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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에나 Mar 12. 2024

카라카스, 낯선 도시가 내게 스며들 때

북 리뷰: 서정, <카라카스의 수업들: 베네수엘라가 여기에>, 난다


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코앞에 왔다. 그러나 아직 나는 패딩을 벗지 못한 신세다. 겨울추위는 방비라도 하건만 꽃샘추위는 더더 매섭고 마음까지 시린 것 같다. '춘래불사춘' 봄이 왔으나 봄 같지 않은 날들이 이어진다. 겨우내 엷은 우울을 앓았는데 지난 몇 주간은 둑을 넘어 터져 버렸다. 객관적으로 별 일도 없는데도 마음이 지옥일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하양, 노랑, 분홍 색색의 꽃이 피고, 따스한 봄바람이 볼을 간질이는 날이 오면 좋아지려나...? 애써 희망을 품어본다.

잿빛 하늘이 무겁게 내려앉은 날, 서정 작가님의 <카라카스 수업의 장면들: 베네수엘라가 여기에> 책을 챙겨서 밖으로 나왔다. 이름도 낯선 '카라카스'는 남미 베네수엘라의 수도 이름이다. 이 나라에 대해 내가 아는 건 문장이 아니라 오직 단어로 존재한다. 남미, 스페인어, 차베스, 위험, 강도, 불황 등등. 여행지로서 각광받는 곳도 아니고, 아는 것도 없는 나라에 대한 책을 펼치게 된 건 저자 '서정 작가님'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일단 "돌며 살며 사랑하며 세계 곳곳을 쓰는 작가 서정!"이라는 띠지 소개문구에 매료되었다. 나 역시 주재원이었던 남편을 따라 영국에서 3년간 거주했고, 그때 이방인으로서의 경험을 담아 <영국 탐구생활>이라는 독립출판물을 펴냈기 때문에. 작가님은 이름마저 낯선 도시, 카라카스를 어떻게 소개해주실지 궁금했고, 일상 속에 담긴 그만의 시선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더불어 출판사 '난다'에 대한 신뢰가 있었다. 읽을만한 책을, 만듦새 좋게 펴냈으리라 하는 믿음!

"카라카스에서 몇 년간 살게 되었다."

책을 여는 첫 문장이다. 화장기 없는 얼굴처럼 멋을 부리지 않은 담백한 문장으로 시작하는 책이라니, 왠지 마음에 들었다. 책을 읽다 보니 어느 날 아침 갑자기 카라카스에 살게 된 저자도 그곳이 낯설기는 마찬가지였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 불안정한 정치경제 상황, 심지어 문학조차도 생경한 그 땅에서 그녀는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살 집을 구하고, 일상을 정비하고, 스페인어를 배우기 시작한 지 1년쯤 지났을 때 그녀는 "묻고 싶은 것을 묻고, 들은 것을 정리하고, 쓰인 말들을 찾아 읽을 마음이 차올랐다."라고 고백한다. 낯선 땅이 일상의 공간이 되고, 낯선 지명이 익숙한 거리가 될 때까지 도시를 산책하며 천천히 그곳에서 적응해 간 기록, <카라카스 수업의 장면들>은 이런 책이다.

1부 '보다 친밀한'은 적응기, 2부 '보다 진실한'은 관찰기에 가깝다. 1부에서는 어렵게 구한 집에 계속 벌레가 나와 방역을 하는 이야기, 대정전이 되어 온 가족이 최소생활을 영위해 나가는 에피소드가 눈에 띈다. 김영하 작가는 <여행의 이유>라는 산문집에서 “계획한 모든 것을 완벽하게 성취하고 오는 그런 여행기가 있다면 아마 나는 읽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재미가 없을 것이다.(18쪽)”라고 썼다. 이방인으로 거주하는 몇 년을 긴 여행이라고 본다면 이런 고생담은 독자에게도 잊지 못할 ‘사건’이 된다.

특히 대정전의 상황에서 인간성 상실의 모습이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이웃들과 아보카도 한쪽이라도 나눠먹는 장면은 뭉클하기까지 했다. 작가는 "재난의 현장이란 참혹한 삶의 한 페이지면서도 인간성의 불씨를 확인하는 공간이기도 하다(97쪽)"고 표현했다. 그에게 대정전은 일시적인 불편함을 넘어 문명에 대한 성찰과 일상의 습관을 바꾸는 경험으로 확장된다. 전동 핸드밀이나 커피머신 대신 수동 핸드밀에 드립커피를 즐기고, 전기밥솥 대신 압력밥솥이면 충분한 삶. 이어 "삶을 비극이라 상정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삶을 시작한다"는 W.B.예이츠의 문장으로 마무리하는 솜씨에 경탄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베네수엘라에 대한 정보, 지식뿐 아니라 저자의 풍부한 독서내공을 엿보는 즐거움이 컸다.

2부에서는 베네수엘라 미술, 건축, 음식, 음악, 대학 등 개인의 경험을 넘어 도시의 면면을 더욱 깊이 들여다본다. 개인적으로는 남미 특유의 쨍한 색채감과 함께 미술계에서는 관심이 사그라든 키네틱 아트가 여전히 사랑을 받는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작년 봄 국제갤러리에서 본 '이우환과 칼더' 전시가 너무 인상적이었던 터라 책에서 소개된 '헤수스 소토'의 작품이 궁금해졌다. 중간중간 사진자료가 실려있어서 실견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덜 수 있는 것도 좋았다.

일 년 내내 16도에서 26도 봄날씨라는 곳 카라카스. 아직 한기가 가시지 않은 서울에서 상춘의 도시 카라카스를 상상하는 시간. 그 시간만은 나로부터 멀리 떨어져 우울감을 털고 책에 집중할 수 있었다. 카라카스의 삶이 녹록지 않았음은 분명하지만 그 속에서도 빛나던 순간을 향유하고 현재를 단단히 붙든 작가님의 마음이 내게도 조금은 전해져 온 것 같다. 지금은 오슬로, 오만을 거쳐 브라질 상파울루에 계시는 듯하다. 언제 어디서든 건필하셔서 섬세하고 다양한 이야기 들려주시기를. 귀한 책 만들어주시고 보내주신 '난다 출판사'도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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