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를 발견하러 떠났는데, 되려 나를 발견하고 돌아왔다.
빈곤퇴치를 위한 효율적 원조정책을 연구하는 개발학을 전공한 나에게도 아프리카는 두려운 곳이었다. 동기들은 휴학하고 에티오피아, 수단 등지에서 경력을 쌓는데, "난 아프리카에서는 못 살 사람이다"라고 단정 짓고 도전도 안 했다. 모로코, 카메룬 같은 근무지에 지원을 했다가도 자신이 없어서 면접도 안 가고 포기한 적도 있다. 그만큼 난 겁쟁이였다. 한 번은 겨우 다대다 면접에 갔더니 나를 제외하고 다른 지원자들은 모두 아프리카 근무 경력이 있었다. 스스로 빛내고 반짝여야 하는 면접 자리에서 그들이 <아프리카 실무경력 유> <불어로 업무 가능>을 내세우며 뽐내는데, 나는 긴장된 공기를 들이쉴 때마다 점점 작아져 쪼그라들기만 했다. 오죽하면 면접관이 나더러 왜 자기 자랑을 하지 않냐 물었다.
개발원조 분야를 조금 떠나서 안락함을 찾았다. 나와는 비교 불가능한 열정, 스펙, 경험으로 무장한 사람들과 경쟁하고 싶지 않았고 생존할 자신도 없었다. 개발원조 분야에서는 당연하게 느껴지는 영어, 프랑스어 같은 능력도 조금만 벗어나 다른 분야로 가도 더 인정을 해주는 분위기도 있었다. 종종 동기들과 연락할 기회가 있으면 내가 누리는 안락함이 얼마나 행복감을 주는지 떠벌렸다. 어느 정도 행복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내가 행복이라고 부르던 것은 더 이상 경쟁의 의지가 없는 스스로와의 편안한 타협물이었다.
안락함은 오래지 않아 지루해졌다. 조직이라는 틀에 맞춰 나를 변형하는 것도 정도가 있었다. 일에 대한 애정이나 열정이 없어서 더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존엄성을 짓밟고 개인을 존중하지 않는 한국 직장과 사회가 너무 아파서 마음이 멍들었다. 두 번째 치질 수술을 했고, 원인을 알 수 없는 어지러움증과 만성피로도 계속됐다. 맞지 않는 테트리스 조각을 억지로 끼워놓기 하면서 괜찮다고 스스로를 세뇌했다. 안락함에 의지해 그런 고통도 감내했지만 재미있게도 회사가 날 먼저 해고하려 했다는 걸 우연히 알게 되었다. 더 이상은 터질 종기를 누르고 있을 수 없었다.
그렇게 안락함을 떠나 코트디부아르로 향한 것은 재미있게도 자의보단 반 타의에 가까웠다. 그런 마음으로 왔으니 초반에 정착하기가 힘들었던지, 처음 며칠 눈물 꽤나 쏟았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국에서 쫓겨나듯 떠나 코트디부아르로 간 것은 천운이었던 것 같다. 함께 아비장에서 지낸 한국 동료들은 아프리카를 “군대 이야기”라고 표현한다. 군대 얘기가 여자에게 노잼이듯이, 아프리카 얘기가 한국사람들에게 노잼이란 뜻이다. 대신 우리끼리는 어찌나 재미진지 수다가 주야장천 계속된다. 그만큼 코트디부아르가 남긴 것이 많다는 뜻일 거다.
그렇게 반 타의로 떠난 아프리카이지만, 안락함을 떠났기에 성장할 수 있었다. 감사하게도 이루 말로 표현하기 힘든 많은 경험과 교훈을 코트디부아르에서 얻었다. 앞으로 살아갈 인생에서 잊지 않기 위해, 그리고 많은 사람들과 나누기 위해 소중한 순간들을 이렇게 글로 남겨 본다.
코트디부아르에서는 안녕한지 물을 때 "밤에 잘 잤어요?"라고 묻는다. "봉주르!", "메르씨!" 같은 인사도 습관적으로 건넨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더 "안녕하세요", "고맙습니다"하는 말들을 자동적으로 하게 되었다. 강남 한복판에서 전단지를 나눠주는 아주머니에게 나도 모르게 "감사합니다" 했더니, 아주머니는 바로 "인사하는 거 보니 외국에서 살다 왔구나?" 되묻는 거였다.
