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층으로 올라가는 나무 계단은 마치 내가 밟을 때마다 트림을 하 듯 꺼억 꺼어억거렸다. 건물도 낯선데 2층의 풍경은 일제시대 조선어학회 편찬소처럼 벽 사방에 오래된 서류 뭉치들에 찌든 세월이 묻어있었다.
어디 가서 '저 사람 뚱뚱하네!'라는 말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을 것 같은 후덕한 여성 한 분이 나와 같이 간 딸내미와 나를 정확히 이등분한 눈길로 한 번씩 바라본다. 그 여성이 왜 왔냐고 묻기도 전에 '제 딸인데, 이번 학기 첼로 등록을 하려고요'라고 내가 먼저 예상 질문에 긴장하며 미리 대답을 했다. 첼로 등록하는데 뭐 긴장까지 하나? 하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내가 살고 있는 곳은 한국이 아닌 프랑스이고,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첼로 등록을 프랑스어로 수속을 하려니깐 주눅이 들 수밖에 없었다.
등록을 받아주는 직원도 낯선 동양인들의 출현에 조금은 의아한 표정이기는 했지만, 등록에 필요한 서류를 주섬주섬 챙겨주었다. 내가 1년에 내고 있는 세금, 우리 가족수, 전기나 물세를 내고 있는 현 주소지,,, 등등, 등록에 필요한 지원서 서 너 장을 건네받고, 증빙 서류와 함께 다음날 다시 오겠다고 하고는 접수실을 나오려고 하는 순간! 갑자기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근데, 저도 지원해도 되나요?'라고 접수받는 여성을 향해 툭 던져 봤다.
여성은 '네, 물론 가능합니다만, 프로그램이 우선적으로 어린이, 학생들 그리고 전부터 계속 수업을 받던 사람들에게 먼저 기회를 주고, 그리고도 자리가 남을 경우에 성인에 돌아간다'는 것이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사항들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일단은 저도 한 번 등록을 해보겠습니다'라고 하고 신청서를 받아 집으로 왔다.
분에 넘치는 운이었는지 뜬금없는 신청한 첼로 수업은 접수가 되었고, 낮은음 자리표의 '도'가 어디인지 악보도 볼 수 없었던 나의 첼로 도전기는 시작이 되었다. 이때 내 나이 지천명이 가시거리 안에 들어왔었을 때였다.
악기라고 만 저본 경험이라고는 국민학교 다닐 때 칼싸움 용으로 사용했던 피리 하고, 음악시간이 되면 다른 교실에 있던 풍금을 가져오면서 손으로 밀어봤던 일이 전부였다.
뻔한 이야기이지만, 첼로 수업이 진행되려면 첼로가 있어야 하는데, 처음부터 구입하기에는 부담이 됐다. 금액적으로 부담이 된 것도 있지만, 딸과 내가 얼마나 수업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을까 하는 자신감의 결여 때문이었다. 1년 헬스클럽 회원권이야 사놓고 운동하기 싫으면 오다가다 샤워라도 할 수 있지만, 의욕만 갖고 첼로를 사서 중간에 그만둔다면, 멀건히 세워져 있는 첼로를 볼 때마다 돌아가신 분의 유품쳐다 보 듯 슬픔이 밀려올게 뻔했다. 이런 이유로 한동안은 빌려서 사용하기로 했다.
내가 첼로를 배우기 시작한 이후로, 이 세상에서 가장 극한 직업은 '첼로 선생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항구에서 생선 나르는 일이나 이삿짐 나르는 일,,, 등등의 일을 해보면 생각이 바뀔 수도 있지만, 나처럼 현악기를 처음 다루는 사람들이 내는 악기 소리는 손톱으로 칠판 긁는 소리 이상으로 듣기 싫은 소리가 난다.
그런 소리를 여과 없이 들으면서도 짜증 내는 표정 없이 꼼꼼하게 왜 그런 소리가 나는지, 어떻게 하면 고칠 수지를 가르쳐주는 첼로 선생님이야말로 극한 직업의 하나임에 분명하다.
왼손가락은 위로 아래로 움직이고, 활을 잡은 오른손은 좌우로 이동을 하고 두 눈동자는 길고 짧은 음표를 쫓아가며 정신없다. 첼로를 배우기 전까지는 첼로가 전신운동과 치매 예방이 될 줄은 몰랐다. 첼로뿐만 아니라 모든 악기가 그럴 것이라고 생각된다.
내가 첼로를 시작한 시기는 절대로 이른 나이가 아닌 것은 확실하다. 늦었을 수 있지만, 너무 늦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급할 이유도 없다. 단지, 곧은 방향으로 천천히 오래가고 싶을 뿐이다.
매주 토요일 오후, 첼로를 등에 매고 수업을 받으러 가는 내 모습이 차 창문에 찍힐 때마다 은근 뿌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