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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에나 May 31. 2023

오케스트라 지휘자를 떠올리게 하는 당신께

북리뷰: 버지니아 울프 지음, 이미애 옮김, 『등대로』, 민음사


친애하는 램지부인께     


안녕하세요 부인, 이렇게 인사드리게 되어서 기뻐요. 저는 2023년 한국에 사는 40대 초반 여성 안정인이라고 합니다. 『등대로』를 읽고 가장 마음에 와닿는 등장인물을 골라 편지를 쓰라는 주문에 누구를 고를까 오래 망설였어요. 다시 찬찬히 책을 읽은 뒤 당신께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에 읽었을 때와 두 번째 읽었을 때 가장 새롭게 다가온 인물이 램지 부인이기 때문입니다.       


고백하자면 처음 책을 읽었을 때 저는 부인께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 못했어요. 모두가 당신의 아름다움과 위엄, 헌신을 찬탄하지만 제 눈엔 당신이 그리 행복해 보이지 않았거든요. 늘 공감과 찬사를 받아야 직성이 풀리는 허약한 내면을 가진 램지 씨를 떠받드는 모습이 답답했고, 그의 불같고 까다로운 성미에 당신이 일조했다고도 생각했어요. 애써 민타와 폴을 맺어주려고 하거나 애초에 결혼 생각이 없는 릴리에게 자꾸 결혼을 강요하는 듯한 모습도 고리타분하게 보였어요. 엄마처럼 살기 싫다고 고개를 흔드는 딸들처럼 당신을 비난했죠.      


다시 읽었을 때는 생각이 바뀌었어요. 2023년을 사는 ‘나’의 시선으로 1800년대 후반 여성의 삶을 판단하는 자체가 온당한지 반성이 들더라고요. 부인은 여덟 아이를 키우는 엄마죠. 아이 둘로도 허덕이는 저는 여덟이라는 숫자에 일단 무릎을 꿇습니다. 아무리 유모와 하인이 있더라도 본디 아이들이란 신경 쓸 게 한둘이 아니잖아요. 그 뒤치다꺼리만 해도 진이 빠질 텐데 휴가 때 지인들을 초대해 함께 머무르고 누구도 소외되지 않도록 살뜰히 챙기는 모습에 감탄했어요. 당신은 나눔을 실천하고, 고립된 등대지기 가족에게 보내줄 양말을 손수 짜는 사람이죠. 허기진 맥냅 부인에게 우유 수프를 마련해 주려는 다정함도 돋보였어요. 누구나 쉴 수 있게 시원한 그늘을 내주는 아름드리나무 같은 당신의 너른 품에 저도 기대어 쉬고 싶어졌습니다.     


램지부인, 당신을 보며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지휘자가 떠올랐어요. 처음에는 관리와 통제의 아이콘으로 보였던 당신이 실상은 해당 곡의 선율과 리듬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여러 다른 소리를 내는 악기를 하나로 조율하는 지휘자였음을 깨달았습니다. 부인으로 인해 주위 사람들은 빛이 나고 하나로 화합이 되지요. 어느 각도로 봐도 밉상인 찰스 탠슬리의 장점을 찾아내고 아이들이 그를 놀리지 못하도록 엄하게 훈계하는 모습엔 존경심마저 듭니다. 저 아름다운 분이 내 어머니라고 자랑스러워한 딸 프루의 마음을, 당신의 부재를 그토록 괴로워한 릴리의 마음을 이제는 이해해요. 만나는 모든 이들을 환히 비춰주던 등대 같은 사람, 당신이었으니까요.        


그런 부인이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었고, 다 써버렸다고, 다른 사람들을 감싸고 보호하면서 자신에게는 최소한의 껍데기조차 남아있지 않았다고 고백할 때 마음이 아팠습니다. 아이들이 모두 잠은 깊은 밤, 당신이 홀로 어딘가를 응시하거나 책을 읽고 있을 때는 범접하기 어려운 아우라가 있었죠. 그 순간이 유일하게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는 순간이었겠죠? 현이 팽팽하게 당겨진 듯 매 순간 긴장한 삶에서 놓여나 온전한 휴식을 누리는 시간이 좀 더 자주, 길게 있었으면 어땠을까요? 당신의 이른 죽음을 좀 더 늦출 수 있지 않았을까요? 부인, 그곳에서는 편안하신가요? 모든 책임과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우신가요? 부인의 답장을 기다립니다.      


