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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에나 Sep 23. 2022

모두가 엄마가 된 날

절망과 희망 그 언저리에서 맞닿은 마음

  

  띵, 띵, 띵-     


  주말을 앞두고 한숨 돌린 금요일 저녁, 핸드폰 알람이 쉴 새 없이 울렸다. 큰아이 반 학부모 단톡방이었다. 처음엔 주말에 예정된 학교 행사가 갑자기 취소되었다는 공지로 시작했다. 그런데 취소된 이유가 심상치 않았다. 오늘 오후 학교 근처 공원길에서 사건이 있었단다. 하교 시간에 두 남자가 차에서 내리더니 어린아이를 동반한 젊은 여자를 칼로 찔렀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응급차가 지나가는 걸 봤어.” 몇몇 학부모가 입을 모아 말했다. 놀란 맘에 핸드폰을 붙든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영국은 총기 소지가 금지되어 있어 총기사고는 드물지만, 흉기 피습사건(stabbing)은 꽤 자주 보도가 된다. 그렇지만 대낮에, 조용한 주택가 동네에, 그것도 학교 근처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다니... 이건 영국에서도 무척 드문 일이라 다들 충격이 컸다. “제발... 제발 무사하기를....” 모두가 그녀의 안녕을 빌었다. 우리의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잠시 후 피해자가 숨을 거뒀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어떤 엄마가 피해자가 자기 친구이며, 같은 반 친구 L의 엄마라고 알려주었다. 우리 반 아이 엄마라는 얘기에 가슴이 한 번 더 쿵 무너져 내렸다. 선율이가 학교에 다닌 지 한 달밖에 안 되어 직접 알지는 못하지만, 같은 반 엄마라고 하니 더 가깝게 다가왔다. 어쩌면 등하굣길에 한 번쯤 마주쳤을지도. 사정을 들어보니 그녀는 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어린아이를 포함해 네 아이의 엄마였다. 체포된 용의자는 얼마 전 헤어진 전 남편이란다. 어떤 사정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생전에 피해자는 주위에 여러 번 두려움을 호소했다고 한다. 설마 아이들과 함께 있었을 때 범행이 일어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단톡방은 놀람과 슬픔으로 특히 남겨진 아이들에 대한 걱정으로 너울거렸다. 영국 내 일가친척이 없는 이민자 가정이었기에 안타까움이 더했다.     

 

  어떤 판단이나 뒷이야기도 없이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로 빠르게 의견이 모였다. 학교와 의논해서 모금을 할 수 있는 웹페이지를 열자는 반 대표 엄마의 의견에 다들 찬성했다. 피해자와 친한 친구라는 반 엄마에게도 위로의 마음이 오고 갔다. 마음을 가라앉힐 차 한 잔이나 식사가 필요하다면 언제든 괜찮으니 자기 집에 오라는 사람도 있었고, 경황이 없을 그녀를 대신해 아이들을 맡아주겠다고 제안하는 사람도 있었다. 길 위에는 벌써 추모의 꽃다발과 위로의 마음을 담은 카드가 가득 쌓였다. 충격과 슬픔 속에서도 서로를 토닥이는 품을 느낄 수 있었다.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 피해자가 다니던 교회 중심으로 모금 웹페이지가 만들어졌다. 그녀의 시신을 본국으로 이송하는 데 드는 비용과 피해자 가족을 지원하는데 필요한 변호사 비용을 포함해 초기 목표금액은 이만 파운드(약 3,200만 원)라고 했다. 웹페이지가 공유되자마자 모금액은 빠르게 채워졌다. 우리도 최선의 마음을 보탰다. 다들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목표금액은 곧 4만 파운드로 상향 조정되었다. 최종적으로는 목표금액을 148% 초과 달성해 59,270파운드가 모였다. 한화로 계산하면 약 9,500만 원이 모인 셈이다. 어려서부터 기부가 생활화되어 있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도움을 아끼지 않는 영국 사회의 모습에서 따뜻함을 느꼈다. 이민자 가정이라고 할지라도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보호받는 걸 보면서 공동체의 소중함과 포용성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두 달이 지나 4월 부활절 방학을 몇 주 앞둔 어느 날, 반대표 엄마가 단톡방에 메시지를 보냈다. 곧 L의 생일이 다가오는데 학급 아이들 전체를 초대해 L의 생일파티를 해주는 게 어떻겠냐고. 요리를 좋아하고 아이들에게 헌신적이었던 그녀가 살아있었다면 분명히 정성껏 준비했을 생일파티를 우리가 대신 해주자고. 영국에서 생일파티는 크리스마스와 함께 아이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날이다. 고학년으로 갈수록 친한 친구들을 초대해 생일파티를 하지만, 저학년은 주로 반 전체를 초대해 그날의 주인공으로 선물과 축하를 아낌없이 받는다. 비록 L의 엄마는 돌아가셨지만, 그 빈자리는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지만, 오늘만은 다 같이 그 아이의 엄마가 되어 생일파티를 열어주자는 그 마음 씀씀이에 모두 감동했다. 학부모 전원 찬성을 받아 생일파티가 기획되었다.      


