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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궁금한 양파씨 Apr 19. 2019

연봉 10% 깎고 정규직 시켜준다네요

고맙다고 절 해야하는 타이밍일까요?




미국 동부의 한 스타벅스에 앉아서


스타벅스에 앉아서 옆에 대학생 같은 애들이 떠드는 걸 흘깃흘깃 자꾸만 보게 되었다. 그래서 젊은 게 예쁜 거라고 어른들이 그랬었나. 짧은 민소매 원피스에 커다란 검정 책가방을 짊어지고 이번에 무슨 수업을 듣는지 어떤 교수님이 있는지 친구들과 재잘재잘 얘기하는데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보였다. 다른 여자아이는 방학 때 한 인턴쉽을 자랑하듯 이야기하며 앞으로 어떡하면 이쪽 분야에서 취업을 할 수 있을지 고민을 털어놨다. 저 아이들은 앞으로 다가올 미래가 너무 신나고 기대되어 보였다. 학교라를 울타리를 벗어나 경험할 사회를 한 껏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여기 이렇게 또 직장을 그만두고 카페에 앉아서 멍 하고 있었다. 저 아이들이 그렇게 고대하고 기다리는 사회라는 곳에 발을 잔뜩 데어서는. 아침에 일어나서 직장에 나간다는 것은 그 자체 만으로 엄청난 노동이었는데, 막상 갈 곳이 없으니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분명 회사는 내가 그만뒀는데 그냥 이미 버림받아져 있었던 느낌이었다. 마치 헤어지자는 말을 할 자신이 없어서 나쁜 남자가 되기 싫어서 상대 방이 이별을 먼저 말할 때까지 일부러 못되게 구는 남자처럼 말이다. 아! 지금 생각해보니 이건 정말 나쁜 이별 방법인 거였다. 사람의 자존심을 있는 대로 깎아내리게 하는.


재잘재잘하던 아이들은 수업을 들으러 사라졌고 카페에는 과제를 하는 아이들만 혼자 남아 조용해졌다. 끝나가는 점심시간의 마지막 십오 분이라도 회사 길 건너편에 있던 그 탈출구 - 스타벅스에 가고 싶었다. 거기서 비싼 돈 주고 마시는 아이스 카페라테를 홀짝 들이마시면 속이 시원해지며 조금이라도 위로할 수 있었다. 동료들과 회사 들어가기 싫어~ 싫다~ 꾸물꾸물거리면서 조금이라도 늦장을 부리며 스타벅스 안에서 창 밖으로 보이던 회사를 올려다보았다. 그 자리에 종종 앉아 회사 건물을 바라보며 도대체 왜 주말에는 저렇게 불이 켜져 있는지 이 밤늦게는 불이 켜져 있는지 생각했다. 하지만 여기 이 스타벅스 안에서 마주 보는 건너편에 회사는 이제 없었고. 그 자리에 카네기 박물관과 미술관이 있었다. 





회사 앞 그 스타벅스에서 보던 풍경


새로고침새로고침새로고침 출국하기 바로 직전 면접을 보았던 곳에서는 아직 연락이 없었다. 


그래. 회사 앞에 스타벅스에 앉아있으면 20층 짜리 건물에 주말 밤에도 불이 훤한걸 볼 수 있다. 주말 밤늦게 왜 그리 불이 켜져 있나 들여다 보면 사실 정작 일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저녁 먹으러 나갔다 술 한잔이 아니라 아주 거하게 하고 새빨개진 얼굴로 소주 냄새를 전후방 1km에 풀풀 풍기면서 밤 11시, 12시에 다시 사무실에 들어왔다가 짐만 챙겨서 나가는 사람도 있었다(꽤 많다). 건물 한 층 전체에 불이 다 켜져 있어도 정작 일하고 있는 사람은 혼자 덜렁 있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어떤 날은 이게 낮인지 밤인지 구분이 안될 정도로 마치 아침 9시와 똑같이 사람들이 앉아서 일하고 있는 저녁 9시를 볼 때도 있었다. 주말 아침 일찍 나와서 가방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종일 주변에 카페에서 지인들과 수다로 채우고선 저녁에 돌아와서 수당을 챙기기도 했다.


절레절레. 그래 역시 나오길 잘했지 위로하기로 했다. 아니 가만히 내버려두었으면 내가 알아서 이 지긋지긋한 직장 때려치우고 나왔을 텐데 괜히 나를 자른다고 한 덕에 기분만 더러워졌다. 그래 몇 개월 전부터인가 나를 자를 계획인 것(정확히는 계약 연장을 안 해줄 거란 것)을 사무실 사람들 다 알고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아무도 말을 해주지 않았다. 어쩌다 커피라도 같이 마시다 보면 "그냥 어서 남자 친구랑 결혼해~" 이런 소리를 했다. 미리 알려줬으면 아예 (기분은 더럽지만) 다른 데라도 알아보기 시작했을 텐데 바보처럼 상사 눈치도 볼 필요 없고 말이다. 그러다 계약이 끝나기 한두 달 전쯤 내 상사도 아닌 전혀 상관없는 사람에게서 이야기를 들었고 그냥 뒤통수를 한 대 세게 맞은 느낌이었다.


