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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일영 Nov 02. 2016

잘 살고 있는 건가?

상냥한 폭력의 시대, 정이현, 문학과지성사. 20161010

믿고 보는 작가 중의 한 사람인 정이현이다. 

낭만적 사랑과 사회부터 즐거운 나의 도시, 오늘의 거짓말, 상냥한 폭력의 시대까지. 

현대 사회와 밀접하게 생활 속의 글을 쓰는 작가인 것 같다. 

그러니까 동떨어진 미지의 세계로 독자를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마치 옆에서 일어나고 있는, 있을 법한 상황 속으로 독자를 끌어들인다. 


그녀의 작품들이 쉽게 읽히는 것은 동시대의 삶이기에 그럴 것이고,

특별한 누군가가 아닌 바로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에 그럴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딸아이의 출산(아무것도 아닌 것)을 겪을 수도 있을 테고, 배다른 형제가 갑자기 나타나 살인 공모를 제안할 수도 있다 (우리 안의 천사) 분단국가에 살고 있는 우리이기에 바다 건너 어디쯤에서는 저 위 북쪽에 살고 있는 아이를 만날 수도 있고 (영영, 여름) 지나간 사랑의 부고를 신문에서 발견하지 말라는 법도 없다. (밤의 대관람차) 급매로 나온 시세보다 싼 가격의 집을 털컥 계약했다가 그 집의 문제점을 알게 되는 것도 (서랍 속의 집) 흔하게 있는 일이고, 예전에 만났던 사람을 아주 뜻밖의 곳에선 만나는 것은 (안나) 큰 사건도 아니다. 

 

바로 옆에서 있음 직한 일들을 차분하게 써 내려가는 그녀이기에 믿고 보는 작가의 한 사람이라고 꼽을 수 있다. 

작가에게, 아니 그 사람의 작품에 거부감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잘 팔릴만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실제 정이현의 작품은 드라마로 만들어지기도 했으니, 이런 그녀의 글들을 나만 좋아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근래 들어 소설을 읽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읽는다는 행위는 돈을 벌고 생활을 영위하는데 일만의 도움도 되지 않는다. 물론 기초적인 읽고 쓰는 문제가 아닌 읽기 위한 행위들, 소설, 논문, 신문기사 등등. 돈을 벌어 멀고 사는 일이 더 급한데, 소설을 읽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읽은다고 내 인생이 달라지나, 하늘에서 돈벼락이 떨어지나? 주로 내가 책을 읽는 장소가 만원 전철 안이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읽는다는 행위에 이렇게 의구심이 든 것은 오랜만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이현과 같은 작품들을 만나면 나는 또 읽는다.  

 

 그래, 이런 맛에 글을 읽는 거지.   


 하는 섣부른 위로를 날리면서 


글에서 위로받고, 나만 이렇게 허투르게 사는 건 아니구나 싶은 동질감을 느낄 수 있으니 퍽퍽한 인생살이에 조금 숨통이 트이는 것, 이런 맛에 글을 읽는 거였다. 싶은 순간이 있는 것이다. 그녀의 글은 그랬다. 아주 조금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나만 이렇지 않다는 것을, 다들 이렇게 힘들게 살고 있으니 서로를 이해하면서 삶의 방식을 알아가면서 그렇게 또 하루를 살아내면 된다는 그녀의 위로다. 



양은 여느 때처럼 출근 준비를 했다.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눈뜨자마자 머리맡의 안경을 찾아 쓰고, 세수를 하고, 간소한 화장을 하고, 간밤 끓여놓은 국에 밥을 말아 반 공기쯤 먹고, 이를 닦은 뒤, 지난 세기의 어느 날 장만한 겨울 정장 중 하나를 꺼내 입었다. 역시 지난 세기의 어느 날 학부모에게서 선물 받은 목도리를 꺼내 두르고, 입을  만한 몇 벌의 코트 중에 하나를 골라 걸쳤다. 남편이 잠든 81제곱미터 아파트의 현관문을 열고 나서면서 양은 자신의 몸이 25년의 관성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느껴다.  p139 '밤의 대관람차'


한 집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대체 어떤 의미일까. 부부의 공동 자산이 생긴다는 뜻, 2년이 지나도 더 이상 이사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뜻, 10년이 넘도록 갚아야 할 빚더미가 어깨에 짐짝처럼 얹힌다는 뜻 말고 또 다른 게 있을지도 몰랐다.  p166 '서랍 속의 집'


주민등록증 네 개와 도장 네 개가 조르르 놓였다. 직원이 새로 매매가와 매수인, 매도인의 이름이 프린트된 새 계약서를 뽑아 왔다. 진의 이름은 유원의 이름 아래 적혀 있었다. 이제 헤어지기라도하려면 한층 복잡해지겠다고, 진은 별안간 생각했다. 집을 산다는 것은 한 겹 더 질긴 끈으로 삶과 엮인다는 뜻이었다. 부동산은, 신이든 정부든 절대 권력이 인간을 길들이기 위해 고안해낸 효과적인 장치가 분명했다. 돌이킬 수 없는 트랙에 들어서버렸다고 진은 실감했다. 결혼식장에 들어설 때보다 훨씬 더 선명했다.  p184 '서랍 속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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