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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에나 Aug 25. 2022

응급실에서도 홍차를 권하는 나라

영국인들의 대단한 홍차사랑

  

  영국에서 맞는 첫해 여름날 밤이었다. 잘 준비를 하고 있는데 그날따라 아이들이 평소보다 더 신이 났다. 낡은 소파에서 덤벙덤벙 뛰다가 그만 꺼져버린 쿠션 아래 철제 프레임에 쓸려 큰아이 엉덩잇살이 찢어져 버렸다. 찢긴 잠옷 바지 사이로 멈추지 않고 흐르는 피... 하필 남편은 아직 퇴근 전이고 지금 출발해서 온다고 해도 족히 한 시간 반은 걸릴 것 같다. 주위 이웃에게 SOS를 치고 밤늦게 응급실을 찾았다. 긴장된 마음으로 수속을 한 뒤 대기실에 앉아 차례를 기다리는데 잠시 후 한 간호사가 다가오더니 말을 건넸다.     


 “저기 차(tea) 한 잔 드릴까요? 아님 커피?”     


  네...? 순간 잘 못 들은 줄 알았다.     


 “아니요, 저는 괜찮아요. 고맙습니다.”     


  차를 마실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나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거절했다. 속으로 ‘응급실에서 무슨 차를 준다고, 저럴 시간이 있으면 환자나 빨리 봐주지.’ 언짢아하면서.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저는 커피요.” “저는 차 주세요.”라고 주문을 하는 게 아닌가. 잠시 뒤 간호사가 주문받은 차와 커피를 가지고 왔다. 비록 티백에 뜨거운 물을 부은 인스턴트였지만 따뜻한 음료를 받아 든 그들의 표정은 한결 여유로워 보였다. 아, 나도 달라고 할 걸 그랬나? 아까 불편한 마음 대신 약간의 후회가 밀려왔다. 응급실 대기실에서도 차 한 잔을 권하는 나라라니. 당시에는 이해가 안 됐지만 지금 생각하면 영국인의 홍차 사랑이 대단하다 싶어 슬며시 웃음이 난다.     


  

  어디 가나 ‘카페 공화국’인 한국, 한국인의 커피 사랑이 유별나다면 영국을 대표하는 건 역시 홍차다. 영국 사람들은 하루에 다섯 번 이상 차를 마신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게나 많이? 싶겠지만 영국 친구 집에서 며칠간 지내보니 실로 그러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으레 “차 마실래?”라는 인사로 아침을 시작하고, 오전 11시가 되어 출출해지기 시작하면 또 차 한 잔을 마신다. 간단히 점심을 먹고 나서 오후 4시가 되면 공식 티타임이다. 저녁 식사와 함께 혹은 디저트와 함께 마시는 티, 자기 전에 썰렁한 기운이 돌면 또 한 잔. 티타임은 영국인들의 일상에서 빠질 수 없는 의례와 같다.      


  영국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보면 차와 관계된 장면이 유독 많이 나온다. 한국에서도 크게 인기를 끈 영국 드라마 ‘셜록’에서 주인공 셜록은 사건을 골똘히 생각하며 추리에 집중할 때 꼭 홍차를 마셨다. 무서운 걸 못 보는 성정 탓에 반쯤 손으로 눈을 가려야만 했던 숱한 장면들에서도 가끔 근사한 찻잔과 티폿을 구경하는 소소한 재미가 있었다. 나의 최애 영화 ‘어바웃 타임’에서는 “내가 21살이 될 때까지 우린 하루도 빠짐없이 해변에서 차를 마셨어.”라는 대사가 나온다. 아버지의 시한부 소식을 듣고 급히 찾아온 날에도 팀의 어머니는 인사와 함께 “tea?" 하며 차를 권한다. 일상의 행복을 누리는 날에도, 마음이 무너지는 날에도 언제나 함께하는 티타임. 마치 차 한 잔에 인생이 희로애락이 다 녹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체질상 원체 카페인에 약한 터라 커피 대신 차 종류를 선호하는 편이었지만 영국에 가서 처음 티를 마셔보고는 응? 이게 무슨 맛이지? 싶었다. 영국인의 티타임이라면 보통 애프터눈 티를 가장 먼저 떠올린다. 일단 삼단 트레이에 각종 샌드위치와 디저트가 있고, 금박으로 둘려진 화려한 찻잔에 수색을 감상하며 우아하게 마실 것 같지만 보통 영국 가정집에서 홍차를 마시는 방법은 무척 간단하다.      


1) 머그잔에 홍차 티백을 넣는다

2) 팔팔 끓인 뜨거운 물을 붓는다

3) 2~5분 정도 우러나길 기다린다

4) 티백을 빼고 우유를 부어 마신다

5) 기호에 따라 설탕을 넣는다


  뜨거운 차에 냉장고에서 바로 꺼낸 차가운 우유를 넣으면 적당히 따뜻하게 마실만한 온도가 된다. 이 맛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우리나라 카페에서 밀크티를 주문하면 나오는 달고 진한 맛이 아니라 뭔가 밍밍하고 흐릿한 맛이다. 그런데 이게 영국 날씨에는 딱 맞아떨어진다. 비가 자주 오는 곳, 특히 겨울엔 우리나라처럼 쨍하고 추운 게 아니라 으슬으슬 뼈마디까지 시린 영국의 추위엔 이상하게 이 밀크티가 생각난다. 난방비가 비싸 최소한으로 난방을 하고 지내는 영국에서는 한국 아파트 같은 온기를 기대하기 어렵다. 그러니 집에 들어오면 ‘티부터 마셔야지!’ 하면서 케틀에 물을 끓이게 되는 것이다. 따끈하게 김이 나는 컵을 부여잡고 한 모금 마시면 얼어붙은 마음마저 녹아내리게 되는 마법적인 순간이 찾아온다.


