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살장의 피아니스트

ep. 6_ 비명(Scream)을 비전(Vision)으로 연주하는 시간

by 김멀똑

월요일 오전 9시.


대회의실. 공기는 무겁고 축축하다. 도살장에 끌려온 가축들이 내뿜는 공포와, 칼잡이(임원)들의 비릿한 살기가 뒤섞인 냄새.


나는 스크린과 연결된 메인 노트북 앞에 앉았다. 내 역할은 단순한 서기(Recorder)가 아니다.


나는 피아니스트다.


이 아수라장에서 튀어나오는 쌍욕과 비난을 실시간으로 필터링하여, 아주 우아하고 정제된 '글로벌 경영 표준어'로 변주해 내는 연주자.


탁. 탁.


손가락을 풀었다. 오늘의 연주곡은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한 불협화음이 예상된다.


“시작하죠.”


사장님의 짧은 한마디. 조 상무가 먼저 칼을 뽑았다. 그녀는 손 소독제로 닦은 손으로 레이저 포인터를 들었다. 붉은 점이 오 상무의 이마, 아니 스크린 속 매출 하락 그래프를 조준했다.


“오 상무님. 국내 로드숍 매출 -15%. 변명부터 들어볼까요?”


오 상무가 짝다리를 짚고 마이크를 잡았다.


“변명은 무슨. 지난주에 태풍 왔잖아. 손님이 없는데 물건을 귀신한테 파냐?”



[ROUND 1. 태풍 핑계]

오 상무(Audio): “아니, 태풍 매미급이 와서 간판이 날아다니는데 누가 화장품을 사러 와! 천재지변을 나보고 어쩌라고!”


강팀장의 연주(Typing): >> 기후적 요인(Climate Factor) 및 외부 변수로 인한 일시적 트래픽 감소 현상 분석.


조 상무가 코웃음을 쳤다.


“천재지변이요? 경쟁사는 온라인 프로모션 돌려서 매출 방어했어요. 오 상무님은 비 온다고 막걸리나 드셨겠죠.”


조 상무(Audio): “맨날 대리점 사장들이랑 술 처먹고 형님 동생 하니까 감이 떨어지죠. 요즘은 데이터(Data)로 영업하는 시대예요. 그놈의 술 냄새나는 영업 좀 집어치우라고요!”


강팀장의 연주(Typing): >> 관계 중심의 전통적 영업 방식(Relationship-based)에서 탈피, 데이터 기반(Data-driven)의 정교한 타겟팅 전략으로의 피보팅(Pivoting) 시급.


타닥, 타닥.


경쾌한 키보드 소리가 욕설을 덮는다. '술 처먹는 영업'이 '관계 중심 영업'으로, '집어치우라'는 말이 '피보팅'으로 승화된다.



[ROUND 2. 인신공격의 서막]


오 상무의 얼굴이 붉어졌다. (물론 혈압 때문이지 술 때문은 아니다.) 그는 제니퍼의 아픈 구석을 찌르기로 결심했다.


“야, 조수진. 너 말 잘했다. 데이터? 그래, 데이터 좋지. 근데 너 지난달 신제품 출시일 왜 미뤘어?”


조 상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그건... 시장 상황을 고려해서...”

“시장 상황? 웃기고 있네. 내가 모를 줄 아냐? 네가 모시는 그 용한 점쟁이가 날짜가 흉(凶)하다고 미루라고 했다며!


회의실에 정적이 흘렀다. 핵폭탄이 터졌다. 사장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오 상무, 그게 무슨 소리야? 점쟁이라니?”


오 상무는 신이 나서 폭로를 이어갔다.


“사장님, 얘 지난번에 제품명 정할 때도 작명소 가서 지어왔습니다! 데이터 사이언티스트? 웃기지도 않아. 무당 사이언티스트겠지! 4일 날 출시하면 부정 탄다고 15일로 미루는 바람에 경쟁사한테 선점당해서 매출 박살 난 거 아닙니까!”


