 일주일쯤 뒤에 죽은 채 발견되었다. 범인은 현직 경찰인 웨인 쿠젠스. 런던 시내 한복판에서 시민을 보호해야 할 경찰이 자기 신분과 코로나 방역 수칙을 이용해서 계획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은 영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에 분노한 여성들이 “다음은 누구인가?” “우리를 그만 죽여라!”라고 쓴 팻말을 들고 추모집회로 모였다. 그러자 경찰은 코로나 방역수칙 준수를 이유로 불법집회로 규정하고, 공권력을 발동해 집회를 해산하던 중 참가자를 강제 연행하여 여성들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이 사건을 보면서 전개 양상이 한국이나 영국이나 서울이나 런던이나 어찌나 똑같은지 기가 막혔다. 경찰이 가해자인 상황에서 지금 누가 누구를 수사한다는 건지! 평화시위에 강제 연행이 말이 되는지? 경찰이 저지른 범죄를 규탄하며 시위에 나온 여성들을 경찰들이 끌고 가는 상황이라니... “그러니까 밤늦게 돌아다니지 말고 집에 일찍 들어가라!” 오히려 피해자 탓을 하는 수사 담당 경찰관의 발언을 듣고 처음엔 귀를 의심했다. 피해자는 늦은 밤도, 새벽도 아닌 저녁 9시에 집으로 가던 중이었으니까. 그리고 몇 시에 어디에 있든 그것이 범죄피해의 이유가 될 수는 없다. 가부장제 하에서 이런 정신 나간 소리는 만국 공통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단 하나의 희망은 절망과 슬픔의 순간에도 여성들의 연대는 빛을 잃지 않았다는 점이다. 많은 여성들은 SNS에 #shewaswalkinghome #walkwithsarah 라는 해시태그로 사라의 죽음을 애도하며 자신이 여성으로 살면서 느낀 두려움을 나누고 추모를 이어갔다. “딸들을 보호하려고 하지 말고, 아들들을 교육해라!”는 포스팅엔 수천 개의 ‘좋아요’가 있었다. 한국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의 천 개가 넘는 포스트잇과 영국 런던 클래팜 정션에 셀 수 없이 많은 꽃다발들이 겹쳐 보였다. 여성인권에 대한 두 나라의 인식과 제도는 다르지만 궁극적인 목소리는 하나였다. ‘우리는 여성이 안전한 사회를 원한다!’는 외침이었다.   

   

   영국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만족한 미소와 분노의 함성 그사이 어디쯤일까. 단순히 한 가지로 정의될 수 없을 것이다. 한국보다 나은 측면도 분명히 있었지만,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와 2차 가해가 너무도 유사하게 반복되는 모습을 보면서 무력감이 들기도 했다. 이런 고민을 할 때 내 마음에 훅 들어온 시가 있었다.

      

나 하나 꽃 피어

풀밭이 달라지겠느냐고

말하지 말아라      

네가 꽃 피고 나도 꽃 피면

결국 풀밭이 온통

꽃밭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

     

- 조동화, 나 하나 꽃 피어 중에서

     

  이 시를 반복해서 읽으며 다시금 용기를 선물 받았다. 역사 속에서도, 지금 이 순간도, 한국에서도, 영국에서도, 세계 어디에서도 변화를 만드는 여성들이 있으니까 쉽게 절망하지 말 것. 함께 분노하며 시위에 나온 마음, 애도의 촛불을 켜는 마음, 추모의 꽃다발을 내려놓는 마음, 서로의 안위를 걱정하는 마음, 글로 기록하는 마음을 하나하나 쓰다듬는다. 그게 자기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만큼 꽃을 피우고, 산을 물들이는 마음이 아닐까. 풀밭이 온통 꽃밭이 되고, 나와 네가 물들어 결국 온 산이 활활 타오르게 될 때까지.  


사라 에버라드 추모하며 놓은 꽃다발과 팻말. @알렉스희경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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