존경과 사랑을 담아, 정인 드림     



버지니아 울프 지음, 이미애 옮김, 민음사 등대로 리커버판



정인님께     


안녕하세요, 정인님? 편지 잘 받았답니다. 책 속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 중에 저를 떠올려 주셔서 기뻤습니다. 저를 이해하려고 애써주셔서,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봐 주셔서 고맙습니다. 제가 살았던 빅토리아 시대는 여성의 권리라는 말조차 존재하지 않았던 때였답니다. 당시 여성들은 결혼 전에는 아버지에게, 결혼 후에는 남편에게 종속되었죠. 한 인간으로서 존재 의미를 찾기보다는 오직 남편을 내조하고, 자식들을 올바르게 교육하는 역할, 즉 ‘집 안의 천사’로만 살아야 했죠. 온몸을 조이는 코르셋처럼 여성들에게는 오직 의무만이 강요되던 시대였어요. 노동계급 여성들의 삶은 비교할 수 없이 더 비참하니 불평하긴 어려웠지만요.     


이런 사회적 조건 속에서 저는 제 삶에 충실하려고 최선을 다했어요. 남편에게 맞춰주려는 제 모습이 100년도 더 지난 당신의 눈에는 고루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당시엔 제게 허락된 유일한 태도였답니다. 남편의 약점을 모르지 않지만 제가 아니면 누가 그를 감싸겠어요? 우리 부부 사이가 겉으로 보기엔 기울어진 것처럼 보여도 사실 남편과 저는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였어요. 남들이 모르는 둘 사이의 전쟁에서 제가 자주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을 기억하시나요? 드러낼 수는 없었지만 은밀한 미소가 제 입가에 감돌고 있었다는 것도요.      


당신은 매일 바쁘게 살아가는 저를 안쓰럽게 생각하지만 내 삶은 대체로 행복했어요.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그 속에서 살아가죠. 엄마, 아내, 딸, 자매, 친구, 안주인 등등 때론 이런 관계가 나라는 사람을 구성한다고 생각해요. 독립된 개인이라는 게 실제로 가능하긴 한 걸까요? 얽히고설킨 관계가 짐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나에겐 기쁨과 자존감의 원천이기도 했어요. 사람들에게 존경 어린 찬사를 받을 때 존재 이유를 발견하기도 했죠.      


하지만 저도 기회가 있다면 릴리처럼 자유롭게 살아보고도 싶네요. 독신 여성은 삶에서 가장 좋은 것을 놓치는 거라고 릴리에게 말했지만 지금은 집요한 권유에도 뚝심 있게 자신의 길을 걸은 그녀가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다음 생엔 “여자들은 그림을 그릴 수 없어요. 글을 쓸 수 없어요.”라는 탠슬리 씨의 말을 가볍게 뛰어넘고, 늘 바랐던 대로 사회 문제를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는 연구자가 되고 싶어요. 2023년을 살아가는 정인님께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지금 여성들은 자유로운가요?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나요? 저와 얼마나 같고 얼마나 다른가요? 서로 평등하면서도 존중하는 관계는 가능한가요?     


정인님, 저는 제 삶에 부끄럽지 않게 최선을 다했지만 지금을 살아가는 당신 눈엔 부족한 점도 있겠죠? 저의 한계는 곧 시대의 한계이기도 하니까요. 등대는 빛을 비추고 방향을 제시하는 중요한 길잡이지만 막상 가까이 가면 작고 볼품없게 보이기도 하지요. 그런 등대 같았던 저를, 제 안에 빛과 어두움을 알아주셔서 고맙습니다. 부디 저를 뛰어넘어 더 나아가세요.      


추신: 지금 저는 아주 편안하답니다. 정인님도 그렇기를 바랄게요. 우정과 호의의 순간이 당신의 삶에 더 자주 찾아오기를 바라며.      


하늘에서 램지부인, 아니 헬렌 드림



영국 세인트 아이브스 고드레비의 등대. <등대로>의 모티브가 된 바로 그 등대라는 걸 알았을 때의 감동이란! 여러모로 잊지 못할 등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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