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8_ 브레이크와 액셀을 동시에 밟으면, 엔진이 비명을 지른다
피에르가 떠난 자리에, 상하이 지사의 전기톱 ‘링링(Ling-Ling)’이 배송되었다. 별명답게 깐깐해 보이는 날카로운 눈썹과 눈빛, 굳게 다문 입, 화장기 없는 창백한 얼굴.
화상회의로 몇 번 얼굴을 본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대면으로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역시나 싸늘한.
그녀는 캐리어를 끌고 회의실에 들어오자마자, 테이블 중앙에 디지털 타이머를 탁, 내려놓았다.
"강 팀장님. 제 시급과 여기 계신 분들의 시급을 합산하면, 이 회의는 분당 4,500원의 비용이 발생합니다. 잡담(Ice breaking)은 생략하죠. 숨 쉬는 것도 비용이니까."
그녀의 한국어는 완벽했지만, 억양(Intonation)이 없었다. 그리고 뭔가 명령어가 아닌 것 같으면서도 명령하는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랄까. 최달자 부장이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허! 야, 너는 숨도 가성비 따져가며 쉬니?"
링링은 대답 대신 타이머를 눌렀다.
[59:59]. 카운트다운 시작.
오늘의 미션. <유통기한 6개월 남은 악성 재고 5만 개 처리>
이 또한 오상무의 국내팀이 남긴 유산?이었지만,
이제는 우리 모두의 과제가 되었다.
유통기한 임박한 부진재고 5만 개라..
세 여자가 삼각형으로 앉았다. 나는 그 꼭짓점에서 관전했다. 이것은 회의가 아니라, 서로 다른 종교를 가진 신자들의 성전(Holy War)이었다.
[Round 1. 최달자의 '꽌시(Guanxi)']
최 부장이 먼저 낡은 수첩을 꺼냈다.
"내가 남대문 '김 회장'한테 전화 돌려놨어. 덤핑으로 넘기면 돼. 국내로 절대 넘어오지 않는 조건으로 말이지. 대신 김 회장네 둘째 아들 취직 자리 좀 알아봐 주고, 사우나 티켓 좀 끊어주면 깔끔해. 우리가 남이야?"
[Ling-Ling의 반격: 효율적 차원]
링링이 차갑게 끼어들었다.
"Objection(이의). 부장님의 방식은 '농경 사회' 시스템입니다."
"뭐? 농경? 아니 저기요, 킬링인지 링링인지.."
"그니깐, 밥 먹이고, 등 밀어주고, 청탁 들어주고. 그 시간 비용(Time Cost) 다 합치면 마진율 -15%입니다. 부장님은 장사를 하는 게 아니라, 자선사업을 하고 계십니다."
[Round 2. 링링의 '그로스 해킹(Growth Hacking)']
링링이 태블릿을 띄웠다.
"중국 틱톡(Douyin)에 태웁시다. 콘셉트는 '좀비 피부 소생술'. 유통기한 임박? 아니요. '숙성된 빈티지 앰플'입니다. 1시간 안에 5만 개 완판 보장합니다. 할인율 80% 때리면 현금 회전율 200% 나옵니다."
[Park의 반격: 규정]
조용히 있던 박 대리가 안경을 추켜올리며, 법령집을 링링 앞에 던졌다.
"Objection. 대리님 방식은 '범죄(Crime)'예요"
박 대리의 눈이 번뜩였다.
"'피부 소생'? 과대광고로 식약처 영업정지 3개월 감이구요, '숙성'? 이건.. 화장품법 위반이에요. 그리고 또 80% 할인? 저는 이런 숫자를 본 적이 없어요. 브랜드 가치 훼손으로 본사 감사팀에 호출됩니다. 저는 전과자가 되기 싫은데요."
세 여자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불꽃이 튀었다.
"박 대리님. 당신은 브레이크(Brake)만 밟고 있군요. 리스크(Risk)가 없으면 리턴(Return)도 없습니다.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급니까?"
링링이 무섭게 되받아쳤다
"구더기가 아니라 '식약처'가 무서운 거죠. 크로스보더로 판매하더라도, 분명 중국 국가약품감독관리국에서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링링 대리님이 더 잘 아시잖아요. 이건 차를 운전하는 게 아니라, 폭탄을 싣고 달리는 거라구요. 사고 나면 수습은 누가 하죠? 대리님의 그 '속도'가 우리를 벼랑 끝으로 밀고 있는 거예요."
"야, 중국댁! 장사는 숫자놀음이 아니야. 사람 마음을 사는 거지. 네가 말한 대로 팔고 튀면(Eat and Run), 그 손님들이 다시 우리 물건 사줄 것 같아?"
최부장이 거들며 나섰다.
"부장님. 마음은 펌프질 하는 장기일뿐입니다. 고객은 의리를 지키지 않습니다. '최저가'를 지킬 뿐이죠. 부장님의 그 '낭만'이 우리 회사를 적자로 만들고 있습니다."
