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6_ 우아한 갑질에는 우아한 헛소리로
청담동 S백화점 본사 미팅룸. 이곳의 공기는 사무실과 달랐다.
'조 말론' 디퓨저 향기와 '자본주의의 냉기'가 5:5 비율로 섞인 냄새.
테이블 맞은편에는 29세의 MD, 김성빈 대리가 앉아 있었다. 아이비리그 출신, 5:5 가르마, 그리고 손에는 몽블랑 만년필 대신 아이패드 프로. 그는 우리를 보지 않았다. 정확히는 우리 [국내 영업팀]의 행색을 스캔한 뒤, 시신경에서 '삭제'한 것 같았다.
"저기, 김 대리님. 우리 재계약 건 말인데..."
최달자 부장이 입을 열었다. 그녀의 손에는 붉은색 보자기(뇌물 아님, 그냥 떡임)가 들려 있었다.
김 대리가 아이패드를 툭, 덮었다.
"부장님. '톤 앤 매너(Tone & Manner)' 아시죠?"
"톤... 뭐?"
"저희 백화점 1층은 '럭셔리 앤 컨템퍼러리'입니다. 근데 부장님네 브랜드는... 좀, '남대문 앤 할머니' 같아요. 아시겠어요? 핏(Fit)이 안 맞아요."
그는 손가락으로 테이블 위의 먼지를 털어냈다. 마치 최 부장의 존재를 털어내듯이.
"아니, 그래도 우리 매출이 작년에 20억인데..."
최 부장이 울컥하며 붉은 보자기를 풀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시루떡.
"이거 우리 동네 명인이 만든 거야. 일단 좀 들면서 얘기해. 사람이 정(情)이 있어야지."
그녀가 떡을 김 대리 앞으로 밀었다. 콩가루가 크리스털 테이블 위에 후두둑 떨어졌다.
김 대리의 눈썹이 꿈틀 했다. 그는 혐오스러운 벌레를 보듯 콩가루를 응시했다.
"부장님. 여기 5일장 아녜요, 그리고 저희는 데이터로 말합니다."
그가 화면을 띄웠다. 빨간색 하락 그래프.
"보세요. 2030 트래픽 제로(0). 구매 고객 평균 연령 58세. 이게 뭘 의미하는지 아세요? '고인 물 브랜드'라는 거예요. 저희는 다음 개편 때 뺄 예정입니다. 방(Room) 빼주세요."
최 부장의 얼굴이 떡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양 과장이 잽싸게 끼어들었다.
"아이고, 김 대리님! 그래도 저희가 지난 6년간 의리가 있는데! 제가 오늘 저녁에 청담동 오마카세도 예약해 놨거든요..."
"양 과장님. 저 생선 비려서 안 먹고요. 그리고 김영란법 아시죠? 이런 거 녹취되면 곤란합니다."
김 대리는 자신의 애플워치를 톡톡 두드렸다.
"미팅 끝내죠. 저 다음 스케줄이 '르 라보(Le Labo)' 미팅이라."
최 부장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25년 영업 인생이, 새파란 애송이의 '애플워치' 앞에서 부정당했다. 그녀가 욕설을 뱉으려는 찰나.
"Oh-Là-Là! (세상에!)"
구석에 있던 피에르(Pierre)가 비명을 질렀다.
피에르가 김 대리의 넥타이를 가리키며 다가갔다.
"실례합니다. 그 넥타이 패턴... 혹시 1998년 '에르메스(Hermès) 빈티지 아카이브' 컬렉션 아닙니까?"
김 대리의 동공이 흔들렸다. 사실 그건 그냥 시즌 지난 아웃렛 상품일 확률이 높다. 하지만 '명품'을 알아보는 척해주는 건, 허영심 많은 갑(甲)에게 최고의 마약이다.
"어... 아시네요? 이거 구하기 힘든 건데." (100% 거짓말이다.)
김 대리의 목소리가 한 톤 부드러워졌다.
피에르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최 부장의 '시루떡'을 우아하게 집어 들었다.
"김 대리님은 안목이 있으시군요. 그렇다면 이 브랜드의 가치도 아시겠네요. 이것은 '올드(Old)'한 게 아닙니다. '헤리티지(Heritage)'입니다."
"헤... 리티지요?"
