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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에나 Oct 15. 2022

보행자의 천국, 영국

영국에서는 무단횡단이 불법이 아니라고요?

영국에서는 무단횡단이 불법이 아니라고요?

  

  아이들 학교 가는 길에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가 하나 있었다. 바닥은 흰색과 검은색 실선이 교차되어 있는 일반적인 모양의 횡단보도지만 같은 무늬의 긴 막대 위에 호박처럼 생긴 노란 등이 깜빡거리고 있어 멀리서도 알아보기 쉬웠다. 영국에서는 이런 횡단보도를 지브라 크로싱(Zebra Crossing)이라 부른다. 얼룩말 횡단보도라니, 직관적이고도 귀여운 이름이다.

  지브라 크로싱의 가장 큰 특징은 보행자가 차량을 신경 쓰지 않고 앞만 보고 건널 수 있다는 점이다. 보행자가 보이면 지나가던 모든 차는 무조건 멈췄다. 발을 디디는 순간 갈라지는 홍해의 기적 같았다. 신호를 기다리며 서 있을 필요도, 아이들에게 차 조심하라는 잔소리를 할 필요도 없었다. 대신 우리가 지나갈 때 당연히 차가 서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길을 건너며 운전자에게 고맙다는 표시로 손을 살짝 들면 상대방도 미소를 띠며 화답해주었다. 하루 최소 두 번씩 이곳을 지나며 마음속으로 외쳤다. 아이 러브 지브라 크로싱!     


노란 호박등이 달려있는 지브라 크로싱, 영국의 보행자 우선 도로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신호를 기다리지 않고 차도를 건너는 모습도 자주 볼 수 있었다. 한국에서 무단횡단은 2만 원의 범칙금이 부과되는 경범죄인데 소위 선진국 시민들이 보행 신호도 무시하고 건너는 게 처음에는 이상하게 느껴졌다. 검색해보니 영국에서는 본래 무단횡단이라는 단어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고(jaywalking이라는 단어는 미국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관련 법규도 없단다. 영국 도로교통법에 따르면 특별히 보행 금지 표식이 있는 곳이 아니라면 보행자는 자신의 자율적인 판단에 따라 길을 건널 수 있다.  

  심지어 런던 같은 대도시에서는 신호를 기다리면서 서 있으면 더 위험하단다. 바쁜 런더너들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좁은 도로를 성큼성큼 지나다닌다. 멈춰 서 있는 사람은 주로 관광객이라는 뜻이고, 어리숙한 관광객을 노리는 소매치기 등 범죄의 표적이 될 수 있다. 그 말을 듣고 나도 다른 런더너들처럼 시크하게 건너보려고 했지만 늘 머뭇거리다 애매하게 기회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아아, 이럴 때마다 어김없이 발동되는 모범생 DNA란.      


  그렇게 신호도 제대로 지키지 않고 건너면 위험하지 않을까? 영국은 OECD 국가 중 교통안전 선진국에 속한다. OECD 국제교통포럼(ITF)의 2020년 도로교통안전 연례보고서에 따르면 인구 10만 명당 교통사고 사망자 숫자가 3명 미만인 국가는 노르웨이, 스위스, 영국뿐이다. 그러나 영국은 이 결과에 만족하지 않고 2018년에 새로운 교통안전 전략을 발표했다. 바로 비전 제로(Vision Zero) 프로그램을 도입한 것이다. 2041년까지 런던 도로에서 사망하거나 중상을 입은 사람을 0으로 줄이는 것이 목표다. 도로 위의 차량 점유율을 줄이고, 대중교통과 도보, 자전거 등 지속 가능한 교통수단을 활성화하고, 시민들이 체감할 수 있는 안전한 도시를 만들고자 한다. 이 모든 정책의 바탕에는 길은 원래부터 사람들의 것이었고, 차보다 ‘사람이 우선’이라는 철학이 깊이 자리하고 있다.      


  “이제 좀 적응했어?”

    

  한국에 돌아온 후 몇 달 동안 가장 많이 들은 질문이다. 내 나라, 익숙한 동네로 돌아왔는데 크게 적응이랄 만한 게 있을까 싶지만, 집 밖을 나서면 매번 적응이 안 됐다. 보행자 신호가 초록색으로 바뀌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쌩 지나가는 차들을 볼 때, 웬만한 신호는 무시하고 폭주하는 배달 오토바이들을 볼 때, 달리는 차들 사이로 곡예하듯 미끄러져 가는 킥보드를 볼 때, 아이들을 태운 학원 차량이 신호 위반하는 것을 볼 때... 하도 자주 봐서 익숙해질 법도 하건만 한번 이상하다고 입력된 감각은 쉬이 무뎌지지 않는다. 그럴 때마다 영국의 지브라 크로싱이 그리워진다.

  문제는 이런 교통안전 불감증이 실제 사고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2021년 12월 도로교통공단이 발표한 'OECD 회원국 교통사고 비교' 보고서에 따르면 2019년 기준 우리나라의 인구 10만 명당 교통사고 사망자는 6.5명이다. 사망자가 적은 순으로 국가별 순위를 매겼을 때 OECD 36개국 중 27위다. 게다가 보행자가 차지하는 비율만 따로 놓고 보면 한국이 38.9%로, OECD 평균(19.3%)의 2배가 넘는 수준이다. 즉, 보행자 안전도는 OECD 국가 가운데 최하위 수준이라는 뜻이다.     


  “엄마, 한국에서는 왜 초록불이 되었는데도 차가 씽씽 지나가요?”     


  아이들의 물음에 어른으로서 부끄럽고 미안했다. 한국에서는 신호가 바뀌어도 잠시 멈춰 서서 지나가는 차가 없는지 확인하고 건너야 해. 초록불에 길을 건너는 것은 보행자로서 당연한 권리인데 아이들에게 두 번 세 번 차 조심하라고 당부해야 하는 현실이 씁쓸하다.      



붉은색에 안 건널까요?

- 김선율     


요즘 오토바이와 차는 빨간색 신호등에 많이 건너요.

제가 우리 동네에 이걸 여러 번 봤습니다.

사람들이 부딪치면 많이 안 아픈데

차나 오토바이와 부딪치면 수배 더 아픕니다.     


차들은 신호등이 빨간색일 때 안 가면 어떨까요?

차와 오토바이가 빨간색일 때 건너면

교통사고가 날 확률이 많이 올라가서 더 위험합니다.

앞으로 빨간색 신호등이면 건너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 이 제안은 어른들을 위해 쓴 것입니다.     


  지난 학기 큰아이가 한국 학교에 다니며 처음 쓴 작문이다. 지금보다 한국어가 더 서툴 때라 맞춤법이 틀리고 표현은 어색해도 무슨 말이 하고 싶은지 단박에 알았다. 아이 눈에 비친 도로 위의 세상은 이토록 위험하고 위협적이다. 큰 사고가 날 수 있으니 제발 신호를 지켜달라는 호소로 들렸다.  

    

  다행인 건 2022년 7월 12일부터 개정된 도로교통법이 시행되었다는 점이다. 보행자 우선 도로 지정, 어린이 보호구역 횡단보도 무조건 일시 정지 등 보행자의 통행이 차량 통행에 우선하도록 바뀌었다. 실제로 그 이후 보행자가 먼저 건너도록 멈춰 서고 기다리는 차들이 많아졌음을 체감하고 있다. 이것이 제도가 가진 힘이다. 이제 우리나라도 차량보다 보행자가 우선하는 교통 패러다임의 전환이 시작되었다. 누구에게나 안전한 도로, 느리지만 그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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