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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궁금한 양파씨 Aug 13. 2020

스타벅스 이론

스타벅스가 없는 나라에서는 절대 살 수가 없다?

요하네스버그의 스타벅스 (출처: Quartz Africa)


아프리카와 스타벅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 스타벅스가 들어온 나라가 딱 하나 있다. 바로 아프리카 대륙의 최남단, 남아프리카 공화국이다. 2016년 남아공에 진출한 스타벅스는 아프리카 진출을 위한 테스트베드인데, 로컬 브랜드에 밀려서 진땀 빼는 중이다. 북아프리카에는 모로코와 이집트에 들어와 있다. 사실 사하라 이남에선 에티오피아 정도를 제외하고는 딱히 커피를 마시는 문화도 없다. 아프리카에서 생산되는 카카오와 커피는 모두 유럽에 판매하기 위한 기호식품이지 자체 소비할 상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스타벅스 확장은 쉬운 도전은 아니다.

 

“개발학 전공+불어 가능자”의 콤보는 보통 아프리카에 뼈를 묻기 마련이다. 개발학의 종착지가 아프리카며, 불어의 종착지도 아프리카니 아주 그러하다. 나도 항상 마음속에 아프리카를 품고 있었다. 언젠가는 현지에 가서 뭔지 모르겠지만! 가난한 이들에게 아주 도움이 되는 일을 하겠다! 는 어리숙한 생각뿐이었다. 모로코에서 인턴을 할 기회도 있었고, 몇 번인가 떠나려 시도했던 적이 있었다. 결국 매번 포기했지만. 우습지만 이게 아프리카로 떠나기를 주저했던 가장 큰 이유다. 스타벅스가 없어서.

 

개발학을 공부하다 보면 개인의 욕망보다는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자 일하는 동료들을 많이 만난다. 같은 대학원 아프리카 학회에서 만난 그녀는 험지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것 만으로도 너무 행복할 것 같다고. 기독교인인 언니는 말라위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눈도 안 보이는 부르카를 쓰고 경호원의 부축을 받아 화장실을 가는 여성을 보며 종교적 다양성과 선택권을 줌으로써 아프리카가 더 나은 기회와 개발을 이룰 수 있도록 돕고 싶다고 했다.

 

함께 취업스터디를 같이 했던 다른 친구는 (물론 공부보단 치킨과 맥주, 연애 얘기를 함께 더 자주 뜯었지만) 과거 남수단에서 봉사했던 경험을 회상하며, 일주일 동안 물이 안 나와 샤워도 못했지만 예쁜 아이들과 함께하고 가르치는 것만으로도 그저 행복했다고 말했다. 그녀의 아버지도 평생 NGO에서 이웃을 돕는 일을 한 분이라고 했다. 얼마질 않아 국내 NGO에 취업한 그녀는 다시 남수단으로 파견되어 3년을 근무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을 찾아보면 남을 돕는 일에 뜻이 있다는 거다. 단순히 국제기구에 일하고 싶어서, 돈을 벌고 싶어서 같은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한 이유가 아니라 진심으로 어려운 사람을 돕는 데서 삶의 행복을 찾는 거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 그런 사람일까? 질문하고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나는 개인의 커리어가, 연봉이, 안락함이 중요한 이기적인 사람이다. 아무래도 전공을 잘못 선택한 게 틀림없었다. 이 길을 계속 가는 게 맞는 걸까?

 


스타벅스 이론

"스타벅스가 있어야 살만한 근무지다" 믿는 나의 "스타벅스 이론"이 탄생한 이유는 단순히 카페를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유럽에서 외로울 때마다 마시던 스타벅스 커피가 큰 위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금융위기가 한창이라 참 어려웠던 2009년 스위스에선 한 달에 한두 번 가는 게 다였지만, 촉촉한 초콜릿 케이크와 카페라테가 얼마나 위안이 되던지. 스타벅스는 그냥 카페가 아니라 익숙함이었다. 우리 집에 온 것 같은.