링링도 지지 않고, 따박따박 AI 같은 음색으로 대꾸했다.
"부장님도 문제예요, '김 회장'과의 거래 내역, 그거 투명한 건가요? 사우나비, 밥값, 이거 법인카드로 처리하실 건가요? 저는 부장님의 그 '끈적한' 장부가 제일 불안해요. 횡령이슈가 될 수도 있다구요."
박대리의 화살이 이번엔 최부장에게로 날아갔다.
"뭐? 횡령? 야! 너 갑자기 뭐래는 거니? 이게 다 거래처 접대비 항목으로 처리 가능한 거 몰라? 누굴 지금 범죄자로 몰아!!!"
최부장의 얼굴이 기어코 붉게 달아올랐다. 그 얼굴에 대고 박대리가 한번 더 일침을 날렸다.
"솔직히 이거 국내팀에서 똥 싼 거 처리하느라 이러고 있는 거잖아요, 미리미리 처리들을 하셨어야죠"
"이게 진짜..."
더는 안 되겠다 싶어, 나는 4B 연필을 책상에 딱, 내리쳤다.
"그만!!! 다들 입 다물고 내 말 들어."
나는 화이트보드에 3개의 단어를 적었다.
김 회장 + 황실 비법 + 한정판 묶음
"링링. '좀비 소생'은 빼. 대신 '황실의 비법, 3년 숙성'으로 포장해 보자. 중국인들 스토리 좋아하잖아. 거짓말은 하지 마. 그냥 '오래됐다'는 걸 '숙성'이라고 우기자고."
링링이 입꼬리를 올렸다.
"Storytelling... 마케팅 비용 0원. 접수했습니다"
"박 대리. 그리고 너는 링링이 멘트를 검수해. 법적 문제 피해 갈 단어로 교체하자고. 그리고 80% 할인은 절대 안 돼. 대신 '1+4 미스터리 박스'로 팔자. 덤핑이 아니라 '이벤트'로 포장하자고"
박 대리가 계산기를 두드렸다.
"우회 상장 같은 논리군요. 법적 책임 회피 가능합니다. 수용할게요."
"그리고 최 부장님."
최 부장이 씩씩대며 나를 봤다.
"이거 물량 터지면 본사 물류 마비됩니다. 남대문 김 회장님 창고 빌리세요. 그리고 그 '취직 부탁'한 둘째 아들, 이번 포장 알바로 쓰시죠. 일당 쳐서 주면 청탁도 아니고, 뭐 일종의 '고용 창출'이잖아요."
최 부장의 표정이 풀렸다.
"거 봐! 결국 내가 나서야 된다니까! 그 아들놈 손은 빨라."
일주일 뒤.
5만 개는 43분 만에 완판 되었다.
링링의 속도, 박 대리의 방어, 최 부장의 네트워크가 만들어낸, 기괴하고도 완벽한 승리였다.
회식 자리. 삼겹살집.
여전히 그들은 섞이지 않았다.
링링은 고기 굽는 시간을 타이머로 재고 있었고, 박 대리는 탄 부분의 발암물질을 가위로 잘라내고 있었으며, 최 부장은 말없이 소주에 고추를 썰어 넣고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이건 화합이 아니라 담합이다.
서로를 경멸하지만, 혼자서는 살아남을 수 없기에 손을 잡은 비즈니스의 민낯.
링링이 구워진 고기를 내 접시에 올리며 말했다.
"팀장님. 적당히 익었습니다. 드시죠."
"그래. 땡큐."
나는 고기를 씹었다. 육즙이 터졌다.
맛있다.
비릿한 욕망과 차가운 계산, 그리고 쉰내 나는 의리가 섞인... 아주 자본주의적인 맛.
피에르가 있었으면 "오! 이것은 부조리극의 맛이군요!"라고 했겠지만, 지금은 아무도 웃지 않는다. 우리는 그저 씹고, 삼킬 뿐이다. 다음 달 실적을 위해서.
빌어먹을, 고기 씹기 딱 좋은 밤이다.
당신은 누구의 말이 맞다고 생각합니까? 사람 냄새나는 최 부장, 법을 지키는 박 대리, 돈을 버는 링링. 회사가 위기일 때, 당신은 누구에게 운전대를 맡기시겠습니까?
정의(Justice)와 이익(Profit) 사이 '숙성된 앰플'은 마케팅일까요, 사기일까요? 비즈니스에서 '윤리적 융통성'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요?
싫어하는 사람과 춤추는 법 : 강 팀장은 서로 싫어하는 세 사람을 억지로 화해시키지 않았습니다. 그저 각자의 무기를 결합했을 뿐입니다. 당신은 동료를 '친구'로 만듭니까, 아니면 '도구'로 씁니까? 무엇이 옳은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