아비장에서는 모든 이웃과 행인이 친구가 되었다. 항상 신기한 과일이나 야채를 덤으로 챙겨주던 골목가게 할머니가 있었다. 퇴근길에는 헬스장 앞을 지나는데 헬스장 직원들, 트레이너들이 "내일은 꼭 운동해!" 잔소리를 해댔다. 애정이 없다면 듣지도 않을 잔소리였다. 일주일에 두세 번씩은 꾸준히 운동을 해서 제법 체력이 좋아졌다. 헬스장 옥상에서 스피닝을 하면서 주변 풍경을 내려다보면 어찌나 상쾌한 기분인지. 운동이 끝나고 집에 와서 맥주 한잔을 겸해 저녁을 들어도 8시밖에 되지 않았다. 난생처음 저녁이 있는 삶을 누렸다. 창 밖에는 주홍 노을을 배경 삼아 한가로운 야자나무가 흔들거렸다.
바다모래라면 질색을 해서 바다는 구경만 하곤 했었는데, 코트디부아르에서 처음으로 서핑도 배웠다. 아직 초짜지만 처음으로 모래사장과 파도를 즐기는 법을 배운 것 같았다. 코코넛이 얼마나 맛난지도 알게 되었다. 특히 해변에서 자라는 야자수는 염분이 있는 물을 먹고 자라 코코넛이 더 달단다. 손님에게 코코넛을 대접하는 사람들의 친절함도 함께 마시니 그렇게 맛날 수가 없다. 삶의 많은 기쁨은 그저 바라보는 것보다 직접 경험하면서 커졌다. 별 것 아닌 작은 것 속에도 다 행복과 기쁨이 있었다.
하루는 일하는 와중에 청소일을 하는 직원이 상기된 얼굴로 내 사무실에 부리나케 달려들어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 물어보니 첫째 아들이 반에서 1등을 했다고 한다. 공부 잘하는 자식 자랑하고 싶은 건 역시 만국 공통인 모양이다. 청소일을 하는 여자들은 대부분 글을 읽을 줄 모른다. 아직도 코트디부아르 여성의 30% 정도가 문맹이다. 그녀의 아버지도, 형제들도 다 글을 읽고 쓰는데, 여자라고 그녀만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가 열심히 청소일을 해서 교육을 시킨 아들은 배우고, 더 성장해서 언젠가 더 나은 삶을 살게 될 거였다.
아비장에는 새로운 건물을 얼마나 빨리 짓는지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건물이나 도로가 생겨 있다. 우리 디렉터는 마치 “팝콘 튀기듯” 건물을 짓는다고 비유했다.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인부들은 토고, 부르키나파소 같은 이웃국가에서 돈을 벌러 온 사람들이 많았다. 혼혈처럼 밝고 귀염상인 택시기사를 만나면 어디 출신인지 물어봤는데 매번 기니(Ginea) 사람이라고 했다. 코트디부아르는 주변국에서 일자리를 찾으러 이민을 올 정도로 경제가 발전했다는 얘기다.
한 번은 택시기사가 어려 보여서 말을 시켜보니 대학생이라고 했다. 환경공학을 공부하고 있다고, 코트디부아르의 환경문제를 해결하고 싶다고 말이다. 이틀에 한 번씩 택시일을 하면서 학비와 생활비를 번 단다. 고등교육을 받고 일도 열심히 하는 그의 자녀들은 또 어떤 다른 삶을 살게 될까? 일상생활 속에서 느낄 수가 있었다. 코트디부아르가 하루가 다르게 발전 중이라는 걸 말이다. 외국인인 나에게는 이 변화가 생생하게 체감되었다.
하루는 체육관에서 운동을 마치고 친구와 젤라토를 안주 삼아 잡담 중이었다.