개발분야에서의 스타벅스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맥도날드가 들어올 정도로 서구화되고 중산층이 두터운 나라에서는 전쟁이 더 이상 일어나기 힘들다는 "골든아치이론" 처럼, 스타벅스가 들어올 정도로 나라가 서구화되었다는 것은 그 만큼 개방적이고 상당히 높은 개발 단계에 접어 들었다는 뜻이다. 곧, 그만큼 우리의 생활환경과 비슷하다는 거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나는 깜냥이 안 되는 것이 분명하다. 다들 현장에서 경력을 수년씩 쌓을 때, 나이 서른이 되도록 고민만 하며 세월만 보냈다. 걱정 많은 내가 코트디부아르에 오기까지는 스타벅스가 없는 곳에서 살아남을 용기가 필요했다. 유엔에서 일하는 것을 유엔의 하늘색 깃발에 빗대어 자랑스럽게 “푸른 깃발을 섬긴다 (serve for the blue flag)”고 말한다. 막상 코트디부아르에서 2년을 지내고 내린 결론은 단순하다. 개발 NGO, 유엔도 사람이 일하는 곳이다. 결국 모두들 월급을 받아 하루하루 살아가는 직장인들이다. 우리 모두 스타벅스가 아니라면 다른 무언가로 위로를 받으며 살아간다. 

 

카메룬인인 우리 디렉터는 아주 뼛속까지 유엔인 사람이지만, 동시에 사무실의 패션리더이기도 하다. 일 년에 같은 옷을 두 번 입는 일은 거의 없을 정도다. 그녀의 드레스룸에는 아직 옷이 되지 못한 옷감들도 수북이 쌓여 있다. 그녀의 재단사에 대한 정보는 절대 다른 사람과는 공유할 수 없는 (해선 안 되는) 1급 비밀이다. 복도에서 마주치는 직원들의 패션센스에 대해서도 종종 칭찬하거나 조언을 서슴지 않는다. 다른 프랑스인 컨설턴트 친구는 내가 아는 누구보다도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는 너그러운 사람이지만, 좋은 요리를 먹고 비싼 휴가지로 떠나는 것에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 매주 두세 번씩 레스토랑이며 바에서 식사하고 와인을 마시는데 수십만 원씩 쓰고, 여름이면 이탈리아의 고급 휴양지로 떠나 해수욕과 서핑을 즐긴다. 

 



포기를 포기한다

결국 "스타벅스 이론"은 험지냐 아니냐를 구분할 기준이 아니라, 사실 내가 꼴좋게 세워놨던 스스로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허들에 불과했다. 용기를 내지 않아도 될 핑계가 되었고, 내 선택을 정당화하는 변명이 되었다. 사실 코트디부아르에 스타벅스는 없지만 나를 위로해줄 많은 즐거움들이 가득했다. 작게는 발코니에서 매일 보이는 흔들리는 야자수 나무부터, 아씨니의 아름다운 석호를 보며 즐기는 와인과 랍스터까지 말이다.


대의, 공공의 선, 평화와 발전을 위해 일하지만 일이 곧 내 삶은 아니다. 어려운 사람을 위해 일한다고 해서 어려운 사람과 똑같이 살 수는 없다. 내가 기후변화 대응 분야에서 일한다고 해서 전기 없이 살거나, 비행기 안 타고 육로 여행만 할 수는 없다. 소고기를 끊는 것도 노력 중이지만 아직은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대의의 정당성이 훼손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삶을 영위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일은 일이고, 삶은 삶이다. 그 사이에 어느 정도의 구분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모두 가난에 하향 평준화된 삶 밖에 살 수 없지 않을까?

 

내 맘 속에 스타벅스 이론은 아직 꽤나 유효하다. 아비장에서 일하면서도 나는 스타벅스 BGM을 틀어 놓고, 마트에서 산 스타벅스 커피를 혼자 내려 마신다. 항상 “스타벅스 가고 싶다” 말을 입에 달고 산다. 파리에 휴가를 다녀오는 길이면 항상 오르세 공항에서 마지막 스타벅스 커피를 한잔 마시며 여독을 풀어야 한다. 하지만 앞으로의 여정에서는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되묻고자 한다. 또 다른 스타벅스 이론이 나의 가능성을 제한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래서 도전을 꺼리고 있지는 않은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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