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사의 낙하산 : 생성형 헛소리와 디지털 송과체

ep.19_ 현장을 모르는 전략가들과 춤추는 법

by 김멀똑


제니퍼의 집무실이 아침부터 분주하다,

본사에서 누군가 찾아왔다.


전략기획실장, 곽필립(Philip Kwak).


그의 이력은 'GPT'가 불어로 쓴 시(Poem) 같았다. 소르본 대학 철학과 중퇴, 파리 16구 명상 센터 운영(폐업),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룹 회장님 사촌 동생의 처조카의 와인 파트너의 배다른 동생'이라는 성골 라인?


회의실 문이 열렸다.

밖에서는 양세찬 과장이 유리벽에 매미처럼 달라붙어 나에게 수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본부장님! 오늘 마감! 10억짜리 발주서 결재! 제발! 도장!'


하지만 회의실 안은 시공간이 멈춰 있었다. 곽필립은 맨발에 로퍼, 린넨 스카프를 두르고, 한 손엔 에스프레소가 아닌 '따뜻한 물(L'eau chaude)'을 들고 있었다.


"Bonjour, Jennifer. 그리고 K. 파리의 공기는 '멜랑꼴리(Melancholy)'했는데, 서울의 공기는 너무... '바이너리(Binary, 0과 1)'하네요. 숨이 막혀요."


제니퍼(조 상무)가 멸균 티슈로 테이블을 닦으며 맞장구를 쳤다.


"Oh, Philip! 정확해요. 우리 조직이 너무 '드라이(Dry)'하죠? 윤기가 없어, 윤기가."


창밖엔 양 과장이 "살려주세요"라는 입모양을 하며 절규하고 있었지만, 제니퍼는 그를 '배경화면(Wallpaper)' 취급했다.


곽필립이 화이트보드 앞에 섰다.

자료는 없다.


"제가 본사에서 온 이유는 간단해요. 지금 이 회사의 비즈니스엔 '향기(Parfum)'가 없어요. 우리는 화장품을 팔 게 아니라, 고객의 뇌 속에 '디지털 떼루아(Digital Terroir, 토양)'를 경작해야 합니다."


박 대리(Sophia)가 안경을 고쳐 쓰며 손을 들었다.


"실장님. 죄송하지만 '디지털 토양'의 산성도(pH)는 얼마입니까? 화장품은 화학 제품이라 pH 농도가 중요합니다."


곽필립이 측은하다는 듯 불어로 중얼거렸다.


"Ah... C'est terrible (끔찍하군요). Sophia. 그건 너무 '바게트(Baguette)' 같은 딱딱한 사고방식이에요. 디지털 떼루아는 데이터가 아닙니다. '뉘앙스(Nuance)'지. 우리는 생성형 AI를 통해 고객의 전생(Past Life)을 '렌더링(Rendering)'해서, 그들의 영혼에 '인셉션(Inception)'을 걸어야 합니다."


박 대리는 입을 다물었다. 말이 안 통하는 게 아니다. 주파수가 다른 것이다.

문제는 제니퍼였다.

그녀는 곽필립의 말을 10%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의 동공이 순간 '로딩 중'으로 흔들렸다. 하지만 그녀는 임원이다. 여기서 "무슨 개소리야?"라고 묻는 순간, '트렌드에 뒤처진 꼰대'가 된다.


제니퍼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메소드 연기 시작)


"음... '인셉션'... 느껴지네. Philip 말이 맞아요. 데이터 쪼가리가 중요한 게 아니야. 고객의 무의식 저 밑바닥, 그 '심연(Abyss)'을 건드리자는 거잖아? 마치 무당이 작두 타듯이, AI가 고객의 뇌 위에서 춤을 추게 하자? 와... 이거 완전 '테크-샤머니즘(Tech-Shamanism)'이네!"


곽필립이 감탄했다.


"Oui! (그래요!) 바로 그거예요! Jennifer는 역시 '영적(Spiritual)'인 감각이 있네요!"


