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8_ 내가 쓴 판타지 소설을 다큐로 만드는 방법
탄손누트 국제공항의 자동문이 열리는 순간, 나는 숨을 멈췄다.
훅-.
마치 거대한 젖은 수건이 얼굴을 강타하는 듯한 느낌. 습도 85%. 이것은 날씨가 아니다.
물속을 걸어 다니는 형벌이다.
"팀장님, 제니퍼(조 상무)가 말한 '성장률 21%'라는 숫자 있잖아요."
옆에서 박 대리가 손 선풍기를 맹렬히 돌리며 중얼거렸다.
"그 숫자, 이 습도에 닿으면 퉁퉁 불어서 터질 것 같은데요."
그녀의 말이 맞다. 서울의 에어컨 바람 아래서 엑셀로 만든 숫자는, 이 야생의 땅에 발을 딛는 순간 증발하거나 부패한다. 우리는 지금 '판타지 소설(사업계획서)'을 들고, '다큐멘터리(현장)'를 찍으러 온 것이다.
그랩(Grab) 택시를 잡아탔지만, 에어컨에서는 미지근한 곰팡이 냄새가 났다. 창밖은 이미 오토바이의 강(River)이었다. 신호등은 장식품에 불과했고, 중앙선은 '용기 있는 자'가 넘나드는 고무줄이었다.
"팀장님, 저 오토바이들 좀 보세요. 틈만 보이면 머리를 들이미는데요?"
"저게 바로 우리가 상대해야 할 시장이야. 틈새가 없으면 틈을 찢어서라도 들어가는 곳."
호치민 법인 사무실은 서늘했다. 하지만 법인장의 등판은 이미 땀으로 지도를 그리고 있었다. 그의 책상 위에는 은퇴 이민 안내서와 타이틀리스트 골프공 두 개가 문진처럼 놓여 있었다.
"강 팀장, 본사에서는 몰라요. 여긴 전쟁터입니다."
법인장이 레이저 포인터로 베트남 전도를 신경질적으로 찔러댔다. 붉은 점이 지도 위를 갈팡질팡 맴돌았다.
"GT(재래시장) 비중이 80%예요. 온라인? 아직 멀었습니다. 중국 놈들이 틱톡샵(TikTok Shop)에서 1+3 행사를 뿌려대는데, 우리가 무슨 수로 당해냅니까?"
그는 '못한다'는 이유를 100가지쯤 준비해 둔 것 같았다. 전형적인 패배주의. 하지만 그를 비난할 순 없다. 본사는 지원금은 줄이면서 목표는 두 배로 올렸으니까.
"법인장님."
내가 말을 끊었다.
"제니퍼가 그 '21%'라는 숫자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달성 못 하면, 저랑 법인장님 둘 다 집에 가야 돼요, 아직 은퇴하시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하시잖아요"
법인장의 동공이 흔들렸다. 궁지에 몰린 월급쟁이의 눈빛. 그것은 살려달라는 애원과, 나만 죽을 순 없다는 살기가 뒤섞인 기묘한 색깔이었다.
"그... 그럼 본사 지원금 더 태워주시죠. 프로모션 예산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역시나. 돈 달라는 소리다. 이익률은 이미 바닥을 뚫고 지하로 내려가고 있는데. 그때, 구석에서 휴대폰만 보던 박 대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법인장님, 아까 1층 로비 오다 보니까요."
박 대리의 맑은 눈이 법인장을 향했다.
"중국 브랜드 팝업 스토어 열렸던데요? 거기 줄 선 사람들 보니까 다들 현금 뭉치 들고 있던데. 저희가 예산 더 태운다고 걔네를 '돈'으로 이길 수 있을까요?"
팩트 폭격. 법인장은 입을 다물었다. 돈 싸움으로는 승산이 없다. 우리는 다른 무기가 필요했다.
도망치듯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피신처는 근처 '콩카페(Cộng CàPhê)'. 코코넛 스무디 커피의 달달하고 차가운 맛이 뇌를 식혀주었다.
"박 대리, 넌 아까 그 상황이 어떻게 보이냐?"
"음... 답 없던데요? 법인장님 눈 보셨어요? 이미 영혼은 샌디에이고 골프장에 가 계시던데."
박 대리는 빨대로 얼음을 쿡쿡 찌르며 말했다. 틀린 말이 없다. 남쪽의 호치민 법인은 이미 '야생성'을 잃었다. 배부른 고양이는 쥐를 잡지 않는다.
내 시선이 카페 벽면에 붙은 흑백 사진에 머물렀다. 베트남의 전통 의상 아오자이를 입은 여인이, 긴 대나무 장대 양 끝에 쌀바구니를 매달고 걸어가는 사진.
"저거야, 저거."
"네? 쌀국수요?"
"아니. 베트남이라는 나라의 본질."
나는 냅킨을 한 장 뽑아, 늘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몽당연필로 그림을 그렸다. 길쭉한 S자 모양의 지도. 그리고 위아래에 동그라미 두 개.
"베트남은 이 대나무 장대와 같아. 북쪽의 하노이(정치/이성)와 남쪽의 호치민(경제/욕망). 거리는 1,700km. 서울-부산의 4배야. 기질? 완전 딴판이지."
