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부의 마지막, 그리고 고구마

by 오슬

내가 결혼 전 아내의 집에 처음 인사를 갔을 때, 장인어른과 한 10여분 정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짧은 시간에 장인어른은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를 언급했었다. 그땐 장인어른이 설익은 지식을 들먹이며 허세나 부리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것은 내가 유토피아를 읽어 봤고 거기에 담긴 철학적 사상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알게 된 건 장인어른은 상식 바깥에서 움직이는 무식해 보일 만큼 기이한 천재라는 것이다. 이렇게 오래된 세대를 살아간 사람 중에 나보다 특이하고 이상한 사람은 처음이었다. 이 이야기는 장인어른과 처갓집에서 장기를 두었을 때 있었던 일이다. 당시 나는 장인어른의 특이한 천재성을 아직까지 인정하고 싶지 않을 때였고, 즉, 아직 이 양반은 나보다 뛰어나다는 깨달음이 없었을 때라 어떡해서든 이 장기 한판을 이기고야 말겠다는 기합과 결의에 차 있던 때였다. 그럼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아, 그리고 이건 고구마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방 안은 조용했다.

장기판 위, 말들이 제자리에서 흔들리며 잠잠했다.

장인어른은 조용히 손을 내밀어 말을 놓았다.

그의 손끝은 정확했다.

처음 수가 가장 중요했기에 우리는 몇 분 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의 눈빛은 나를 향하고 있다.

말 한마디 하지 않으면서도, 그는 내가 무엇을 할지 알고 있었다.

고구마를 얹어 놓은 주방의 찜기에서 미세한 소리가 들렸다.

물이 끓어가고 있다는 신호였다.

그 소리는 방 안을 가득 채우며, 장기판 위에도 스쳐 지나갔다.


내 손이 장기 기물 위에 멈춘다.

손끝이 말에 닿을 때마다, 찜기에서 나오는 증기가 조용히 올라온다


나는 잠시 손을 떼고 고개를 돌린다.

찜기 뚜껑 가장자리가 살짝 흔들린다.

말을 어떻게 놓을까 하는 망설임이 그 위에 얹힌 듯...

고구마는 점차 익어가고 있었다.

그 떨림이 느껴진다.

장인어른은 내 눈치를 채지 못했다.

내가 조용히 후방을 공격할 것이란 걸 절대 알지 못할 것이다.


내 손끝이 장기판 위에서 말에 닿을 때, 찜기에서 물방울이 튀었다.

고구마의 껍질이 조금씩 부풀어 오른다.

내가 이 승부를 얼마나 이기고 싶어 하는지 보여주는 것처럼...

“다 보인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호했다.

아니야. 이 수를 읽을 리 없지.

그가 말을 놓았다.

찜기에서 김이 조금 더 세게 올라온다.

고구마가 거의 다 익어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나는 손을 뻗는다.

말을 놓는 순간, 찜기 밖으로 물이 튀는 소리가 더 크게 다가온다.

고구마가 끓는 그 소리는 마치 장기판 위의 승부가 임박했음을 알리는 듯했다.

게티즈버그 전투, 미드웨이 해전. 인천상륙작전.

잊지 마라. 나는 결정적인 한 번의 승부에 강하다.


방 안엔 장기짝이 부딪히는 소리와 찜기의 증기 소리만이 가득하다.

그의 한 손은 여전히 장기판 위를 차분하게 누르고 있고

나는 손끝에 더 많은 힘을 주며 말을 놓는다.

그때, 찜기에서 불꽃처럼 증기가 솟았다.

고구마의 껍질이 끝내 터지려는 순간,

내 손이 말을 움직였다.

이번엔 확실히, 나의 수가 그를 뚫고 지나갈 것이다.

그러나 장인어른은 잠깐 멈춰서, 나를 한 번 쳐다보았다.

그는 숨을 고르며, 고요하게 손을 뻗었다.

내 말은 이미 장기판 위에서 빠르게 옮겨졌고,

고구마는 이제 거의 다 익었다.


내게 남은 것은 순간의 시간, 장인어른의 대응을 바라보는 짧은 기다림이었다.

이 수를 받는다면 나는 이제 장인어른을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받을 리가 없다.


그 순간, 찜기에서 고구마가 터졌다.

거친 껍질이 갈라지며 그 속에서 따뜻한 증기가 피어났다.

장인어른은 고요하게 마지막 수를 두었다.

그때,

문이 열리고, 아내와 장모님이 들어왔다.

“어머, 고구마가 탔네?”

아내가 화들짝 놀라며 불을 껐다.

장모님은 장기판을 힐끗 보았다,

“장기판도 끝났네.”

그 말에 장인어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고구마는 다 익었으니, 이제 좀 쉬자.”

고구마의 따뜻한 김이 방 안을 가득 채운다.


나는 장기판 위의 말을 잠시 바라보았다.

타서 눌어붙었다. 고구마도, 장기판도, 나도.


승부에 집중하기 위해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나는

이제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유토피아... 인정합니다."



장인어른이 고구마를 갈라 거무스름한 부분을 내게 건넨다.


“눌어붙은 부분이 더 맛있지. “




나는 고구마를 건네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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