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게트가 떠난 자리에 남은 부스러기

ep.17_ 윤활유는 마르고, 부품들의 비명은 시작되고

by 김멀똑


11층 임원실. 이곳은 산소가 희박하다. 제니퍼(Jennifer)가 뿜어내는 '성과 압박' 때문이다.


그녀의 책상 위에는 내가 올린 '통합 조직 운영안'이 놓여 있었다. 그녀의 몽블랑 만년필이 내 기획안의 목덜미를 툭툭치고 있었다.


"K. 이거 너무... '오가닉(Organic)'하잖아."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지금 '안정화'를 원하는 게 아니에요. '퀀텀 점프(Quantum Jump)'를 원한다고. 물리적 도약. 오 상무가 남긴 구태의연한 국내 조직을 K가 해체해서, 글로벌 스탠다드로 재조립하길 바랐는데. 이건 그냥... '비빔밥'이잖아요?"

"상무님, 물리적으로 도약하려면 무릎을 굽히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제 막 섞이기 시작했습니다."

"Time is Money. 아니, Time is Life. 다음 주까지 '가시적 성과(Visible Outcome)' 가져와요. 매출이든, 혁신안이든. 임팩트(Impact) 없는 통합은, 그냥 비효율의 덩어리일 뿐이니까."


그녀는 축객령을 내리듯 아이맥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알았다.


그녀가 말하는 '퀀텀 점프'란, 낙하산 없이 절벽에서 뛰어내리라는(Bungee Jump) 소리라는 것을.




사무실로 돌아오니, 진짜 위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피에르(Pierre)가 짐을 싸고 있었다. 파리 본사 복귀 명령. 우리의 '인간 완충재'가 사라지는 날이다.


"Oh, Teamjang-nim. 저의 'K-인턴' 생활은 아주 판타스틱했습니다."


피에르가 해맑게 웃으며 트렌치코트 깃을 세웠다.

문제는 그 뒤였다. 피에르가 짐을 싸는 동안, 사무실의 공기가 급격히 뻑뻑해졌다.


평소라면 최 부장과 박 대리가 충돌할 때, 피에르가 "오! 이것은 신구의 조화!"라며 헛소리로 막아줬을 것이다. 양 과장이 나대면, 피에르가 "양 과장님은 현대판 환관입니까?"라는 순수한 질문으로 제압해 줬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없자, 소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최 부장: (헤드폰을 벗으며) "야, 박 대리. 너 내 엑셀 수식 건드렸냐? 왜 합계가 안 맞아?"

박 대리: (안경을 추켜올리며) "부장님 수식이 1990년대 방식이라 '순환 참조' 오류가 나서 수정했습니다. 감사 인사는 메일로 받겠습니다."

양 과장: (나에게 귓속말) "본부장님, 보셨죠? 박 대리 쟤는 위아래가 없어요. 제가 군기 좀 잡을까요?"

끼이익- 턱. 끼이익- 턱.


윤활유가 빠진 기계들이 서로의 톱니를 갈아대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제니퍼는 '퀀텀 점프'를 하라는데, 이 고물차는 시동 걸다 폭발하게 생겼다.




나는 피에르의 송별회 장소인 을지로 '만선호프' 구석에 앉아, 맥주잔을 응시했다.


리더십이란 대체 무엇인가.

앞에서 "나를 따르라"고 깃발을 드는 것? 아니다. 그건 초보나 하는 짓이다.

진짜 리더십은 '욕망의 거래(Trade of Desire)'다.


팀원들은 각자 원하는 것이 다르다. 나는 오 상무가 남겨준 낡은 수첩과 내 관찰 일지를 조합해 머릿속으로 전략을 짰다.



1. 최달자 부장 (욕망: 인정욕구 & 자존심) 그녀는 자신이 '뒷방 늙은이' 취급받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다. 그녀에겐 돈보다 '가오(Face)'가 필요하다.

2. 양세찬 과장 (욕망: 권력 & 줄 서기) 그는 차기 팀장이 되고 싶어 안달이 났다. 그에게 필요한 건 '완장(Armband)'이다.

3. 박다혜 대리 (욕망: 완벽함 & 효율) 그녀는 비논리적인 업무 지시를 혐오한다. 그녀에겐 '정답(Answer)'과 '칼퇴'가 필요하다.