"그래서요?"
"지금 본사 전략은 'One Vietnam'이야. 파트너사 하나를 선정해서 전국을 통치하겠다는 거지. 관리하기 편하니까. 소위 말하는 '통합(Consolidation)' 전략."
"합리적인데요? 물류비도 아끼고."
"합리적이지. 엑셀 위에서는."
나는 녹아가는 커피를 휘저으며 읊조렸다.
"경영학에서는 이걸 '주인-대리인 문제(Principal-Agent Problem)'라고 부르지. 덩치 큰 파트너 하나를 세워두면 관리는 편해. 하지만 그 공룡이 배부르다고 드러누워 버리면? 우린 그냥 '을'이 되는 거야. 특히 베트남처럼 유통망이 모세혈관처럼 쪼개진 정글에서, 둔한 공룡 한 마리로 사냥을 한다? 그건 자살행위야."
나는 종이 위의 두 동그라미를 연필로 꾹 찔렀다. 흑연 심이 부러지며 종이에 박혔다.
"쪼개서 가자, 이원화 전략(Dual Vendor System). 북쪽은 굶주린 하노이 늑대에게, 남쪽은 호치민의 능구렁이에게. 서로 경쟁시켜서 미친 듯이 뛰게 만드는 거야. 그게 내가 쓴 소설의 반전이야."
박 대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팀장님, 그거 제니퍼가 알면 뒤집어질 텐데요? 정책위반에 '비효율(Inefficiency)'이라고 난리 칠걸요?"
"제니퍼가 지랄을 하든, 대박이 나든 둘 중 하나겠지. 어차피 21% 못 맞추면 죽는 건 매한가지야."
카페를 나섰다. 퇴근 시간, 호치민의 도로는 거대한 오토바이의 바다로 변해 있었다. 수백, 수천 대의 엔진이 뿜어내는 매연과 열기. 그들은 서로의 깻잎 한 장 차이 공간을 파고들며 물결처럼 흐르고 있었다. 무질서해 보이지만, 그들 나름의 기막힌 질서가 있는 곳.
"와... 저기다 우리 회사 물류 트럭 밀어 넣으면 어떻게 될까요?"
박 대리가 혀를 내두르며 물었다.
"1미터도 못 가서 멈추겠지. 갇혀서 오도 가도 못할 거야."
그게 바로 본사가 원하는 '통합 파트너' 전략의 최후다. 이 정글에서는 거대한 항공모함이 아니라, 저 오토바이들처럼 유연하게 침투하는 게릴라 전술이 필요하다. 이 땅은 몽골, 프랑스, 미국이라는 제국들을 모두 물리친 나라다. 힘으로 찍어 누르려던 놈들은 다 쫓겨났다. 살아남으려면 그들처럼 흐름을 타야 한다.
띠링-.
주머니 속 핸드폰이 울렸다. 제니퍼다.
[K. 베트남 도착했죠? 공기부터 다르지 않나요? 그 뜨거운 에너지를 숫자로 바꿔오세요. 기대할게요.]
나는 헛웃음을 삼키며 핸드폰을 넣었다. 에너지를 숫자로 바꾸라니. 그녀에게 이곳은 그저 엑셀 시트의 연장선일 뿐이다.
"가자, 박 대리. 오토바이 불러."
"네? 진짜 오토바이(Grab Bike) 타요? 택시 안 타고요?.."
"차가 막혀서 택시 타면 저녁 미팅 펑크야."
그랩 기사가 건넨 땀 냄새나는 헬멧을 눌러썼다. 축축하고 불쾌한 냄새가 정수리를 찔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정신은 더 맑아졌다. 21% 성장? 그래, 해보자. 내 소설의 결말이 비극이 될지 희극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루한 다큐멘터리는 되지 않을 것이다.
부릉-! 오토바이 엔진 소리가 심장 박동처럼 웅웅거렸다. 나는 매연 가득한 도로 위로, 두 개의 심장을 가진 용의 꼬리를 잡으러 뛰어들었다.
바람 소리 사이로 뒷자리의 박 대리가 소리쳤다.
"팀장님! 근데 저희 미팅 끝나고 발 마사지는 가는 거죠? 예약합니다?!"
나는 대답 대신 스로틀을 감는 기사의 등 뒤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전쟁을 치르더라도 발은 풀어야지. 그게 K-직장인의 마지막 자존심이니까.
지금 당신이 붙들고 있는 계획이나 신념은, 거친 현실을 마주하기 싫어서 만든 '예쁘게 정돈된 가짜 지도'인가요, 아님 현실을 마주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진실'인가요
때론 일을 하다 보면, 정책과 현실이 다를 때가 있습니다. 그때 여러분의 선택은 어떠신가요? 본사 지침과는 다소 방향이 다르지만, 강팀장처럼 현실에 맞춰 유연하게 대처하는지, 조상무처럼 원칙을 지키며 따르는지
나와 욕망이 다른 상대를 대할 때 여러분의 태도는 어떤가요? 강하게 밀어붙이며 원하는 바를 얻어내려 애쓰는 편인가요,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는 편인가요? 법인장과 강팀장은 어떻게 합의점을 찾을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