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5_ 늙은 호랑이는 입을 닫고, 젊은 뱀은 뒷문을 연다
오 상무가 떠난 사무실.
파티션 너머 국내 영업 조직은 절간처럼 고요했다.
최달자 부장은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을 쓴 채, 모니터 속의 슬랙(Slack) 창만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은 피아니스트처럼 우아하고 빠르게 키보드를 두드렸다.
5년 전만 해도, 저 자리는 가장 시끄러운 곳이었다. 당시 대리였던 나와 과장이었던 최달자 선배. 우리는 사내에서 '남대문의 미친개와 조련사'로 불리는 환상의 콤비였다. 그녀가 시장통을 휘젓고 오면, 나는 그녀의 헝클어진 영수증과 계약서를 완벽한 보고서로 정리했다. 우리는 밤새 소맥을 말아 마시며 "이 회사를 우리가 접수하자"라고 낄낄거렸다.
하지만 3년 전, 그날이 모든 것을 바꿨다. 국내 2 팀장 발표 날. 오 상무는 나를 불렀다.
"강 팀장, 미안하게 됐다. 달자가 실적은 더 좋은데... 알잖아. 남대문 바닥에서 여자가 리더 달면 도매상 영감들이 말 안 듣는 거. 네가 총대 메라."
그날 이후, 최 선배는 내게 소맥을 말아주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헤드폰을 썼고, 입을 닫았고, 밥을 따로 먹었다. 그녀의 침묵은 나에 대한 시위가 아니었다.
자신의 성과를 '성별'로 퉁쳐버린 이 빌어먹을 시스템에 대한 '무기한 묵언 파업'이었다.
국내 영업 조직은 조용했지만, 눈빛들은 초점을 잃었고, 사기는 바닥이었다.
"오 상무님은 안타깝게 되었습니다, 회사에서도 몹시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구요"
양 과장을 제외하고는 또렷한 눈으로 나를 응시하는 이가 없었다. 절반은 멍하니, 절반은 고갤 숙이고 핸드폰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뭐... 우리는 성과를 내야 하는 조직이니,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각 파트별 현황은 준비되는 대로 보고해 주세요"
팀원들의 반응은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고, 조금씩 천천히 수습해 가면 되겠다 생각했다.
"팀장님. 아, 이제 본부장님이라고 불러야죠? 하하, 모닝커피 내렸습니다. 게이샤 원두입니다."
양세찬 과장. 30대 중반, 깔끔한 포마드 헤어, 셔츠 소매를 정확히 두 번 걷어 올린 남자. 그는 국내팀의 실세이자, 전형적인 '스마트한 젊은 꼰대'다. 그는 최 부장의 침묵을 틈타, 아주 자연스럽게 내 책상 앞으로 의자를 끌어당겼다.
그가 내민 커피에서는 산미 가득한 향기가 났다. 하지만 그의 미소에서는 비릿한 욕망의 냄새가 났다.
양 과장이 태블릿 PC를 내밀었다.
"본부장님. 최 부장님이랑은... 소통이 조금 어려우시죠? 옛날 분이라 변화 충격이 크신 거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실무진 차원에서 '통합 데이터 폴더'를 따로 팠습니다."
화면에는 <국내 영업팀 1급 기밀: 도매상 리스트 & 리베이트 내역>이라는 폴더가 떠 있었다. 그것은 최 부장이 25년 동안 목숨처럼 지켜온 '영업비밀'이었다.
"최 부장님 결재 기다리다가는 속 터지실 것 같아서요. 제가 '관리자 권한'으로 본부장님 계정 열어뒀습니다. 그냥 들어오셔서 보시면 됩니다."
양 과장은 능글맞게 웃었다.
말은 '업무 효율'이지만, 본질은 '하극상'이다. 그는 최 부장을 '뒷방 늙은이'로 만들고, 이 데이터를 제물로 이 팀의 실세가 되겠다는 선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 냄새를 맡은 피에르(Pierre)가 불쑥 끼어들었다.
"Bonjour! 양 과장님! 오, 그 화면은 뭡니까? 아주 컬러풀한 엑셀이군요!"
양 과장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는 피에르를 보며 혀를 쯧, 찼다.
"피에르. 상급자가 보고 중일 땐 끼어드는 거 아닙니다. 프랑스엔 위아래 없어요? 그리고 셔츠 깃 좀 제대로 해요. 회사 놀러 왔어?"
전형적인 '젊꼰'의 화법. 피에르는 당황했다.
"Pardon? 저는 단지 데이터의 미학을..."
"미학은 루브르 가서 찾으시고. 가서 복사나 해오세요."
그 순간. 건너편 최 부장의 타자 소리가 뚝, 멈췄다. 그녀가 헤드폰을 벗지 않은 채, 모니터 너머로 양 과장의 뒤통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무표정한 눈빛. 하지만 나는 보았다. 그녀의 왼손 검지가 [Enter] 키를 망치처럼 내리찍는 것을.
띠링-!
나와 양 과장의 태블릿에서 알림이 울렸다.
[System] 최달자 님이 '1급 기밀' 폴더의 접근 권한을 '비공개'로 변경했습니다.