홍차에 빠질 수 없는 티푸드, 스콘과 잼, 클로티드 크림

  

  홍차는 단독으로 마실 때보다 티 푸드와 함께 할 때 가장 빛을 발한다. 티 케이크나 초콜릿은 물론이고, 집에 굴러다니는 비스킷도 차와 함께 먹으면 입에서 풍미라는 것이 폭발한다. 커피는 그 자체로 맛과 향이 강하기 때문에 맛있는 커피는 단독으로 마셔도 좋지만, 차는 역시 티 푸드와 함께하는 편이 더 좋다. 여러 가지 티 푸드 중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건 역시 스콘. 부스스 부서지는 스콘에 잼(여기서 잼은 꼭 딸기잼이어야 한다), 부드럽고 진한 맛의 클로티드 크림(버터 안 되죠)까지 이 세 조합이면 따뜻하고 부드럽고 달콤한 맛이 풍부하게 녹아내리는, 가히 입안에서 천국을 경험할 수 있다. 이 삼합을 영국에서는 크림 티(cream tea)라고 부른다.      


  우리나라에 탕수육 부먹 대 찍먹, 민트 초콜릿을 둘러싼 민초파 대 반 민초파, 최근엔 물복(숭아) 대 딱복 논쟁이 있다면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논쟁은 ‘잼이 먼저냐, 크림이 먼저냐’이다. 반으로 가른 스콘 위에 먼저 잼을 바르고 그 위에 크림을 올리느냐, 크림을 먼저 바르고 잼을 올리느냐 하는 식이다. 전자는 콘월에서 주로 먹는 방식이고, 후자는 옆 동네 데본식이라 한다. 지금도 서로 자기가 원조임을 주장하면서 각 지역의 자존심이 걸린 크림 티 논쟁을 하고 있다. 군주제의 나라답게 이 논란을 종결시킨 건 여왕님이다. 여왕님이 스콘에 잼을 먼저 바르는 것이 공개되면서 이 논쟁은 일단락되는 듯했다. 사실 세 조합만 제대로 갖춰진다면 뭘 먼저 바르든 맛만 좋다. 나는 어떻게 먹냐고? 보기에는 데본식이 더 예쁘다고 생각하지만(하얀 크림 위에 빨간색 딸기잼이 포인트!), 딸기잼의 단맛보다 클로티드 크림의 진하고 풍부한 맛을 먼저 느끼는 것을 선호하기에 여왕님을 따라 콘월식으로 먹는다.


  영국에는 차와 관련된 격언도 많은데 런던에 전쟁기념관 기념품숍에 갔다가 “Where There's Tea, There's Hope.”라고 쓰여있는 마그넷을 보고 빙긋 웃음이 났다. 영국의 극작가 아서 윙 피네로의 말이라고 하는데 어떤 상황이라도 차 한 잔을 끓여 마실 수 있다면 희망이 있다는 것일까? 새삼 영국인의 차 사랑에 놀란다.


If you are cold, tea will warm you;

if you are too heated, it will cool you;

if you are depressed, it will cheer you;

if you are excited, it will calm you.     

- William E. Gladstone     


  내가 제일 좋아하는 차 격언이다. 추울 땐 따뜻하게 몸을 데워주고, 더울 땐 시원하게 식혀주는 차, 우울할 땐 기운을 북돋워 주고, 지나치게 흥분되었을 때는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차... 가히 차 만능설인가 싶지만, 실제로 그 효능을 경험한 적이 있다.

  아이들을 재우고 난 어느 날 밤, 남편과 서운한 점을 이야기하다 냉랭한 분위기에 서로 말도 없이 한참 앉아 있었다. 그런데 남편이 뜬금없이 “차 마실래?”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니 주방으로 가서 물을 끓이고 머그잔 한가득 차를 담아 건네주었다. 이걸 마시기 전엔 ‘흥. 갑자기 웬 차?’ 싶었지만 한 모금을 마시고 나니 알았다. 내 속에 응어리진 일부가 차의 온기로 데워지고 있었다는 걸. 나란히 앉아 말없이 차 한 잔을 다 마시고 난 뒤 샐쭉 웃으며 말했다. “어떻게 차를 마시자는 생각을 했어?” 미안하다는 말조차 필요 없이 서로의 마음을 가라앉혀주는 차의 효능을 직접 체험하고 나서 나는 티타임을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      


 한국에 다시 돌아와 처음 맞는 여름. 폭염과 폭우, 열대야와 견디기 어려운 습기... 여러모로 지독했던 여름이 끝나고 이제 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분다. 얼음 가득 아이스커피가 당기던 날들은 가고 다시 핫티가 생각나는 계절이 왔다. 다정한 이와 마주 앉은 찻자리도 좋지만, 조용히 혼자 차를 마시는 시간도 좋다. 차는 언제나 좋은 친구가 되어주니까. 차 한 잔이 주는 설렘으로 새 계절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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