  부활절 방학이 들어가기 전 마지막 날, 선율이는 좋아하는 아이언맨 옷을 골라 입고 선물과 카드를 챙겨 학교에 갔다. 엄마들은 각종 파티 음식과 놀잇감을 준비했고, 학교 측에서는 흔쾌히 학교 강당을 사용하도록 허락해주셨다. 수업을 마친 다른 선생님들도 많이 참여하셔서 각종 게임을 하며 아이들과 놀아주셨다고 한다. L과 다른 형제들은 물론이고 반 아이들 모두 잊지 못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교감 선생님은 직접 사진을 찍고 포토 북을 만들어주셨다. 오래도록 이 날을 기억할 수 있는 근사한 선물이었다.  

     

  영국에 가기 전에는 영국 사람들은 차갑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변덕스럽고 비가 많이 오는 날씨가 사람들의 성격에도 반영되어 냉랭하고 보수적이라고. 영국에 살아보니 일견 맞는 면도 있었다. 쾌활한 북미 사람들이나 정이 많은 남부 유럽 사람들과 다르게 겉으로는 친절하지만 쉽게 곁을 내주지 않는 영국인들의 특성이라는 게 존재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번 사건을 지켜보면서 다른 면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누군가의 비극을 그저 내 일이 아니라고 내버려 두지 않고 적극적으로 나서서 돕는 모습. 특히 엄마 생각이 가장 많이 날 생일날을 쓸쓸하게 그대로 두지 않고 모두가 엄마가 되어 채우는 모습에 크게 감동을 받았다. 위로와 공감의 공동체, ‘집단 모성’의 현장이 이런 것일까.      

  그 해 학년이 끝날 때까지 L은 학교에 나왔다. 그 뒤로 자세한 소식을 모른다. 가해자는 유죄 판결을 받아 복역 중이고 본국에 사는 이모와 삼촌이 아이들을 데려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뿐. 누구에게도 이러한 비극이 없기를 바라지만 슬프게도 인생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인간은 신이 아니기에 고통과 절망 없는 삶은 이상에 불과할 뿐 현실에서 실현 불가능한 꿈이다. 그렇다면 피할 수 없는 비극의 현실을 어떻게 살아내야 할까. 인간성이 말살된 현장에서 어떻게 다시 인간에 대한 신뢰를 꽃피울 수 있을까. 그게 가능한 일일까. 나는 그 질문에 대한 한 가지 답을 선율이 반 엄마들에게서 찾았다.       


  L과 형제자매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지금쯤이면 본국에서의 삶도 익숙해졌을까. 새로운 친구들은 많이 생겼을까. 부디 생이 그들에게 친절하기를, 마음속 작은 빛이 늘 켜져 있기를, 오늘 밤 마음을 다해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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