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궁금한 양파씨 Nov 01. 2020

가난한 이를 돕는 좋은 방법

나눔을 하고도 기쁘지 않았던 이유


왜 나누고도 기쁘지가 않을까?


어느 한가로운 주말. 혼자 집 앞 버거킹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주말에 한 번씩 이런 서양식 자본주의의 맛을 봐줘야 또 한 주를 버틸 기운이 나는 법! 테이블이 거의 비어 있는데 한 9살 정도 된 현지인 꼬맹이가 내 옆자리에 슬그머니 와서 앉더니, 나를 대놓고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 신호다. 


이럴 땐 눈을 마주치면 망한다. 애써 레이저 눈빛을 피해 가며 햄버거를 앙 물었다. 견뎌 보자. 이런 타지에서 혼자 살다 보면 상당한 무시하기 기술은 필수다.


종종 걸인들에게 오백 세파(천 원)씩 돈을 주곤 하지만, 특히나 동냥하는 꼬맹이들에게 돈을 주는 건 불편한 마음이 든다. 돈을 주기 싫어 서가 아니다. 어려 서부터 동냥질로만 살아남는다면 그 아이의 미래가 지금보다 나을 것 같지 않아 서다. 몇 번인가 꼬맹이들에게 동전 몇 푼 쥐어 주고 학교에는 왜 안 가니 설교를 한 적도 있었다. 길거리에서 과일을 파는 꼬마 아낙들에게도 왜 학교를 안 가니 물었었다. 녀석들은 듣는 체도 하지 않았지만. 코트디부아르의 초등학교 취학률은 2019년 기준 통계상 100.3%에 달한다. 현실과의 괴리는 꽤나 크다.


차도에선 어린이들이 기습적으로 차 앞유리를 닦아주고 팁을 받아가는 사업이 성행 중이다.


"이모, 돈 주세요~ 먹을 게 없어요"


이럴 때 나는 자주 이 동네 걸인들의 이모, 엄마, 아빠가 된다. 슬쩍 흘겨보다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그래도 꼬맹이는 꽤나 괜찮아 보이는 전통의상을 입고 있었다. 하긴 진짜 걸인같이 입어서는 보안요원에 저지당해서 쇼핑몰에 들어오지도 못했을 테다. 고양이 같은 애절한 부름에 무시로 일관하기는 이미 늦어버렸고, 일말의 양심도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어쩔 수 없이 지갑에서 주섬주섬 이천 세파(4천 원)를 꺼내 그녀에게 건네고 다시 자본주의 흡입하기에 집중하려 했다. 그런데 그녀는 고맙다는 말 한마디가 없다. 별로 고마워하는 기색은 아니다.  이건 두 번째 신호다. 여기 걸리면 다시 망한다.


"전 엄마 아빠도 없고요. 고모랑 같이 사는데, 집 값을 낼 돈이 없어요. 그래서 돈을 벌어야 해요."


갑자기 화가 불끈 솟아올랐다. 이천 세파는 작은 돈이 아니다. 특히 현지인들에게는 더 그렇다. 성의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이 더 돈을 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한다. 마치 내게 돈을 맡겨 놓은 냥 말이다. 사무실에서도 내가 마치 은행인 냥 수시로 돈을 빌려가는 이들이 여럿이다(물론 내가 딱히 돌려받을 의지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버거킹에 들어와 꼬맹이가 내 옆에 와서 앉은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외국인인 내가 쉽게 돈을 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 치 쑥스러움도 없이 다가오는 걸 보면 한 두 번이 아니라 그녀, 꽤나 전문가다. 


"돈을 버는 건 네 역할도 책임도 아니야. 

그만하고 집에 돌아가." 


단호하게 집에 돌아가라고 했다. 이번엔 전문가도 낌새를 챘는지 미끄러지듯 자리에서 일어나 사라졌다. 분명 좋은 일은 하고자 했는데, 하나도 기쁘지가 않았다. 되려 내 기분은 엉망이었다.






좋은 기부와 좋은 원조


누군가를 도와준다는 건 정말이지 쉬운 일이 아니다. 생각보다 썩 기분 좋아지는 일도 아닌 경우가 많다. 좋은 의도로 기부를 했는데 돈을 더 요구하는 것은 아주 흔히 있는 일이었다. 대게는 외국인은 돈이 많으니 좀 기부하는 건 당연한 거라고 여겼고, 심지어 모르는 사람도 내 신발이나 가방 따위를 선물로 달라고 당차게 요구했다. 그냥 웃어 넘기기에는 너무나 끈질기게. 알리슨은 모르는 이들에게 적선하는데 천 원 이상은 쓰지 말라고 조언해줬다. 내가 너무 큰 금액을 한 번에 줘서 더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 모양이라고 말이다.


난 그냥 돈을 뿌리듯 주고 싶진 않았다. 받는 이에게 더 장기적으로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나눔을 하고 싶다. 개발원조 분야에서도 어떻게 원조가 개도국을 효율적으로 개발할 수 있는지 끊임없이 연구한다. 자연스럽게 나 개인이 하는 기부도 효율성만을 생각하게 되었다. 가난한 이가 제 힘으로 설 수 있도록 돕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질 좋은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이다. 일자리를 통해 예측 가능한 수입을 지속적으로, 장기간 발생시켜 개인의 힘으로 삶의 질을 개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부도 이런 효과가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물론 이렇게 된다면 최상의 시나리오다.






도우며 바라지 않는 마음


한국에서는 어린이재단에 매달 소액을 기부했는데, 아비장에 온 이후로 내가 직접 주변에 어려운 이들을 돕기로 했다. 재단에 기부를 했던 일도 내가 혜택을 바라서는 아니었고, 주변의 이들을 돕고자 한 것도 뭘 바란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뭘 바라며 기부를 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왜 기부를 하고도 기쁘지 않았을까? 며칠을 골똘히 고민해서 하나 깨달은 것이 있다. 원조정책은 차가운 머리가 하는 것이라면, 기부는 따뜻한 마음이 하는 일이라는 걸. 걸인에게 나눈 돈을 어떻게 쓰던 그건 그의 몫이다. 이미 내 손을 떠났기에 이러쿵저러쿵 내가 제어할 수 없는 일이다. 내 욕심에는 그 꼬맹이가 학용품이나 식료품을 사는데 돈을 쓰길 바라지만, 사실 불투명한 삶을 사는 그녀에게는 다른 무언가에 지출을 하는 것이 더 큰 행복일지 모르는 일이다. 어떤 쪽의 효용이 더 큰지 그녀를 제대로 모르는 내가 선택하고 기대할 수 없다. 이런 내 마음도 사실 욕심이다. 기부하며 사욕을 부리는 것이다.


나의 적선에 고맙다 말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다. 고맙다는 말을 듣지도 못하고 더 요구를 하니 나도 사람이기에 화가 났다. 왜 고마워하지 않는 거지? 열을 낸다. 하지만 결국 그녀가 고맙다는 말을 하길 기대하는 내 마음도 나만 생각한 결과였다. 알고 보면 나의 선행을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더 중요하게 여긴 거였다. 사실 고맙다는 말을 들으려 나눔을 하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나눔은 상대에게서 기대하는 마음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이다. 나의 마음을 한 번 더 들여다본다. 그저 나의 도움으로 그녀의 삶이 아주 잠시라도 편안해지기를 바라는 마음 하나, 그거다. 결국 가난한 이를 돕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도우며 상대에게서 대가를 바라지 않는 것, 그것 아닐까?





이전 12화 스타벅스 이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