[System] 최달자 님이 양세찬 님의 '관리자 권한'을 박탈했습니다.
화면에 떠 있던 데이터가 순식간에 회색으로 잠겼다.
[Access Denied]
양 과장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어? 어? 아니... 이거 화면이... 자, 잠시만요..."
최 부장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철저한 무시. 그것은 "양과장아, 내 머릿속에 있는 원천 소스 없이는, 너는 그냥 껍데기야"라는 무언의 참 교육이었다.
양 과장은 식은땀을 흘리며 태블릿을 두드렸다.
"아... 본부장님, 이게 지금.. 잠시 서버 오류인가 봅니다. 최 부장님이 기계를 잘 못 다루셔서... 뭔가 잘못 누르신 거 같은데, 제가 가서 바로 풀겠습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나는 조용히 내 책상 위의 4B 연필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양 과장의 태블릿 화면을 연필 끝으로 툭, 쳤다.
"앉아봐, 양 과장."
양 과장이 엉거주춤 멈췄다. 나는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는 유능하다. 빠르고, 스마트하고, 야망이 있어서 시키지 않은 일도 해온다. 리더 입장에서 이런 부하직원은 마약 같다. 쓰면 편하니까. 하지만 지금 그는 선을 넘었다. 주인의 허락 없이 곶감을 빼먹으려 했다.
"당신, 일 처리 빠릿빠릿한 건 좋은데."
나는 연필을 돌리며 말했다.
"소스(Source)가 없잖아. 껍데기만 가져오면 어떡하나? 이 데이터의 원천 관리자가 누구야?"
양 과장의 동공이 흔들렸다.
"... 최 부장님이십니다."
"그럼 최 부장님 '최종 승인(Approval)' 도장받아와. 뒷문으로 들어온 데이터 말고, 나는 장물 취급 안 한다."
양 과장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자신이 '차기 실세'로 인정받는 대신, '절도범' 취급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하나 더."
나는 피에르를 턱으로 가리켰다.
"우리 팀원한테 복사시키지 마. 쟤는 복사할 줄 몰라. 대신 철학을 하니까, 니가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보고."
양 과장은 꼬리를 내리고 최 부장의 자리로 걸어갔다.
"부장님... 저기... 권한 좀..."
최 부장은 들은 척도 안 했다. 그녀의 모니터에는 [집중 모드] 아이콘이 떠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탕비실로 향했다. 양 과장이 사 온 게이샤 원두는 건드리지 않았다. 대신 구석에 박혀있던 '노란색 믹스커피'를 두 잔 탔다. 물 양은 종이컵 로고 윗선까지. 얼음 딱 두 알. 5년 전, 나와 최 선배가 야근할 때마다 마시던 그 비율이다.
나는 최 부장의 책상 위에 믹스커피를 툭, 올려두었다. 그리고 슬랙(Slack)을 보냈다.
[나]: (사진 전송: 양 과장이 쩔쩔매는 뒷모습)
[나]: 선배님. 애들 교육 좀 시켜주세요. 저한테 바로 오지 말고, 선배님 거쳐서 오라고 했습니다. 커피 식습니다.
30초 뒤. 최 부장의 타자 소리가 멈췄다. 그녀는 헤드폰을 벗지 않은 채, 믹스커피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나를 보지 않고, 모니터를 보며 아주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띠링-!
[System] 최달자 님이 '공유 폴더' 접근 권한을 복구했습니다.
[Slack] 최달자 부장: (선글라스 낀 오리 이모티콘)... 양 과장, 내 방(메신저 대화방)으로 와. 털리기 싫으면.
피에르가 내 옆에서 감탄하며 속삭였다.
"Mon Dieu! 팀장님은 마키아벨리입니까? 킹메이커(Kingmaker)입니까?"
"나는 그냥 월급 받는 소설쟁이? ㅋ."
나는 내 몫의 믹스커피를 들이켰다. 달달하고 텁텁하다. 양 과장은 앞으로도 내 자리를 노릴 것이고, 최 부장은 수시로 삐져서 문을 잠글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오늘, 서열 정리는 끝났다.
지금 왕은 최달자다. 나는 그 왕을 이용하는 간신(?)이고.
그리고 양 과장은...
아직은 뱀..
어쩌면 지렁이?
뭐, 오늘도 고단한 하루구만.
야망 있는 이인자 다루기
능력은 출중하지만 호시탐탐 당신의 자리를(혹은 당신 상사의 자리를) 넘보는 부하직원. 당신은 그를 쳐내겠습니까, 아니면 그의 욕망을 이용하겠습니까?
젊은 꼰대의 탄생
"나 때는 안 그랬는데" 보다 무서운 게 "요즘 애들은 개념이 없어"라며 효율을 핑계로 군기를 잡는 젊은 상사입니다. 당신은 양 과장 같은 동료를 어떻게 대처합니까? 뭐라고 하면서도 동시에 그를 이용하고 있나요? 조직의 위계를 위해?
리더의 의리
강 팀장은 편한 길(양 과장) 대신 불편한 길(최 부장)을 택했습니다. 조직 관리에서 '의리'는 비효율일까요, 아니면 가장 강력한 리스크 관리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