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무장애 놀이터에서 장애인권을 생각하다
2021년 봄, 영국 바스(Bath)로 주말여행을 떠났다. 모처럼 날씨가 좋은 토요일이라 길거리엔 사람들로 꽉꽉 찼더랬다. 코로나 시국에 마스크도 쓰지 않은 채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거리를 보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최대한 사람들 없는 조용한 곳으로 피해 다니다 늦은 오후 알렉산드라 공원에 올랐다. 언덕 꼭대기까지 헉헉대며 올라가니 명성대로 바스 시내가 시원하게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에 감탄하려는 찰나에 냅다 뛰는 아이들. 신나게 달려가는 곳을 보니 작은 놀이터가 있었다. ‘여기까지 와서 또 놀이터람.’ 속으로 한숨을 쉬었지만 이미 저만치 가버린 녀석들을 좇아 남편과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어라, 이 놀이터 뭔가 다르다.
가장 먼저 보이는 건 네 종류의 각기 다른 그네. 일반적인 모양의 납작 그네와 그 옆에 부모와 아기가 마주 보며 함께 탈 수 있는 그네, 누워서 탈 수 있는 원형 그네, 그리고 휠체어 그대로 올라탈 수 있는 커다란 사각형 그네였다. 그중에 내 눈을 사로잡은 건 마지막 그네. 휠체어를 타고도 그네를 탈 수 있다고? 그런 그네는 들어본 적도 아니, 생각해본 적도 없다. Ability Swing(굳이 옮기자면 ‘만능 그네’쯤 되려나)이라고 적힌 그네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문장.
모든 어린이는 놀 권리가 있다(Every Child deserves the right to play)
얼핏 보면 당연한 말 같지만 어떤 이에겐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놀이터라니 얼마나 근사한지. 놀이터에서 감동받기는 또 처음이다. 어른들이 보기엔 어지럽지만 아이들에게는 인기 만점인 회전무대, 일명 뺑뺑이도 좀 다르게 생겼다. 서서 탈 수 있는 자리와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는 자리, 유아들이 탈 수 있는 자리로 다양하게 칸이 나누어져 있었다. 바닥에 설치되어 있는 트램펄린도 휠체어를 타는 어린이 포함 누구나 이용할 수 있게 설계되었다고 한다. 그렇다. 이 놀이터는 말로만 듣던 무장애 놀이터였다. 우리나라에도 몇 군데 있다고 듣긴 했지만 직접 가본 적은 없었는데 여행지에서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
영국에서의 3년을 돌아보면 장애인은 ‘보이지 않는 존재’가 아니었다. 슈퍼마켓에서도, 식당에서도, 공원에서도, 길거리에서도 그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특히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 휠체어에 앉아 골똘히 작품을 감상하는 모습이 자주 기억이 난다. 단순히 먹고사는 문제뿐 아니라 문화생활도 자유롭게 누리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방송이나 광고, 잡지 카탈로그 등의 매체도 예외는 아니다. 영국의 공영방송 아동 전문 채널 CBeebies Biggleton이라는 프로그램에서는 한 마을에 여러 직업을 가진 다양한 캐릭터가 등장한다. 그중에 휠체어를 탄 아이가 요리사 역으로 출연해 당당한 직업인이자 마을 구성원으로서 어우러져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영국의 대표 패션 브랜드 M&S나 보덴, 리버 아일랜드 광고에서는 장애인 아동을 모델로 쓴 사진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인종, 성별, 체형의 다양성뿐 아니라 고도 근시로 두꺼운 안경을 쓴 아이들, 다운 증후군 아이들, 휠체어에 타거나 의족을 한 아이들 사진도 함께 실린다. 밝게 웃는 아이들 표정만큼이나 “beautiful!"이라고 달린 아름다운 댓글을 보며 내 마음도 밝아졌다.
