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판의 풍수지리

ep. 5_ 밥은 입으로 먹고, 눈치는 코로 먹고

by 김멀똑

오전 11시 50분.


사무실의 공기가 바뀐다. 오전 내내 엑셀과 사투를 벌이던 좀비들의 눈에 생기가 돌기 시작하는 시간. ‘파블로프의 개’처럼 위산이 분비되는 시간. 점심시간이다.


하지만 임원 모시는 팀장에게 점심은 ‘식사’가 아니다. 그것은 ‘의전(Protocol)’이자, ‘영토 전쟁’이다.

조 상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핸드백에서 최신형 아이폰을 꺼내 무언가를 확인했다. 주식 차트? 아니다. 그녀의 손가락은 ‘나침반 앱’을 켜고 있었다.


“K. 가죠. 오늘은 B구역이에요.”


B구역. 구내식당 동남쪽 구석. 창문도 없고, 식기 반납구와 가까워 시끄럽고 어수선한 최악의 자리. 하지만 그녀는 굳이 그곳을 고집했다.


“상무님, 거긴 좀 시끄럽지 않습니까? 창가 쪽 A구역이 뷰도 좋고...”

“K. 데이터(Data)를 봐요. 오늘 일조량과 공기 흐름상, 동남쪽이 ‘양기(Positive Energy)’가 가장 강하게 모이는 곳이에요. 창가 쪽은 음기(Negative)가 세서 소화불량 오기 딱 좋아요.”


일조량? 공기 흐름? 지하 1층 구내식당에 해가 어디 있고 바람이 어디 있나. 그냥 그녀의 전속 점쟁이가 “오늘은 동남쪽에서 귀인을 만난다”고 문자를 보냈겠지.




오전 11시 55분. 구내식당.


전쟁터다. 수백 명의 직원이 식판을 들고 하이에나처럼 빈자리를 찾아 헤맨다.


우리는 목표 지점인 B구역으로 진격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이미 그 자리를 선점한 무리가 있었다. 영업본부 신입 사원들이었다. 그들은 감히 ‘상무님의 양기’가 흐르는 성지에 앉아 해맑게 제육볶음을 먹고 있었다.

조 상무의 미간이 0.5mm 찌푸려졌다. 그녀는 직접 나서지 않는다. 우아한 포식자는 사냥개에게 눈짓을 할 뿐이다. 나는 사냥개, 아니 21년 차 팀장으로서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나는 식판을 들고 신입들에게 다가갔다.


“어, 그래. 많이들 먹어. 근데 여기... 식기 반납구 냄새 안 나? 자네들 호흡기 건강에 안 좋을 텐데. 저기 창가 쪽이 뷰도 좋고 공기도 맑아 보이는데, 옮기는 게 어때?”


신입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그리고 뒤에 서 있는 ‘냉기의 화신’ 조 상무를 번갈아 봤다. 눈치 빠른 한 녀석이 벌떡 일어났다.


“아! 맞습니다! 저기 창가 자리가 딱 비었네요! 가자 얘들아!”


모세의 기적처럼 자리가 갈라졌다. 신입들이 쫓겨난 자리에 조 상무가 우아하게 착석했다. 그녀는 물티슈를 꺼내 테이블을 닦으며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Good. 역시 여기가 에어 플로우(Air-flow)가 좋아. 머리가 맑아지네.”


반납구에서 나는 음식물 쓰레기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나는 “그렇군요”라고 대답하며 밥을 펐다.


그때였다.


쿵.


묵직한 식판 하나가 조 상무 바로 옆자리에 떨어지듯 놓였다. 산더미처럼 쌓인 고봉밥, 국물이 뚝뚝 떨어지는 김치찌개, 그리고 식판 밖으로 튀어나온 쌈 채소.


“어이쿠! 제니퍼 상무 아니야? 여기서 다 보네?”


오 상무였다. 영업본부의 야수. 신입들을 쫓아내고 차지한 이 명당에, 호랑이가 제 발로 걸어 들어온 것이다.

조 상무의 표정이 굳었다. 그녀의 계산(풍수지리)에 따르면 이곳은 ‘귀인’을 만날 자리였다. 그런데 귀인은커녕, 가장 혐오하는 ‘천적’이 나타났다.


“오 상무님... 여긴 저희 팀이 회의 겸 식사하는 자리인데요.”

“에이, 식당에 니 자리가 어디 있어? 같이 먹자고. 혼자 먹으면 체해.”


