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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에나 Jun 14. 2023

매혹적인 소설의 3가지 특징

북리뷰: 정지아, <아버지의 해방일지>, 창비


가만 보니 매혹적인 소설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 번째로 꼽는 건 가독성이다. 유튜브, SNS, 넷플릭스 등 주의력을 분산시키는 것들이 도처에 깔린 시대다. ‘읽고 쓰기’를 삶의 중심에 놓고 있는 나조차도 책으로 시선을 옮기는 게 쉽지는 않다. 순식간에 빨려 들어가게 만드는 도입부, 주위의 방해에도 지속적으로 몰입하게 만드는 이야기의 힘이야말로 요즘 시대 소설이 갖춰야 할 필수 조건이다.

두 번째는 새로움이다. 주제의 새로움, 소재의 새로움, 기법의 새로움, 형식의 새로움 무엇이라도 상관없다. 몰랐던, 알지만 모른 척했던, 혹은 모르고 싶었던 낯선 세계를 보여주는 소설에 마음이 뺏긴다. 반복적인 일상에 벼락처럼 내리 꽂히는 신선한 충격, 문학이 줄 수 있는 선물이다. 밑줄을 긋고 싶은 매력적인 문장이 많다면 금상첨화​!


세 번째는 공감 가는 인물이다. 나와 유사점이 있거나 나를 돌아보게 되는 등장인물, 왠지 마음이 가고 말을 건네고 싶은 그와 그녀를 만날 때 책이 더 좋아진다. 꼭 주인공이 아니어도 괜찮다. 전형적인 인물처럼 보여도 그 사람만의 고유함, 사랑스러움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 그/녀는 소설 밖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와 내 옆에서 살아 숨 쉬는 사람이 된다.



2022년 9월에 출간된 정지아 작가의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여전히 서점가의 초대박 베스트셀러다. 무려 문재인 전 대통령과 유시민 작가의 추천 도서고, 지난달 평산책방 첫 문화행사에 정지아 작가와의 만남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내남이 다 읽는 베스트셀러라면 시큰둥해지고 마는 나는 굳이 찾아 읽지 않았다. 그러다 올해 초, 한 독서 모임에서 이달의 책으로 선정되어 읽기 시작했다. 여전히 반쯤은 시큰둥한 상태로. 그러다 얼른 자세를 고쳐 앉았다. 어라, 첫 문장 좀 보소.


​'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평생을 정색하고 살아온 아버지가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진지 일색의 삶을 마감한 것이다.' (7쪽)

“아버지가 죽었다.” 로 시작하는 책이라니. 엄근진(엄격·근엄·진지)의 표상인 아버지가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생을 마감하셨다고 포문을 여는데 어찌 다음이 궁금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근래 읽은 가장 강렬한 첫 문장이었다. 작가의 솜씨에 감탄하며 책장을 넘겼다. 놀랄만한 흡입력은 마지막까지 고스란히 이어졌다.


이 책의 구조는 매우 단순하다. 장편소설인데 목차가 달랑 '아버지의 해방일지-작가의 말' 이게 다다. 표면적으로는 아버지 장례식 3일간 풍경을 다루지만 그 3일에 아버지 전 생애를 관통해 내는 작가의 솜씨에 경탄했다. 아버지와 주변 인물들을 통해 한국 근현대사가 당시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파괴했는지 낱낱이 보여준다. 전쟁도 통일도 민주화도 다 교과서로 배운 나에게 1965년생 작가가 들려주는 아버지 세대의 얘기는 그 자체로 새로움이다. 암호 해독하듯 몇 번씩 읽어야 겨우 이해하는 전라도 지역어의 향연은 또 어떻고.

<아버지의 해방일지>의 주인공 ‘아리’의 아버지는 일견 우스꽝스럽게 보인다. 농사도 『새농민』에 의지해서 지을 만큼 고지식하고, 말끝마다 철 지난 사회주의, 민중 운운하며 현실감 제로인 모습이다. 그런데 장례식이 진행될수록 주변 인물들의 증언으로 몰랐던 아버지를 마주하게 된다.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고 묵묵히 돕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딸의 변화된 시선을 함께 따라가며 독자들도 아버지의 여러 얼굴을 만난다. 어떤 비난도 판단도 없이 “긍게 사람이지”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아버지 방식의 위로가 딸인 작가에게도, 두 세대를 지나 나에게도 울림을 준다.​


그 외에도 내 마음에 훅 들어온 인물이 있다. 바로 떡집 언니. 떡에 홍어 무침에 각종 전과 직접 만든 양갱은 물론 김치까지 담가온 능력자. 혹시 상주들 체할까 싶어 깨죽에 전복죽까지 살뜰히 만들어 온 속 깊은 사람. 가장 취약한 순간에 이런 이의 존재는 그 자체로 위로다. 손이 발이라고 놀림을 받고, 주기보다 받기에 익숙한 나 같은 사람은 범접할 수 없는 경지다. 돌봄 능력 만렙인 그녀가 곁에 있으면 좋겠다, 바라다가도 내가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한숨을 폭 쉬었다.


안다. 이쯤 되면 내 아버지 얘기를 해야 한다는 것을. 책 내용을 길게 늘어놓는 것은 아버지 얘기를 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도. 가족만큼 할 말이 많은 주제도, 그렇지만 하기 어려운 주제도 없을 것이다. 정지아 작가는 픽션이라는 형식 뒤로 숨을 수 있지만 나는 어쩌나. 장례 이후에나 겨우 뭔가를 쓰고 말할 수 있으려나. 그땐 너무 늦으려나. 아버지를 꼭 닮은 딸, 아버지의 장점과 단점, 강점과 약점을 모조리 물려받은 나. 사춘기 반항이 없었던 탓일까? 마흔이 넘어 마음의 방황이 깊다. 아버지는 분명히 사랑이었는데, 사랑이었을 텐데 결정적인 순간에 주파수가 어긋났던 때가 자꾸 떠오른다.

“내가 부모에게 받은 상처와 이에 따른 마음과 내 삶에 끼친 영향을 잘 인식하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는 것부터 극복이 시작됩니다. 부모에게 미운 마음이 생기는 것, 괜찮습니다. 그 마음을 가졌다고 당신이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한 TV 프로그램에서 오은영 박사님이 하신 말씀에 깊이 위로받았다. 인식이 먼저 왔으니 극복도 시작되었다고 믿는다. 언젠가는 작가처럼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빌어 나의 해방일지를 쓸 수 있을까. 냉담의 파고를 넘어 화해라는 섬에 다다를 수 있을까.



* 이 글은 사교육걱정없는세상 노워리기자단 블로그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https://m.blog.naver.com/noworry21/2231245437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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