학교 현장의 경우, 영국 특수교육의 기본적인 방침은 분리가 아닌 통합교육이다. 학부모가 원할 경우 장애아동도 일반 학교에서 교육하는 것이 원칙이며 학교와 교육 당국은 필요한 모든 지원을 할 의무가 있다. 특수학교는 중증 장애를 가진 학생 중심으로 운영하고 일반 학교를 지원하는 전문 센터 역할을 한다. 집 근처 청각장애인 중점학교로 지정된 초등학교에 자원봉사를 한 친구와 짧은 인터뷰를 했다. 그녀의 첫마디는 “이 학교에는 모든 수업에 수어가 녹아들어 있어요.”였다. 청각장애인만 수어를 하는 게 아니라 모든 학생이 마치 이중언어를 구사하는 것처럼 수어로 수업을 진행하고, 교가를 제창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수어를 쓰는 친구도, 보청기를 끼거나 인공 와우 이식 수술을 한 친구도, 비장애인 친구도 학교라는 한 울타리 아래 우정을 쌓아간단다. 장애(disability)가 장애(barrier)가 되지 않는 세상을 어릴 때부터 숨 쉬듯 자연스럽게 만나는 것이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2022년 대한민국. 온종일 돌아다녀도 길거리에 장애인 한 둘 마주치기 힘든 이곳에서 ‘출근길에 지하철을 탑니다’라는 이름으로 시위가 시작되었다. 곧 장애인 이동권은 현재 한국 사회를 가르는 가장 뜨거운 이슈가 되었다. 출근길 시위가 시작되자 야당 대표는 곧바로 “시민을 볼모로 삼는 불법적이고, 비문명적 시위”라고 비판하고 나섰다. 볼모, 불법이라는 무시무시한 단어들 속에 정작 내 목구멍에 탁 걸렸던 단어는 “비문명적”이라는 단어였다. 장애인이 시설에 갇혀 평생을 살아야 하는 사회, 한 달에 한 번도 집 밖을 못 나가는 사람들이 있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회, 지하철 승강장 틈에 휠체어를 탄 다리가 끼고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하다 추락사를 당하는 사회...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현실을 방치하는 사회가 비문명적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지금 인권 선진국이라고 불리는 나라들도 그가 말한 ‘비문명적’ 시위로 인해 ‘문명화’된 사회로 발전했다. 아무리 평화적인 방식으로 기다리고 얘기해도 도무지 듣지 않는 사회를 향해 사회적 약자가 할 수 있는 선택지는 무엇일까. 1972년 미국의 장애인 인권운동의 대모라 불리는 주디스 휴먼과 동료들은 휠체어로 4차선 도로를 막았다. 당연히 뉴욕 교통은 마비되었고 그 이후 장애를 이유로 학생을 차별을 금지하는 법이 통과되었다. 그런데도 제대로 시행되지 않자 이번엔 샌프란시스코 연방정부 건물을 24일 동안 점거했고 결국 미국 재활법 504조가 시행되었다. 영국 런던에서는 장애인들이 버스에 손목을 수갑으로 채웠다. 경찰이 이를 잘라내자 버스 앞에 드러눕기도 불사했다. 그 결과 1995년 영국 장애인 차별금지법도 통과되었다. 전장연을 비롯한 한국 장애 운동의 역사도 다르지 않다. 지난 20년간 장애인도 함께 버스를 타고 사회에서 함께 살기를 외치며 버스와 지하철을 막고 한강 다리를 기어 건넜던 목숨 건 투쟁이 있었기에 오늘 이들의 목소리가 이만큼이나 우리 귓가에 들리는 것이다.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을 쓴 김원영 변호사는 이러한 싸움이 ‘시민 불복종’(civil disobedience)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즉, “지하철과 버스를 세우는 행위는 장애인이 시민들의 질서에 저항하는 행위가 아니고, ‘시민’인 장애인이 지배적인 질서에 불복종하는 것이며, 시민적(civil)이라는 말 자체가 문명(civilization)이라는 의미”다. 장애인과 시민을 갈라 치기 하는 언설이 난무할 때 잊지 말아야 하는 건 그들이 바로 시민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동료 시민인 우리의 태도는 무엇이어야 할까. 앞서 언급한 미국 장애운동의 대모 주디스 휴먼의 인터뷰를 읽다가 밑줄을 그었다. “누구나 비슷한 일이 닥칠 수 있기 때문에 불편함을 감수해 줄 수 있는 게 '문명'이고 '시민 의식'입니다.” 우리 중 누군가는 ‘내일의 장애인’이 될 수 있다. 그렇지 않더라도 우리 모두는 늙고 병들어 교통약자가 되는 길은 피할 수 없다. 우리 모두는 장애와 무관하지 않으며, 장애인의 인간다운 삶 없이 그 누구에게도 인간다운 삶은 없다.
매년 4월 20일은 장애인의 날, 아니 장애인 차별 철폐의 날이다. 올해는 발달장애인 국가책임을 요구하는 시위에서 발달장애인의 자매인 장혜영 의원이 삭발에 동참하는 것을 화면 너머로 지켜보았다. “저는 제가 머리 빡빡 깎은 거 하나도 안 놀랍고요. 발달 장애인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부모가 아이를 죽이고 부모가 자살해야 하는 세상이 나는 훨씬 놀랍습니다. 이 세상 같이 바꿔야 하지 않을까요.”라고 외치는 그녀를 보고 어쩔 도리 없이 눈물이 났다. 함께 머리를 깎을 용기는 없지만, 외식 한번 줄이고 커피값 아껴 내 몫의 후원금을 보내는 일은 할 수 있다. 바쁘고 지치는 출근 시간에 지하철 출발을 지연시킨 전장연에 온갖 불평과 욕설이 난무할 때, “괜찮아요.”라고 응원을 보낸 시민들이 있었다는 기사를 읽었다. 같은 목소리 하나 보태려고 이번 글을 썼다. 혐오의 파고를 넘어 작은 물방울 같은 마음들이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가기를. 그리하여 끝내 넓은 바다를 이루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