두 사람의 대화는 이제 비즈니스가 아니라 '접신(Channeling)'의 영역으로 넘어갔다. 창밖의 양 과장은 이제 이마를 유리에 박고 기절한 척하고 있었다.


기이한 티키타카는 점입가경으로 치달았다.



곽필립: "그래서 제안합니다.. 메타버스 안에 거울의 방을 만들고, 고객의 '디지털 도플갱어'가 영원히 늙지 않는 화장품을 바르게 합시다. 예산은 200억.


제니퍼: (잠시 멈칫. 200억은 너무 큰데?) "어... 200억... Philip, 그건 좀 '헤비(Heavy)'하지 않나? 회장님이..."


곽필립: (정색하며) "Jennifer. 루이 14세가 베르사유 궁전을 지을 때 예산을 따졌을까요? 이건 '레거시(Legacy)'를 남기는 겁니다. 회장님도 '불멸(Immortality)'을 원하시잖아요."


제니퍼: (불멸이라는 단어에 꽂힘) "불멸... 그렇지! 회장님 요즘 건강 염려증 있으시니까! 좋아, 태우자! 200억! 미래를 위한 '봉헌(Offering)'이라고 생각하지 뭐!"



박 대리가 내 옆구리를 찔렀다. '팀장님. 이 사람들 이거, 미쳤어요. 양 과장님 결재 서류 10억은 반려해 놓고, 가상의 거울 방에 200억을 태운다니... 저거 막아야 해요. 안 그러면 우리 월급 루이 14세가 다 가져간다구요.'


나는 4B 연필을 책상에 툭, 던졌다.

영화 <슬픔의 삼각형>의 선상 파티가 떠올랐다. 배는 가라앉는데 선장과 부자가 똥 철학을 논하며 샴페인을 터트리는 상황. 논리로는 못 이긴다. 더 우아한 헛소리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


"저.. 실장님. 상무님. 두 분의 대화, 정말 '아방가르드(Avant-garde)'해서 눈물이 날 지경입니다."


내가 입을 열자 두 사람의 시선이 꽂혔다.


"그런데 실장님. 파리에서는 '오트 쿠튀르(Haute Couture, 맞춤복)'를 입기 전에 '프레타포르테(Prêt-à-porter, 기성복)'로 간을 보지 않습니까?"


"음... 패션의 문법이긴 하죠. So?"


"200억짜리 베르사유 궁전을 짓기 전에, '입장권'부터 팔면 어떨까요? 우리 고객들은 아직 한국의 척박한 땅에 살고 있습니다. 갑자기 루이 14세가 되라고 하면 '문화 충격(Culture Shock)'으로 도망갑니다. 그래서, 제안합니다. <Project : Déjà Vu (데자뷔)>. 매장에서 5만 원 이상 구매하면, AI가 고객의 얼굴을 인식해서 '가장 우아했던 전생의 모습'으로 변환해 주는 '귀족 필터' 서비스."


"오... '전생 체험'?"


"그렇습니다. 일명 '디지털 환생(Digital Reincarnation)'. 이걸로 고객 데이터를 모아서, 실장님의 베르사유 궁전에 들어갈 '시민권'을 부여하는 겁니다. 예산은 단돈 5천만 원. 만약 실패하면? 그건 고객들의 영혼이 아직 '깨달음(Enlightenment)'을 얻지 못한 탓이지, 실장님의 비전 문제는 아닙니다."


나는 교묘하게 덫을 놓았다.

물론 나도 내가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


그냥 이런 것들을 머리에 넣고 대사를 뱉어내고 있을 뿐.


예산 방어: 200억(공사비) -> 5천만 원(필터 개발비).

리스크 헷지: 실패하면 "미개한 대중 탓"으로 돌림.

허영심 충족: '오트 쿠튀르', '환생' 같은 단어로 두 사람의 뽕을 채워줌.


제니퍼가 무릎을 탁 쳤다.


"K! 바로 그거야! '데자뷔'! Philip, 어때요? 현실과 가상을 잇는 '영적 통로(Spiritual Gateway)'!"


