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 무균실의 계산기

ep.11_ 1달러도 손해보지 않는 그들에게 '덤'을 파는 법

by 김멀똑


쿠알라룸푸르에서 비행기로 고작 1시간.

하지만 창이 공항에 발을 딛는 순간, 우리는 전혀 다른 행성에 불시착했다.


습기와 매연, 그리고 사람 냄새가 뒤엉켜 진동하던 말레이시아와 달리, 싱가포르의 공기는 소름 끼치도록 차갑고 건조했다. 공항 바닥은 혀로 핥아도 될 만큼 반짝였고, 공기 중에는 인공적인 라벤더 향이 감돌았다.


“Finally. 이제야 숨 좀 쉬겠네요.”


조 상무(Jennifer)가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그녀의 킬힐 굽이 대리석 바닥 위에서 경쾌한 스타카토를 찍었다.

뒤따르던 박 대리(Sophia)가 가방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냈다. 손바닥만 한 레이저 거리 측정기였다. 그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조용히 중얼거렸다.


“쓰레기통 간 거리 정확히 50m, 바닥 타일 오차율 0.1mm 미만… 팀장님, 여기 편집증 환자가 만든 도시 같아요. 썸네일 제목 ‘먼지 한 톨 없는 지옥’ 어때요?”


박 대리의 눈이 ‘맑은 눈의 광인’처럼 반짝였다. 그녀에게 이 완벽한 도시는 감탄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유튜브 채널 <대리만족: 가면 쓴 회사원>에 올릴 훌륭한 ‘소재 광산’ 일뿐이다.


“박 대리, 그거 좀 집어넣어. 보안 요원이 보면 폭발물인 줄 알고 잡아간다.”

“넵. 근데 팀장님, 여기 너무 깨끗해서 숨 막혀요. 제 숨소리 데시벨도 측정당할 것 같은 기분인데요.”


맞다, 이곳은 도시라기보다 거대한 ‘무균실(Sterile Room)’같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재킷 안주머니의 담배 갑을 깊숙이 밀어 넣었다. 여기선 숨 쉬는 타이밍이 틀려도 벌금을 낼 것 같아서.




미팅 장소는 마리나 베이 파이낸셜 센터 42층.

통유리 너머로 싱가포르 해협이 그림엽서처럼 박제되어 있었다. 테이블 맞은편에는 아세안 지역 총괄 디렉터 ‘David(데이비드)’가 앉아 있다.


무테안경, 한 치의 오차도 없는 포마드 헤어, 다림질 자국이 날 선 셔츠.

그는 흡사 AI가 생성한 ‘가장 이상적인 뱅커(Banker)’의 형상이었다.


박 대리는 구석에 앉아 미친 듯이 노트북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데이비드는 그녀가 열심히 회의록을 적는다고 생각했겠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그녀는 지금 이 숨 막히는 공기를 실시간으로 대본화하고 있을 것이다.


(박 대리의 노트북 화면: [속보] 인간 AI 발견. 눈 깜빡임 분당 3회 미만. 공감 능력 수치 제로 예상. 오늘 영상 각 떴다.)


“Jennifer, your proposal is impressive. But…”


‘But’. 비즈니스에서 가장 불길한 접속사. 데이비드의 손가락이 계산기 위를 춤추듯 날아다녔다.


“Listing Fee(입점비)와 Margin(마진) 구조가 우리 기준에 미달입니다. 싱가포르 리테일 렌트비(Rent)가 살인적인 거 아시죠? 마진 5% 더 확보해 주지 않으면, 런칭은 불가능합니다.”


차가운 거절.

조 상무의 눈빛이 흔들렸다.

박 대리의 타자 속도가 더 빨라졌다. 마치 피아니스트가 클라이맥스를 연주하듯.


“David, 5%는 어려워요. 우리 본사 COGS(매출원가) 가이드라인 상…”

“That’s your problem, not ours.”


데이비드가 딱 잘라 말했다. 조 상무가 나를 쳐다봤다.

‘네가 해결해’라는 눈빛.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


“David.”

“…”

“가격(Price)은 못 깎아 줍니다. 본사 승인 사항이라 제가 건드리면 저 바로 잘려요.”

“Then, no deal.”


데이비드가 서류를 덮으려 했다. 1초의 망설임도 없는 동작. 나는 반사적으로 테이블 위로 내 명함을 밀었다. 명함 뒷면엔 내가 엘리베이터에서 급히 적어둔 숫자가 있었다.


“대신, ‘FOC(Free of Charge)’ 물량을 드리죠.”


서류를 덮던 데이비드의 손이 멈췄다. 박 대리의 타자 소리도 순간 멈췄다.


정적.


“가격을 깎는 건 제 권한 밖이지만, 물건을 더 얹어주는 건 제 재량입니다. 본품 10개를 사면, 테스터(Tester)와 샘플(Sample)을 본품 용량 대비 20%만큼 더 드리겠습니다.”


