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이선호 씨의 죽음을 추모하며
“Sean's mum, come here!”
누군가가 나를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하교 후 아이들은 여느 때처럼 학교 운동장으로 달려가고, 나는 다른 엄마들과 서서 이야기를 나누던 참이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정글짐 아래 한 아이가 쓰러져 있었다. ‘아, 뭔가 잘못되었구나.’ 정신없이 달려가 아이를 살폈다. 눈을 감싸고 누워있는 아이와 손가락 사이로 흐르는 피…….
“아, 어떡해. 선율아, 눈 떠봐. 눈 보여?”
깜빡 깜빡 깜빡, 3초가 흘렀다.
“괜찮아, 잘 보여요.”
정글짐에서 뛰어내리려는데 다른 아이와 머리를 부딪쳐 떨어졌단다. 자세히 보니 아까 걱정했던 것보다는 상태가 나쁘지 않았다. 눈가가 좀 찢어졌을 뿐 시력에는 이상이 없었다. 아, 하나님 감사합니다. 집에 와서 상처를 소독한 뒤 봉합하는 특수 밴드를 붙였다. 안경원에 가서 부서진 안경테도 교체했다. 조금만 운이 나빴으면 눈을 다칠 수도 있었지. 어쩌면 너무도 다른 하루가 될 수도, 절대로 잊어버릴 수 없는 날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런 생각에 이르자 다시 온몸이 떨렸다.
아이를 키우면서 응급실 한 번 안 가본 사람은 없다던데 나 역시 예외는 아니다. 내 심장을 들었다 놨다 한 건 죄다 큰 아이 선율이. 다섯 살 무렵, 친구네 집 근처 공원에서 놀다 다리가 찢어져 응급실에서 꿰맨 것을 시작으로 시아버님이 일하시는 농기계에 발을 쑥 집어넣어 발가락이 찢어졌던 일, 두 동강이 난 크록스를 보며 신발이 없었다면 어쩔 뻔했나 아찔했던 순간이 생생하다. 일곱 살이었던가 스쿠터를 쌩쌩 타다가 경사로가 있는 차도에 그대로 뛰어들었던 일도 잊을 수 없다. 맞은편에 오던 마을버스가 멈춰 서서 망정이지 나는 그날 눈앞에서 아이를 잃는 줄 알았다. 길거리에서 주저앉아 미친 사람처럼 얼마나 울었던지.
다시 생각해도 가슴을 쓸어내리는 순간들이다. 그래도 결과적으로 큰일이 아니었거나 일정 기간 치료받고 시간이 지나면 회복되는 일이었다. 크고 작은 사고를 겪으며 부모로서 내가 얼마나 무력한지 알게 되었다. 아이 곁에 늘 있을 수도, 지켜줄 수도 없고, 심지어 옆에 있어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는 것도.
아이가 다친 후 응당 살아있어야 할 한 청춘이 너무도 처참하게 죽었다는 뉴스가 눈에 들어왔다. 평택항에서 작업반장인 아버지를 도와 검역업무 아르바이트를 했던 대학생 고 이선호 씨. 사고 당일에 갑자기 쓰레기를 주우라는 작업 지시를 이행하다 안전핀이 빠져있던 300kg 컨테이너 날개에 깔려 즉사했다. 원래 하던 업무도 아니었고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사전 고지도 없었던 데다 최소한의 안전장비 지급도 해주지 않았다. 더군다나 사고당한 그를 발견한 직원들이 119에 신고한 게 아니라 윗선에 보고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귀를 의심했다. 그게 사고 매뉴얼이라니.
원청업체 ‘동방’은 진심 어린 사죄와 재발 방지 약속은커녕 형식적인 사과도 하지 않은 채 책임을 미루기만 했다. 그렇게 장례도 치르지 못한 채 20일이 흘렀다. 점차 사건이 알려지고 공론화되자 떠밀리듯 사과문을 읽고 허리를 숙이긴 했지만 사과 대상은 유족이 아닌 언론 앞에서였다. 대국민 사과. 더 기가 막힌 건 사과 전 아무런 대책도 없이 사고 발생 12일 만에 작업 재개를 요청했다는 것. 사람이 그렇게 죽어 나가도 이윤이 우선인 기업의 비정함이 무섭다.
자주 듣는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고인의 아버지가 평소 아들과 밥을 먹던 구내식당에 가서 무릎을 꿇고 “선호야, 너를 사지로 데리고 온 아버지를 절대 용서하지 말아라. 절대로 용서하지 말고 가라”라고 하셨다는 말씀을 듣고 같이 울었다. 얼마나 죄책감이 심하시면 저렇게 말씀하실까. 당신 잘못이 아닌데, 그저 잠시 일하러 왔을 뿐인데. 정작 잘못을 한 사람과 기업은 따로 있는데. 아버지의 휴대폰에 저장된 선호 씨의 이름은 ‘삶의 희망’이었다. 이제 그 희망이 사라졌다.
완벽한 회복이 불가능한 일이 인생에는 엄존한다는 것, 그런 일을 겪은 이들에게는 남은 옵션이 없다는 것, 오직 ‘그 이후’를 견뎌내는 일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김영하, <오직 두 사람>, 작가의 말 중에서
인생의 많은 상처는 상당 부분 시간이 지나면 회복이 가능하다. 그러나 소설가 김영하의 말대로 완벽한 회복이 불가능한 일은 일어나고 그 사건은 남은 인생을 완전히 바꿔버린다. 오직 ‘그 이후’를 견뎌야 하는 이들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정의당 장혜영 의원은 고 이선호 노동자 산재 사망 사건 해결 촉구 추모 행사에서 노래를 부르기 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가끔 노래가 너무 무력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노래를 만드는 사람들,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 노래를 듣는 사람들은 무력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다시는 이런 억울한 죽음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 그러기 위해서 무엇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을 담아서 노래를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노래 대신 같은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읽고 쓰고 지우고 다시 쓰면서 1주일을 꼬박 매달렸다. 어렵고 무거운 주제라 피하고 싶었지만, 이 글 말고는 도저히 쓸 수가 없었다. 자식이 조금만 다쳐도 부모의 마음은 쿵, 하고 나락으로 떨어지는데 처참한 사고로 자식을 잃은 부모의 마음은 감히 헤아릴 수도 없다. 입법자도 아니고, 권력자도 아닌 그저 아이 키우는 평범한 시민이지만 무력감에 지지 않고 뭐라도 해야겠어서 쓴다. 이런다고 죽음을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새까맣게 타버린 부모님들의 마음을 위로할 수도 없겠지만. 그저 내 몫의 노래를 부르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