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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에나 Dec 26. 2023

문학의 쓸모를 묻는다면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한겨레출판


여름의 초입에 두 권의 소설을 읽었다. 여름 글방에서 추천해 주신 청소년 소설로 둘 다 상실을 주요 주제로 다룬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책은 좋았지만 과제를 하면서 속으로 자주 투덜거렸더랬다. 여름에 상실이라니. 여름이야말로 생동하는 젊음의 계절, 푸른 에너지로 충만한 계절이 아닌가. 무성하던 잎이 떨어지는 가을이나 앙상한 가지만 남는 겨울이면 몰라도 여름은 아니잖아. 그런데 글을 다 쓰고 나서 연이어 들리는 상실의 소식들, 수재로 인한 대규모 참사부터 가까운 이들이 겪은 갑작스러운 죽음의 고통까지 계속되는 부고를 들으며 깨달았다. 여름에 무슨 상실이냐고 했던 건 철없는 청춘의 오만이었을지 모르겠다고. 상실이 미치지 않는 계절이란 없으며, 슬픔은 늘 헤아릴 수 없는 채로 우리 곁에 상존한다.


11월, 글쓰기 동료들과 신형철 평론가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산문집을 함께 읽었다. 2010년 이후부터 지면에 발표한 글을 모은 책으로 슬픔 자체에 대한 고찰부터 소설, 시, 사회, 문화, 노래 가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에 관해 쓴 90여 편의 글이 실려 있다. 일단 평론집이라고 하면 해당 작품을 접하거나 접하지 않고의 차이가 큰 법인데, 신형철의 평론은 그 자체로 완결성이 있다는 점이 놀라웠다. 주요 비평 분야인 문학이 아닌 정치·사회·문화를 비판할 때조차 그의 글은 아름답다. “시는 세계와 싸울 때조차도, 아름다움을 위해, 아름다움과 함께 싸워야 한다.”(272쪽)는 소신이 단어 하나, 문장 하나 마다 고스란히 깃들어있다.


 무수한 밑줄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한 대목을 소개하고자 한다. 신형철은 ‘아름다운 문장을 읽으면 당신은 어쩔 수 없이 아름다운 사람이 된다.’는 소설가 김연수의 글을 소개하면서 자신에게 그리고 독자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읽고 쓰는 일만으로 우리는 점점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느냐고. 읽고 쓰는 것을 업으로 삼아 달려가고 있는 나도 스스로 자주 되묻는 질문이라 그의 생각이 궁금했다. 조금 길지만 문단 전체를 옮겨놓는다.  


인간은 무엇에서건 배운다. 그러니 문학을 통해서도 배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게서 가장 결정적으로 배우고, 자신의 실패와 오류와 과오로부터 가장 처절하게 배운다. 그때 우리는 겨우 변한다. 인간은 직접 체험을 통해서만 가까스로 바뀌는 존재이므로 나를 진정으로 바꾸는 것은 내가 이미 행한 시행착오들뿐이다. 간접 체험으로서의 문학은 다만 나의 실패와 오류와 과오가 어떤 종류의 것이었는지를 ‘파악’하는데 도움을 주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피 흘릴 필요가 없는 배움은, 이 배움 덕분에 내가 달라졌다고 믿게 할 뿐, 나를 실제로 바꾸지 못한다. 안타깝게도 아무리 읽고 써도 피는 흐르지 않는다.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한겨레출판, 176쪽


통렬한 자기반성이 없이는 나올 수 없는 문장들이라 읽는 나에게도 아프게 다가왔다. 나 역시 정치 사회문제에 대해 글 한 편을 쓰고 나면 마침표를 찍는 동시에 해방감과 함께 왠지 모를 죄책감을 느끼곤 했다.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 채, 어떤 것도 희생하지 않은 채, 글 한 편 썼다고 그래도 외면하지 않았잖느냐고 안도감을 느끼는 나. 그런 다음 다른 작업을 향해 훌쩍 떠나는 자신이 부끄러우면서도 어쩔 수 없다 여겼다. 신형철의 글을 읽다보니 외면하고 감춰둔 내 마음을 들킨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러나 여기가 끝은 아니다. 신형철의 사유는 계속 이어진다. 그는 글의 말미에 이렇게 쓴다. “피 흘리지 않으면 진정으로 바뀌지 않는다고 했지만, 거꾸로 말하면, 피 흘리지 않고 인생을 시뮬레이션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177쪽) 차가운 분석 뒤에도 그는 낙담하거나 냉소하지 않는다. 다시금 문학을 향한 그의 변함없는 믿음을, 희망을, 사랑을 고백한다. 그 모습에 나도 조금 위로받았고, 주저앉지 않고 한 발짝 더 나가고 싶은 용기가 생겼다.


일 년 동안 치열하게 읽고 썼다. 돌아보면 많은 진보가 있었던 것 같기도, 여전히 가시적인 성과 없이 제자리걸음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이제는 최소한 ‘여름에 무슨 상실이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지난여름의 나를 부끄러워할 줄은 알게 되었다. 문학 덕분이다. 구체적으로 나를 다른 인식의 세계로 초대했던 책들과 동료들, 그리고 그걸 소화해서 글로 담아내려고 고민하고 애썼던 덕분이다. 신형철의 지적처럼 문제를 인식하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안다. 하지만 적어도 첫걸음은 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나와 타인과 세계에 대해 끝없이 탐구하는 문학에 기대어,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감내해가며, 나 또한 지금보다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란 희망을 품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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