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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에나 Feb 08. 2024

어떠한 댓가를 치르더라도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이수현 옮김, <킨>, 비채


©영화 '노예12년' 중에서


독서 모임이 아니면 만날 수 있었을까 싶은 책, 소개해 준 사람에게 한없이 고마워지는 책이 있다. 옥타비아 버틀러의 소설 『킨』이 내겐 그렇다. 처음엔 손가락 두 마디 두께에 하드커버 표지에 뜻을 알 수 없는 제목까지 ‘난해한 벽돌 책’일 거란 선입견이 있었다. SF소설은 낯선 장르라 취향에 맞을까 갸웃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단 시작하고 보니 전혀 달랐다. 프롤로그부터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이 책은 시종일관 예상치 못한 전개로 내 시공간을 삼켜버렸다. 압도적인 몰입감, 『킨』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소설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마지막 여행에서 팔 하나를 잃었다. 왼팔이었다. (8쪽)” 다음 장을 안 넘겨볼 수 없는 강렬한 시작이다. 소설은 1970년대를 살던 미국 흑인 여성 다나가 갑자기 1800년대 초 미국 남부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상황을 보여준다. 현실에서 다나는 케빈이라는 백인 남성과 결혼했고 자유롭고 동등한 삶을 영위하지만, 노예제가 살아있는 19세기로 가게 되면 모든 게 달라진다. 남편을 포함한 백인들을 주인님이라 불러야 하고, 언제든 팔거나 죽일 수 있는 노예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당시 흑인 여성 노예가 당하는 성차별과 인종차별을 어떻게 이렇게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는지 놀랐다. 자유와 평등이 공기처럼 당연한 사회에서 온 다나는 때로 저항하면서 때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현실에 적응하면서 살아간다. 흑인 여성으로서 다나가 맞닥뜨리는 정반대의 현실을 보여주기에 타임 슬립만큼 효과적인 형식이 있을까. 주제와 형식이 서로 최고의 합을 보여주는 솜씨에 연신 감탄했다. 왜 백인 남성이 주류였던 SF 소설계에서 흑인 여성 작가 옥타비아 버틀러가 ‘그랜드 데임’으로 추앙받았는지 납득할 수 있었다.


다나가 과거로 돌아가는 결정적인 계기에는 항상 백인 농장주의 아들 루퍼스가 결부되어 있다. 그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다나는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과거로 돌아가고, 다나가 죽을 정도의 위험에 처했을 때 현재로 돌아온다. 처음에 다나는 자신이 왜 시간 여행을 하게 되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곧 깨닫게 된다. 루퍼스가 자기 조상이며, 이 아이의 생존을 지켜내야만 미래에 자신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그때부터 다나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생존을 도모하면서도 자신의 존엄을 지킬 수 있는 외줄타기를 시작한다.


『킨』에는 중요한 등장인물이 한 명 더 있다. 자유민이었지만 노예 신분의 남자를 사랑해서 함께 도망쳤다가 잡힌, 그래서 노예가 된 앨리스라는 여성이다. 어린 시절부터 앨리스를 마음에 두었던 루퍼스는 그녀를 갖고 싶어 하고 결국 비열하게 다나를 협박해 자기 소유가 되도록 만든다.


앨리스는 루퍼스에게 갔다. 그녀는 순응했고, 더 조용하고 차분한 사람이 되었다. 죽이지 않은 대신 자기가 조금 죽은 것 같았다. (326쪽)


나는 책에서 이 부분이 가장 가슴 아팠다. 다나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 강인했던 앨리스가 자신의 일부가 죽어버린 채로 살아가는 상태... 앨리스는 두 아들을 낳고 기르며 잠시 안정을 찾은 듯 보였지만 아이들을 뺏긴 줄 알았을 때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감행한다. 그런 앨리스가 이해되면서도 원통했다. 다나처럼 다른 미래를 알고 있었다면, 그래서 “내가 나의 주인으로 사는 (429쪽)” 감각을 잃지 않았더라면 이토록 깊은 절망으로 생을 끝맺지 않았을 텐데. 하나의 영혼을 가지고 있는 것만 같은 두 여성의 다른 선택은 지옥 같은 현실을 상대화할 수 있는 힘, 즉 역사를 아는 힘의 유무가 아니었을까.


노예 해방의 역사를 알고 있다고 해서 과거로 돌아간 다나가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그래도 그녀는 “루퍼스가 자기 아버지의 복사판으로 자라지 않게 하기 위해 (150쪽)” 그를 가르치려 애쓰고, 흑인 노예 아이들에게도 몰래 글을 가르친다. 책을 읽는 내내 내가 주인공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물었다. 아마도 죽은 듯이 조용히 목숨만 부지하길 바랐을 텐데 들키면 살점이 떨어져 나가도록 채찍에 맞을 것을 알면서도 기어코 위험을 감수하는 다나를 보며 조마조마하면서도 존경스러웠다. 결국 백인 농장주인 루퍼스에겐 소용이 없었던 교육이 흑인 아이들에게 변화의 씨앗이 되었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내겐 교육의 명백한 한계와 눈부신 가능성을 동시에 보여주는 은유로 보였다.


결국 다나는 한 쪽 팔을 내주는 고통을 감수하고서 자신이 원래 살던 시공간으로 돌아온다. 다른 차원의 삶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준엄한 진실을 일깨우는 것일까? 현재의 기억을 가지고 과거로 돌아간다면, 혹은 미래로 가 그때의 절실한 문제를 풀기 위해 현재로 돌아온다면 지금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어떤 희생과 대가를 치러야 할까. 다나처럼 용기를 잃지 않을 수 있을까. 좋은 소설 한 권이 주는 질문이 지금껏 묵직하게 남는다.


한번 잡으면 끝까지 놓칠 수 없는 이야기 속으로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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