나는 이때다 싶어 끼어들었다. 내 주특기인 '있어 보이는 헛소리'를 시전 할 타이밍이다.
"그렇습니다, 김 대리님. 프랑스 파리에서는 지금 'K-Grandma Core (할머니 룩)'가 트렌드인 거 아시죠?"
김 대리의 눈이 커졌다. 모르는 눈치다. 하지만 아는 척해야 한다. 그는 힙(Hip) 해야 하니까.
"아... 그, 그랜마 코어... 알죠. 핫하죠."
"최 부장님은 단순한 영업 사원이 아닙니다. 25년간 한국의 뷰티 아카이브를 지켜온 '살아있는 장인'이십니다. 저희가 이번에 백화점 1층 팝업 콘셉트를 잡았습니다. 이름하여..."
나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내뱉었다.
<SEOUL 1988: The Original Heritage>
"이 시루떡도 그냥 떡이 아닙니다. 'Gluten-Free Steamed Rice Cake with Organic Bean Powder'. 비건 푸드죠."
피에르가 옆에서 불어로 추임새를 넣었다.
"C'est Magnifique! (아름다워요!) 파리 샹젤리제 거리 냄새가 납니다!" (사실 콩가루 냄새다.)
김 대리는 혼란스러워 보였다. 촌스러운 아줌마가 갑자기 '장인'으로 보이고, 콩가루 날리는 떡이 '비건 푸드'로 보이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파리 트렌드'라는 말에 그의 사대주의 버튼이 눌렸다. 굳이 국내 영업팀 외근에 따라오더니, 피에르가 한 건 했다.
"흐음... 그랜마 코어라... 스토리는 좀 되네요."
그는 아이패드를 다시 열었다.
30분 뒤. 백화점을 나오는 길. 우리는 퇴출 대신 '팝업 스토어 1개월 연장' 계약서를 따냈다. 조건은 하나였다. 최 부장이 매장에서 '개량 한복'을 입고 직접 시연할 것. 김 대리는 그걸 "퍼포먼스 아트"라고 불렀다.
"미친놈들... 내가 기생이야? 한복을 입게?"
최 부장이 담배를 입에 물며 욕을 씹어 뱉었다. 하지만 그녀의 손에 들린 계약서는 구겨지지 않게 소중히 쥐여 있었다.
"부장님. 한복이 아니라 '아방가르드 워크웨어'라고 생각하시죠."
내가 라이터 불을 붙여드렸다.
"그리고 떡은 다시 가져가시죠. 김 대리는 '글루텐 프리' 싫어한답니다."
양 과장이 눈치 없이 시루떡 상자를 챙겼다. 최 부장은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강 팀장님. 너 말이야. 사기꾼 기질이 다분해. 오 상무보다 더한 놈이야."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우리는 백화점 앞 벤치에 앉아, 남은 시루떡을 나눠 먹었다. 청담동 명품 거리의 화려한 네온사인 아래서, 콩가루를 입가에 묻힌 채 우걱우걱. 지나가는 사람들이 우리를 쳐다봤다.
잠시 후 피에르가 해맑게 웃으며 다가왔다.
"팀장님, 이 떡... 정말 '힙(Hip)'한 맛이네요."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넥타이를 풀었다. 비즈니스란 결국 포장지 싸움이다. 똥도 에르메스 박스에 담으면 '오가닉 퍼틸라이저(Fertilizer)'가 되는 세상이니까 ㅋ
하지만 목이 메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 뻑뻑한 떡이, 꼭 우리네 인생 같아서.
'Old'와 'Classic'의 차이
당신이 가진 촌스러운 습관이나 물건들. 누군가는 그것을 비웃지만, 누군가는 '헤리티지'라고 부릅니다. 그 차이를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요? 본질일까요, 아니면 스토리텔링(말발)일까요?
갑(甲)을 이기는 법
논리로 무장한 갑에게, 논리로 맞서는 건 하수입니다. 강 팀장처럼 그들의 '허영심'과 '불안(트렌드에 뒤처질까 봐)'을 자극해 본 적 있습니까?
굴욕을 견디는 힘
최 부장은 한복을 입는 굴욕을 감수하고 계약서를 지켰습니다. 당신은 자존심과 실리(돈)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