데이비드가 안경을 고쳐 썼다.


“테스터와 샘플… 그걸로 우리 마진 5% 갭(Gap)을 메꿀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계산해 보시죠. 샘플을 뿌려서 매장으로 유입되는 트래픽(Traffic)과 전환율(Conversion Rate). 그게 5% 이상의 가치가 없나요? 무엇보다… 당신네 MD들이 제일 좋아할 겁니다. 공짜로 뿌릴 게 많아야 매장 운영이 쉬우니까요. ‘Kiasu(키아수: 손해 보기 싫어하는 심리)’ 알잖아요.”


데이비드의 입가에 아주 미세한, 0.5mm의 미소가 번졌다.

그는 다시 서류를 펼쳤다.


“Not bad. 조건부로 진행합시다.”


그 순간, 박 대리의 눈이 가늘게 빛났다. 그녀는 테이블 아래로 슬쩍 거리 측정기를 꺼내 데이비드와 나 사이의 거리를 쟀다.


(삑- 2.4m)


(박 대리의 속마음: 방금 심리적 거리 10m에서 2.4m로 급감. 자본주의가 낳은 기적의 딜. 이건 쇼츠(Shorts) 감이다.)





미팅이 끝났다. 계약서에 서명했지만, 뜨거운 포옹도 굳은 악수도 없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오는 동안, 귀가 먹먹했다.


“K, 제법인데요? FOC로 퉁칠 생각은 어떻게 했어요?”


조 상무가 거울을 보며 안도했다.


“싱가포르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게 ‘공짜(Free Gift)’랑 ‘줄 서기(Queue)’라면서요. 여기선 1달러 깎아달라고 하면 거지 취급하지만, 사은품 받으면 똑똑하다고 생각하니까요.”

"여하튼 나머지 일정들 잘 정리하고 조심히 돌아와요~"


조상무는 그랩(Grab)을 타고 먼저 공항으로 출발했다. 그녀의 위생적 한계는 말레이시아 까지 인 것 같다. 인도를 뒤로 미룬 것도 그 때문이지 않을까. 덕분에 마음은 좀 더 가벼워졌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 적도(Equator)의 태양이 정수리를 수직으로 내리꽂았다. 박 대리는 나오자마자 습관처럼 그늘까지의 최단 거리를 눈으로 측정했다.


“팀장님, 아까 소름 돋았어요. 데이비드 그 사람, 표정 변화 없는 게 보톡스 부작용인 줄 알았는데 그냥 돈 냄새 맡으면 웃는 거였네요.”


박 대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덧붙였다.


“근데 이 나라 사람들 진짜 재미없게 사네요. 효율, 숫자, 돈… 사람이 기계 부속품도 아니고.”

“그러니까 부자 된 거야. 감정을 섞지 않으니까.”


나는 담배를 피우고 싶었지만, 주변을 둘러봐도 흡연 구역은 보이지 않았다.


“박 대리, 혹시 흡연 구역 어딘지 알아?”

“직선거리 480m 전방, 횡단보도 두 개 건너서 구석에 짱 박혀 있네요. 도보 7분 예상됩니다. 그냥 참으시죠. 효율 떨어집니다, 근데 담배 끊으신 거 아녔어요?”


담배.. 끊어야 하는데.


돈은 깨끗한 곳에서 흐르지만, 사람은 냄새나는 곳에서 산다. 우리는 오늘 깨끗한 돈을 벌었지만, 마음 한구석은 소독약 냄새만 남은 듯 공허했다.


“가자, 박 대리. 공항 가서 밥이나 먹자. 여긴 떡볶이도 2만 원이더라.”


그 말에 박 대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2만 원이요? 미쳤네. 2만 원이면 제 은퇴 자금 포트폴리오에서 ETF 1주를 살 수 있는 돈인데. 팀장님, 저는 그냥 편의점 샌드위치 먹겠습니다. 파이어(FIRE)족에게 2만 원짜리 떡볶이는 죄악입니다.”


우리는 도망치듯 무균실을 빠져나왔다. 다음 목적지는 인도(India). 거리 측정이 불가능한 혼돈, 어떤 예측도 통하지 않는 ‘무질서’의 나라가 그녀의 거리 측정기를 고장 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가요?]


완벽한 시스템은 인간을 편하게 할까요, 아니면 소모품으로 만드는 걸까요? 애초에 완벽한 시스템이란 것은 존재하는 것일까요?


당신의 비즈니스에는 ‘사람 냄새’가 있나요, 아니면 말끔한 ‘소독약 냄새’가 날까요? 어느 것이 옳다고 보기엔 힘들겠지만, 여러분의 지향은 어떠신가요?


숫자로 이길 수 없을 때, 당신이 던질 수 있는 ‘덤(FOC)’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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