그래 뭐 이건 이거고 계속 먹고살아야지 정신을 추스르고 다른 곳에 지원서를 넣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계속 상사는 모른 척 시치미를 뗐다. 나중에서야 내가 다른 곳에 지원하고 있는 걸 알게 된 그는 나에게 왜 말을 안했냐고 따져 묻는다. 잉?? 내가 잘릴 거란 것도 얘기를 안 해줬잖아요?? 근데 내가 다른데 지원하는 건 먼저 보고를 했어야 하는 사항인가요??? 이기적이고 자기 생각만 하는 사람들 옆에 있기 질렸다. 나도 언제가 저런 사람이 될까봐 무섭다. 그 사람의 사고방식을 이해하려고 노력도 하고 싶지 않았다. 자기는 그렇게 나쁜 사람이 되기 싫었다나. 끝내자는 말을 못 하고 내가 그만 둘 다 할 때까지 기다렸던 상사는 막상 상황이 닥치자 갑자기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재계약하자고. 정규직 해줄 테니 연봉 10%만 깎자고.


예?


그래도 정규직 되면 수당이 생겨서 받는 건 지금이랑 거의 똑같을 거야.


녜??


너는 원래 여기에서 이 정도 연봉받을 경력도 안되잖아. 그러니까 깎아야지 10%


녜????


너무 많이 받는다면서 채용 몇 개월 만에 연봉을 10% 깎더니 정규직을 해주며 또 10%를 깎겠다는 어처구니 없는. 그러면서도 당당하게 이렇게 해주는 곳이 어디냐는 투로 나오다니 이건 제대로 멱살을 잠을 감이다. 매년 물가 상승률에 맞춰서 올려주지는 못할 망정 2년 사이에 이렇게 연봉을 두 번이나 깎는 직장이 어쩜 미안하지도 않을 수가 있지? 나의 자존심을 바닥까지 스크레치를 내고는 떳떳했고 합리적인 제안을 얼른 받으라며 되려 야단이다. 이 와중에 정규직이 된다니 일말이라도 흔들렸던 나 자신에게 귀싸대기를 쳐올리고 싶었다. 화가 났다. 새빨갛게 화가 났다. 부모님도 정규직을 시켜준다니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고 나를 말렸다. 그게 뭐라고. 그 정규직이란 게 대체 뭐라고 인간을 이렇게 까지 잘근잘근 비참하게 만든단 말인가.


재계약을 안할거라고 선언했다. 10% 연봉 삭감따위 싫고 그걸 핑계로 정규직 운운하는 이 직장이 싫다.


이에 대한 상사의 반응은 더 재미있었다.


너 처럼 어렵지 않은 집에서 살아서 그렇게 막 그만둘 수 있는거야~





분을 삭이지를 못하고 백화점을 지나가다가 디스플레이되어있는 명품가방이 눈에 띄었다. 흠......? 왠지 서른 평생 한 번도 사본적 없는 명품 가방 한 번 장만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이제까지 내가 안 해본 미친 짓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 월급에 목메어 하루살이처럼 사는 나를 보며 느꼈던 답답함. 어쩌면 명품이라는 구매를 통해의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상승시켜 보고자 하는 어쩌면 보통 사람들의 욕구-를 나도 느꼈던 것인지도. 그래. 어떤 사람들은 할부로 일단 긁어놓고 그거 갚으려고 직장 안 그만두고 더 열심히 다닌다며. 마음을 굳게 먹고 평생 명품 매장에 발 한 번 들여본 적이 없었던 내가 굳이 굳이 줄까지 서서 들어갔다. 슬리퍼에 운동복 차림이었지만 내 목표는 분명했다. 뭐라도 사는 거. 미친 짓을 해보는 거. 맘에 드는 가방을 딱 하나 골라서 들어보고 거울로 들여다봤다. 


일시불로 해주세요. 


콩닥콩닥 콩닥콩닥 심장이 미친 듯이 벌렁거렸다. 내가 진짜 이 미친 짓을 하고 있다. 이제 곧 백수 될 거니까 할부는 못하고 일시불로 긁었다. 매장 직원은 막상 내가 산 가방의 다섯 배는 되어 보이는 커다란 선물 상자에 예쁜 리본을 묶은 쇼핑백을 내게 건네주었다. 살면서 이렇게 비싼 것을 사본 적이 그야말로 처음이었다. 게다가 이렇게 충동적으로 말이다. 소비라는 것이 이 정도로 사람의 중추신경에 자극을 주는 행위던가? 심장이 뛰고 머릿속의 피가 팽 도는 느낌이었다. 한 동안 자존심을 지키는 퇴사와 자존심을 버린 정규직 사이에서 고민하며 축 가라앉아 있던 신경세포가 벌떡 일어나 소리지르고 난리치며 사자춤을 췄다. 쇼핑백을 들고 신나기 흔들면서 다시 그 스타벅스로 향했다. 커피를 한 잔 벌컥벌컥 들이키고나니 이 흥분이 카페인 때문인지 쇼핑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뭔가 정의할 수 없는 이상한 흥분과 자신감이 들었다. 그래!! 내가 그래도 일시불로 명품가방을 지를 정도로 미친데다가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라면 뭐라도 먹고 살수 있을거다. 굶어죽지는 않을거다. 아주 곱게 포장된 가방을 물끄러미 보았다. 계획에 없던 소비였지만 지금에라도 환불할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마약을 해본 적은 없지만 만약 지금 내가 느끼는 미친듯한 신나는 흥분을 느끼게 해주는게 마약이라면, 그래. 뭔가 이해가 될 것 같은 마음이었다. 


"야, 한 달치 월급으로 지하까지 파고들어간 네 자존심을 세웠는데 그 정도로 꽤 괜찮은 투자 아니야?"


그렇게 명품가방이 위로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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