피에르가 떠나면, 내가 직접 이 욕망들을 배선(Wiring) 해야 한다. 나는 잔을 내려놓고, '마지막 작전'을 시작했다.


"자, 주목."


나는 마른안주를 씹으며 입을 열었다.


"피에르가 떠나면서 나한테 부탁한 게 하나 있다. 본사에 가서 우리 팀 자랑을 하고 싶은데, 뭔가 '임팩트' 있는 게 없어서 아쉽다더군."


피에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Pardon? 저는 그런 말..."


내가 피에르의 발을 테이블 밑으로 걷어찼다. 눈치 챙겨라.


"아...! Oui! 맞습니다! 저는 'Legend'를 원합니다!"


나는 팀원들을 둘러봤다.


"최 부장님. 이번 제니퍼 상무가 지시한 '통합 매출 프로젝트'. 이거 솔직히 박 대리 데이터만으론 답 안 나옵니다. 부장님의 그 '동물적인 감각' 아니면 해결 못 합니다. 피에르가 파리 가서 '한국의 샤먼 마케팅' 자랑 좀 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최 부장의 콧구멍이 벌름거렸다. '샤먼'은 거슬리지만 '동물적 감각'이라는 말에 꽂혔다.)


"양 과장. 이번 프로젝트 실무 총괄을 해줘. 이번 프로젝트 성공하면, 내가 인사팀에 '차세대 리더 육성 대상자'로 이름 올려줄게. 최 부장님 보필 잘하고." (양 과장의 눈에서 레이저가 나왔다. 그는 이미 마음속으로 명함을 새로 팠다.)


"박 대리는 이 프로젝트의 '감사(Auditor)'야. 최 부장님과 양 과장이 벌려놓은 일들, 데이터로 검증해서 비효율적인 거 다 쳐내. 소피아, 네 말만 믿을게." (박 대리가 안경을 고쳐 썼다. '합법적으로 꼰대들을 지적할 권한'을 얻었으니, 그녀는 신이 났다.)




피에르는 떠났다.

그가 남긴 선물들은 각자의 책상 위에 놓였다.


최부장에게는 프랑스 원어판 어린 왕자,

양 과장에게는 공주풍의 앤티크 손거울,

박대리에게는 거꾸로 흐르는 모래시계,

그리고 나에게는 오피넬 나이프.


어떤 은유와 메시지가 있는지, 설명을 들었던 것 같은데, 술기운이 깊어졌는지.. 통 기억나질 않는다.


다음 날 아침. 사무실은 전쟁터였다. 하지만 '소모적인 내전'이 아니라, '목적 있는 전쟁'이었다.


"양 과장! 내가 김 회장 만나서 물량 텄으니까, 박 대리한테 넘겨서 전산 입력해!"

"넵! 부장님! 박 대리, 들었지? 빨리 쳐! 내가 본부장님께 바로 보고하게!"

"양 과장님, 데이터 양식 틀렸습니다. 다시 가져오세요. 반려합니다."


제니퍼가 원하던 '퀀텀 점프'가 될지, '추락'이 될지는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멈춰있던 엔진은 돌아가기 시작했다. 욕망이라는 더러운 연료를 태우면서.


나는 피에르가 선물로 주고 간 낡은 '오피넬 나이프'로 연필을 깎았다.

낭만은 떠났다.


칼춤 추기 좋은 계절이 다가온다.





[당신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당신의 팀원은 무엇에 굶주려 있습니까? 돈? 명예? 아니면 단순한 '인정'? 때로 리더는 팀원의 배고픔(결핍)을 정확히 진단하고, 그에 맞는 먹이(동기부여)를 던져주는 사육사가 되어야 합니다. 당신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불편한 동거의 기술 : 서로 싫어하는 팀원들을 화해시키는 것이 중요할까요? 대신 그들이 서로를 이용하게 만드는 게 중요할까요? 박 대리가 양 과장을 '데이터 셔틀'로 쓰고, 양 과장이 박 대리를 '성과 포장지'로 쓰게 만드는 것. 그것이 프로의 팀워크인가요? 당신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제니퍼(임원)의 언어 번역 임원이 "혁신해라"고 말할 때, 그것은 "기존 방식 다 엎어라"는 뜻일까요, 아니면 "숫자만 맞춰오라"는 뜻일까요? 그 의중을 정확히 읽어내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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