조 상무가 벌떡 일어났다.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 이건 명예훼손이에요! 그건 전략적인 결정이었다고요!”

“전략? 작두 타는 게 전략이냐? 야, 너 사무실 책상 방향도 북서쪽 아니면 안 앉는다며? 회사에 굿판을 벌여라 아주!”


난장판이다. 무당, 작두, 굿판... 경영 회의실에서 나올 수 없는 단어들이 쏟아진다. 사장님이 나를 노려봤다.


‘강팀장... 이거 어떻게든 수습해. 기록 남겨.’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손가락을 놀렸다. 이건 쇼팽의 에튀드보다 어렵다. '작두 타는 임원'을 어떻게 경영 용어로 번역한단 말인가.


오 상무(Audio): “점쟁이 말 듣고 출시일 미루다가 골든 타임 다 놓쳤잖아! 이게 다 네 미신 놀음 때문이야!”


강팀장의 연주(Typing): >> 론칭 타이밍에 대한 내부의 신중한 검토(Risk Management) 과정에서 경쟁사 선점 효과 발생. 향후 의사결정 프로세스의 신속성(Agility) 제고 필요.


타다닥. 탁!


미션 클리어. '점쟁이 말 듣고 미룸'은 '신중한 리스크 매니지먼트'로, '미신 놀음'은 '의사결정 프로세스'로 둔갑했다.


회의는 엉망진창으로 끝났다. 사장님은 "둘 다 꼴 보기 싫으니 나가!"라고 소리쳤고, 조 상무는 분해서 울먹이며(혹은 부정을 씻기 위해) 손 소독제를 온몸에 발랐다.


회의실이 비워졌다. 나는 홀로 남아 모니터를 응시했다.


화면 속 회의록은 완벽했다. 그곳엔 욕설도, 술 냄새도, 점쟁이도 없었다. 오직 차갑고 지적이며,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는 '글로벌 스탠더드'만이 존재했다.


박 대리가 다가와 내 어깨를 툭 쳤다.


“와... 팀장님. 아까 ‘작두’를 ‘Agility(민첩성)’로 번역하실 때 소름 돋았어요. 올해의 번역상 받으셔야겠는데요?”


그녀는 내 모니터 화면을 폰으로 찍었다. (아마도 유튜브 썸네일용일 것이다.)

나는 너덜너덜해진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했다. 새벽에 깎은 연필심은 날카로웠지만, 내 손끝에서 나온 활자들은 뭉툭하고 미끄러웠다.


진실은 추하고, 기록은 아름답다. 나중에 누군가 이 회의록을 본다면, 우리 회사가 매우 치열하고 합리적인 토론을 통해 굴러간다고 믿겠지. 그게 바로 내가 받는 월급의 대가다. 현실을 지우고 환상을 기록하는 값.


나는 서랍에서 커터 칼을 꺼냈다.


드륵, 드륵.

칼날을 넣었다 뺐다 하는 소리가 텅 빈 회의실을 채웠다.

오늘 내가 연주한 것은 피아노가 아니었다. 나는 도살장의 바닥에 흐르는 피를 닦아내는 대걸레질을 했을 뿐이다.


빌어먹을. 손 씻고 싶은 월요일이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가요?]


회의실의 '개싸움'이 회의록에선 '건설적 토론'으로 둔갑합니다. 당신의 조직에서 '기록된 역사'와 '실제 진실'이 가장 달랐던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강팀장은 '미신에 의한 지연'을 '리스크 관리'라고 포장했습니다. 당신은 자신의 실수나 약점을 그럴듯한 '경영 용어'로 포장(Reframing)해 본 경험이 있습니까?


우리는 모두 타인의 말을 듣고 해석합니다. 당신은 상사나 동료의 거친 말(Raw Data)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까, 아니면 강팀장 처럼 감정을 걷어내고 의도만 필터링해서 듣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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