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7_ 위선은 우아하고, 탐욕은 멍청하다
11월 15일.
연말 결산(Closing)을 앞둔 회의실. 공기는 무겁고, 내 주머니 속 커터 칼은 차갑다.
오늘의 안건은 '재고 소진(Inventory Clearance)'. 창고에 쌓인 20억 치 악성 재고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K. 당장 9,900원에 풀어요.”
조 상무가 입을 열었다. 그녀의 눈은 충혈되어 있었고, 손 소독제를 바르는 손놀림은 평소보다 두 배 빨랐다. 그녀가 말한 9,900원은 정가(12만 원)의 92% 할인. 사실상 폐기 처분 가격이다.
“상무님... 9,900원이요? 브랜드 이미지가...”
“이미지가 밥 먹여줘요? 지금 캐시 플로우(Cash Flow)가 막혔잖아요! 본사에서 유동성 확보하라고 난리 났다고요. 브랜드고 나발이고 일단 현금을 만들어야 할 거 아니에요!”
그녀는 지금 ‘데이터’가 아니라 ‘공포’에 질려 있다.
(아마도 어제 그녀의 점쟁이가 "올해 안에 곳간을 비워야 새 돈이 들어온다"라고 했을 것이다.)
그때, 반대편에서 코웃음 소리가 들렸다. 오 상무였다. 그는 평소처럼 넥타이를 풀어헤치는 대신, 웬일로 넥타이를 꽉 조여 매고 근엄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어허, 제니퍼. 사람이 왜 그렇게 천박해? 9,900원이 뭐냐, 9,900원이. 다이소도 아니고.”
“... 네?”
조 상무가 황당한 듯 쳐다봤다.
“우리 브랜드의 ‘헤리티지(Heritage)’를 생각해야지. 당장 돈 몇 푼 급하다고 자존심을 팔아? 난 반대야. 내 영업망에 그딴 싸구려 물건은 못 깔아. 가오(Pride) 상하게.”
기가 찰 노릇이다. 평소 "매출 안 나오면 다 죽어!"를 외치던 영업 임원이 갑자기 브랜드 철학자가 되었고, "브랜드는 영혼"이라던 마케팅 임원이 떨이 장사꾼이 되었다.
나는 안다. 오 상무의 저 태세 전환은 철학 때문이 아니다. 그는 알고 있는 거다. 9,900원에 풀어서 매출 목표(금액)를 맞추려면, 평소보다 물량을 10배 더 팔아야 한다는 것을. 그 개고생을 하느니 차라리 안 팔고 욕먹는 게 낫다는 ‘고도의 태업 계산’이 끝난 것이다.
“오 상무님! 지금 가오 따질 때예요? 재고 못 털면 우리 평가 D등급이에요!”
“D등급 받으면 어때? 내 자존심은 A등급인데. 난 못 해.”
미쳐 돌아간다. 조 상무는 돈을 위해 영혼을 팔려하고, 오 상무는 게으름을 위해 영혼을 지키려 한다. 두 개의 욕망이 정면충돌하는 지점. 사장님이 나를 노려봤다.
‘강팀장. 수습해. 못 하면 네가 다 뒤집어쓰는 거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안의 ‘이중간첩(Double Agent)’ 스위치를 켰다. 양쪽을 다 속여야 한다. 아주 우아하게.
“두 분 말씀, 모두 옳습니다. 하지만 제3의 길(The Third Way)이 있습니다.”
나는 화이트보드에 썼다. [럭키 박스 (Lucky Box)]
“재고를 낱개로 팔지 않겠습니다. 불투명한 박스에 담아 ‘랜덤 박스’로 팝니다. 가격은 39,000원.”
조 상무가 인상을 찌푸렸다.
“랜덤 박스? 너무 사행성 아니에요?”
나는 조 상무 쪽으로 몸을 숙이며 작게 속삭였다.
“상무님. 이건 재고 처리가 아닙니다. ‘게이미피케이션(Gamification)’ 마케팅입니다. 박스 안에 우리 제품을 무작위로 넣어서 창고를 비우는 거죠. 명분은 ‘고객의 재미’지만, 실질적으로는 악성 재고를 보이지 않게 처리하는 소각장입니다.”
조 상무의 눈이 반짝였다. ‘게이미피케이션’. 그녀가 좋아하는 있어 보이는 단어다.
나는 바로 몸을 돌려 오 상무를 봤다.
“상무님. 9,900원짜리 싼 티 나는 물건 아닙니다. 이건 ‘한정판 이벤트’입니다. 3만 9천 원이면 객단가도 방어되고, 무엇보다... ‘완판’ 안 되어도 됩니다. 한정판이니까 수량을 적게 풀었다고 보고하면 되거든요.”