오 상무는 대답도 듣지 않고 털썩 앉았다. 그의 몸에서 땀 냄새와 묘한 파스 냄새, 그리고 어젯밤 마신(것으로 위장한) 술 냄새가 훅 풍겼다. 조 상무가 황급히 손 소독제를 찾아 발랐다. 그녀에게 오 상무는 ‘음기(Negative)’ 그 자체였다.


“근데 제니퍼, 자네 왜 이런 구석탱이에 앉아? 저기 창가 좋은데 놔두고. 무슨 풍수지리라도 봐?”


오 상무가 쌈을 크게 싸서 입에 넣으며 킬킬거렸다. 정곡을 찔린 조 상무의 눈썹이 꿈틀 했다.


“아뇨. ‘보안(Security)’ 때문입니다. 창가는 도청 위험이 있어서요.”

“도청? 밥 먹는데 무슨 도청? 하하하! 자네 진짜 예민해. 그러니까 살이 안 찌지. 나처럼 이렇게 팍팍 먹어야 일도 잘하는 거야. 자, 아~ 해봐. 고기 한 점 줄게.”


오 상무가 제육볶음을 젓가락으로 집어 조 상무의 식판에 툭 던져주었다. 붉은 양념이 그녀의 하얀 쌀밥 위에, 그리고 순백색 블라우스 소매 끝에 튀었다.


순간, 시간이 멈췄다. 조 상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것은 분노를 넘어선 공포였다. 자신의 완벽한 통제 구역(식판)이 오염된 것에 대한 혐오.


나는 식탁 아래서 조용히 내 발로 오 상무의 정강이를 툭 쳤다.


'형님, 제발 좀...'


조 상무는 떨리는 손으로 소독 티슈를 꺼냈다.


“...식욕이 없네요.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그녀는 식판을 거의 건드리지도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남쪽의 양기도, 귀인의 기운도, 오 상무의 ‘쌈’ 한 방에 초토화되었다. 덩그러니 남은 나와 오 상무. 오 상무는 눈치 없이 내 밥 위에 남은 제육볶음을 얹어주며 말했다.


“쳇, 까탈스럽기는. 진혁아, 너라도 많이 먹어라. 밥심으로 버티는 거다.”


나는 꾸역꾸역 밥을 넘겼다. 모래를 씹는 기분이었다. 박 대리는 멀찍이 떨어진 테이블(안전거리 5m 확보)에서 혼자 이어폰을 꽂고 평온하게 샐러드를 먹으며 우리를 관찰하고 있었다. 그녀의 입모양이 ‘콘텐츠 각’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오후 1시. 자리에 돌아온 나는 속이 더부룩해 소화제를 찾았다. 책상 서랍을 여니 커터 칼이 보였다.

나는 조용히 연필 한 자루를 꺼냈다. 사각, 사각. 나무를 깎아낸다.


명당(明堂)이란 무엇인가. 해가 잘 드는 곳? 바람이 잘 통하는 곳?

아니다. 직장인에게 명당이란, 상사가 없는 곳이다.


조 상무는 동남쪽을 고집했지만, 결국 그곳엔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오 상무가 있었다. 풍수지리는 틀리지 않았다. 오 상무는 나에게 밥을 챙겨주는 ‘귀인’ 일 수도 있고, 조 상무에겐 ‘액운’ 일 수도 있으니까.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잘 깎인 연필심을 본다. 밥은 입으로 먹었지만, 눈치는 코로 먹었다. 위장 속에 얹힌 이 불편한 덩어리는, 21년 차가 되어도 소화되지 않는다.


빌어먹을. 체하기 딱 좋은 오후였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까요?]


점심시간의 자리 배치는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권력의 확인 과정일 때가 많습니다. 당신의 조직에서 '누구와 밥을 먹느냐'는 얼마나 중요한 정치적 행위입니까? 당신은 그 게임에 참여합니까, 아니면 박 대리처럼 독자노선을 걷습니까?


조 상무는 '데이터(양기)'를 믿고 자리를 잡았지만, 현실은 '최악(오 상무)'이었습니다. 우리가 맹신하는 어떤 원칙이나 루틴이, 실제 현실에서는 오히려 나를 옥죄거나 엉뚱한 결과를 초래한 적은 없나요?


"직장인에게 명당은 상사가 없는 곳이다." 당신에게 회사 내에서 가장 마음 편한, 당신만의 '안전지대(Sanctuary)'는 어디입니까? (화장실? 옥상? 아니면 퇴근길 버스 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