곽필립은 잠시 턱을 괴고(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처럼), 뜨거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Pas mal (나쁘지 않네)... 거대한 궁전으로 가기 위한 '작은 오솔길'... 낭만적이군요. 좋아요. K, 자기가 '프로토타입(Prototype)'을 맡아요. 나는 파리의 영감을 좀 더 다듬을 테니."


긴 한숨을 쉬었다. 일단 급한 불은 꺼진 셈.




회의가 끝났다.

나는 나오자마자 유리벽에 붙어있던 양 과장의 결재 서류에 도장을 찍어줬다.


"본부장님! 안에서 무슨 굿판이 벌어진 겁니까? 제니퍼 상무님 표정이 무슨 성녀 잔 다르크 같던데요?"


"어, 양 과장. 우린 방금 200억을 아꼈어. 대신 네가 '귀족 필터' 마케팅 좀 해야겠다. 고객들이 사진 찍으면 얼굴에 '가상 가발' 씌워주는 거야."


"네? 가발요? 그게 뭡니까?"


"몰라. 그냥 '디지털 떼루아'래."


그날 오후. 제니퍼는 보고서에 이렇게 적었다.


[성과: AI 기반의 초개인화 영적 케어 서비스(Spiritual Care Service) 런칭 준비 완료]


곽필립은 창밖을 보며 "서울의 하늘은 캔버스가 작아..."라고 중얼거렸고, 박 대리는 자리에서 두통약을 먹으며 "상사는 미쳤고.. 논리는 죽었어..."라고 흐느꼈다.


나는 탕비실에서 믹스커피를 탔다. 현실은 급박하게 돌아가는데, 리더들은 구름 위에서 시를 쓰고 있다. 하지만 상관없다. 그들이 구름 위에서 똥을 싸든 시를 쓰든, 밑에서 우산만 잘 받치고 있으면 월급은 나오니까.


빌어먹을, 피에르가 몹시 보고 싶은 오전이다.



ps. 강 팀장의 파리지엥 헛소리 사전


디지털 떼루아 (Digital Terroir): 그냥 서버(Server)다.

뉘앙스 (Nuance): 데이터가 없을 때 하는 변명.

인셉션 (Inception): 고객한테 최면 걸어서 비싼 거 팔기.

오트 쿠튀르 (Haute Couture): 예산 많이 쓰고 싶다.

멜랑꼴리 (Melancholy): 일하기 싫다.





[당신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비전(Vision)'과 '망상(Delusion)'의 경곗값 곽필립의 '디지털 떼루아'는 누군가에겐 혁신적인 비전이지만, 실무자에겐 미친 망상입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모든 혁신은 처음엔 망상 취급을 받았습니다. 지금 당신의 리더가 뱉는 헛소리는 시대를 앞서간 통찰일까요, 아니면 책임지지 않을 몽상일까요? 그것을 구분하는 당신만의 기준(KPI)은 무엇입니까?


중간 관리자의 '통역(Translation)' 능력 강 팀장은 200억짜리 '베르사유 궁전'을 5천만 원짜리 '가발 필터'로 번역해 냈습니다. 위에서는 "우주를 정복하라"고 하고, 아래에서는 "우주선 연료가 없다"고 할 때, 당신은 "안 됩니다"라고 막아서는 벽(Wall)입니까, 아니면 현실적인 대안으로 바꿔주는 필터(Filter)입니까?


벌거벗은 임금님과 춤추는 법 제니퍼는 곽필립의 말이 헛소리임을 직감했지만, '트렌디한 임원'으로 남기 위해 기꺼이 공범이 되었습니다. (메소드 연기) 조직에서 '왕이 벌거벗었다'고 외치는 정직한 아이가 되는 게 맞을까요, 아니면 '옷감이 참 아름답습니다'라며 왕의 체면을 세워주는 재단사가 되는 게 맞을까요? 당신의 생존 전략은 어느 쪽입니까?

이전 19화인간 알고리즘 '링링'의 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