오 상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적게 팔아도 된다’는 말에 꽂힌 것이다.
“그리고 박스 안에... ‘황금 열쇠(1돈)’ 교환권을 딱 5장만 숨겨놓겠습니다.”
두 임원이 동시에 소리쳤다.
“금? 예산은?”
“예산은 없습니다. 대신, 박스 무게를 맞추기 위해 넣을 ‘아트북(Art Book)’... 사실은 예전에 잘못 찍어서 창고에 처박혀 있는 5천 권짜리 룩북(Lookbook) 재고를 씁니다. 폐지 처리 비용 아낀 걸로 금 사면 됩니다.”
쓰레기(재고 화장품)와 쓰레기(재고 책자)를 합쳐서, 금칠을 한 뒤 ‘행운’이라는 이름으로 파는 것. 이것이 나의 솔루션이다.
일주일 뒤.
[홀리데이 럭키 박스]가 출시되었다. 나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요즘 소비자가 얼마나 똑똑한데 이런 상술에 넘어가겠나. 적당히 팔다가 망하면 ‘경기 침체 탓’으로 돌릴 보고서(소설)를 구상 중이었다.
그런데. 사고가 터졌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기괴하게.
유튜브에 한 영상이 올라왔다. 구독자 50만 명의 무속인 유튜버가 우리 럭키 박스를 언박싱하는 영상이었다.
“여러분... 이 박스에 들어있는 이 ‘아트북’ 그림 보이세요? 이 기하학적인 무늬... 이거 돈 들어오는 부적이랑 파동이 똑같습니다! 제가 기운을 느껴보니 대박이에요. 이거 집에 두면 로또 됩니다!”
사실 그 무늬는 3년 전 디자이너가 졸면서 그린 난해한 추상화였다. 하지만 대중은 ‘광기’에 목말라 있었다. 댓글창이 폭발했다.
"성지순례 왔습니다."
"저거 사고 나서 주식 상한가 침 ㄷㄷ"
"황금 열쇠가 문제가 아님. 저 책이 찐임."
사람들은 화장품이 아니라, 그 안에 든 ‘폐지(아트북)’를 사기 위해 줄을 섰다. 화장품은 덤이었고, 쓰레기가 메인이 되었다. 완판(Sold Out).
조 상무는 “역시 나의 ‘게이미피케이션’ 전략이 통했어! 데이터가 증명하잖아!”라며 자화자찬했고, 오 상무는 “내가 뭐랬어? 가오를 지키니까 팔리는 거야!”라며 떵떵거렸다.
그들은 모른다. 이 성공이 전략 때문도, 철학 때문도 아닌... 그저 ‘미신’에 미친 알고리즘의 장난(Dumb Luck)이라는 것을.
퇴근 후, 서재. 나는 커터 칼을 꺼냈다. 사각, 사각. 연필을 깎는다.
오늘 내가 한 일은 무엇인가. 나는 위선자였다. 조 상무에게는 ‘매출’을, 오 상무에게는 ‘명분’을 약속했지만, 결국 내가 판 것은 ‘요행’과 ‘미신’이었다.
잘 깎인 흑연심을 본다. 날카롭다. 하지만 내 마음은 뭉툭하다.
성공했다는 결과보고서를 써야 한다.
제목: [MZ세대 트렌드를 겨냥한 럭키 박스 마케팅 성공 사례] 내용: 치밀한 타겟팅과 브랜딩의 승리...
거짓말이다. 하지만 회사는 이 거짓말을 ‘Best Practice(우수 사례)’로 포장해 전사에 공유할 것이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연필을 내려놓았다.
진실은 언제나 우연(Accident)에 빚을 지고, 성과는 언제나 위선(Hypocrisy)의 옷을 입는다.
재고 처리하기 딱 좋은, 운수 좋은 날이었다.
치밀한 전략보다 황당한 우연(미신, 오해)이 성공을 만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당신의 성과 중 운(Luck)이 차지하는 비중은 얼마입니까? 당신은 그 운을 실력이라고 포장한 적이 없습니까?
강팀장은 두 상사의 모순된 욕망 사이에서 양쪽 모두를 속이는 해결책을 냈습니다. 조직 생활에서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선의의 기만'이나 '교묘한 조율'이 필요할 때, 당신은 기꺼이 위선자가 될 수 있습니까?
회사가 버리려던 쓰레기(재고 책자)가 고객에게는 보물(부적)이 되었습니다. 당신이 무가치하다고 여기는 업무나 경험 중, 관점을 바꾸면 예상치 못한 가치를 발휘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