갑자기 한 행인이 우리 옆에 다가와 성토를 시작했다. 아내가 쌍둥이를 낳아서 젖병을 사러 약국에 왔는데, 약사가 젖병을 돌려쓰는 게 아니라며 두 개를 사야 한다 했단다. 돈이 하나 살 돈뿐이라 한 개 밖에 못 샀다며 젖병을 보여줬다. 나라면 이 사람이 하는 말이 진짜 일까부터 따지려 했을 텐데, 친구는 고민도 하지 않고 그에게 돈을 먼저 건넸다. 오랜 시간 아비장에 살면서 나눔을 습관처럼 실천해온 그녀의 따뜻한 마음씨가 느껴졌다. 그녀의 가족들 모두 멋진 롤모델인데, 크리스마스에 학용품을 기부하거나, 옥살이 중인 여성 수감자들에게 비누 따위를 후원해주는 기부를 항상 하고 있었다.
의심으로만으로만 가득하다면 아무리 돈이 많아도 누굴 도울 수 있을까. 부자는 아니지만 나도 더 나눌 만큼 충분히 여유 있는 사람이었다.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고민해보면 너무 속지 않고 살려고 아등바등 애쓰기보다, 어려운 이들에게 기꺼이 너그럽게 내어줄 수 있는 친절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내가 스스로 만 원을 지출해 생기는 효용보다, 다른 이에게 그 가치가 훨씬 크다면 내어주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코트디부아르에서의 2년 후, 햇볕에 그을린 살갗 만큼이나 난 강해져 있었다. 비타민 D를 많이 생성해서 일수도, 말라리아에서 회복했더니 면역력이 강해져서 일수도 있다. 외국인을 바가지 씌우는 상인, 택시기사들과 울그락 불그락 싸워낸 끝에 진정한 전사로 거듭났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쩌면 전 직장 상사가 날 묘사했듯 "외국에 살다와서 개인주의적인(그는 사실 이기적이라고 말하고 싶었겠지만)" 사람이 된 걸 수도 있겠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한국에서는 만성적으로 앓던 변비도, 어지럼증도 아비장에서는 한 번도 날 괴롭히질 못했다.
전 직장에서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면 떠날 용기도 내지 못했을 거다. 매일같이 말로만 아프리카 가고 싶다 노래 부르며 꿈은 꿈대로 건드리지 않은 채 살았겠지. 그렇게 구석에 몰린 상황이 아니었다면 난 계속해서 안락한 편안함을 행복으로 믿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겁 많은 사람이다. 걱정도 많고 자신감도 부족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용기를 낼 수 있었고 도전도 할 수 있었다. 겁이 많지 않다면 용기를 낼 필요도, 도전할 필요도 없을 테니까.
"죽고 나면 지인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그땐 잘 몰랐는데, 지금은 알 것 같다.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인생을 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으로 삶고 싶다. 나는 어려움 속에서 희망을 보는 사람, 더 친절한 사람, 어려운 이들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이 되고 싶다. 코트디부아르를 통해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어떤 인생을 살고 싶은지 알게 되었다. 나를 좀 더 잘 알게 되었기 때문에 강해진 걸 지도 모른다. 인생의 나침판 같은 것을 갖게 되어서 말이다.
아비장 생활을 마치고 귀국하게 되자 우리 가정부 친구는 졸지에 일자리를 잃게 되었다. 그녀의 가정사를 잘 알다 보니 그렇게 눈에 밟힐 수가 없었다. 타지에 돈 벌러 간 남편은 바람이 났는지 몇 개월째 연락이 안 되어 혼자 힘으로 세 아이를 키우는 그녀였다. 일자리를 소개해주고 싶었지만, 코로나 때문에 대부분의 외국인들이 아비장을 떠난 상황이었다. 대신 그녀의 꿈인 작은 미용실을 차리기를 돕기로 했다. 귀국 전에 남은 현지 돈으로 그녀의 꿈을 지원했다. 사업 경험이 많은 현지인 친구에게 부탁해 그녀의 사업에 서슴없는 조언도 부탁했다. 누군가에게 꿈을 선물한 건 난생처음이었다. 비싼 명품가방을 산 것보다 더 행복했다.
아프리카를 발견하러 떠났는데, 되려 나를 발견하고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