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서울, 승리한 자들의 장례식

ep.14_ 조직의 역동, 25년의 세월과 종이 한 장.

by 김멀똑

도쿄에서의 성취감은 인천공항 입국장을 빠져나오는 순간 증발했다.

핸드폰을 켜자마자 부재중 전화가 십여 통 와 있었다.

동기들의 전화, 그리고 문자들.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오상무 아웃, 국내 영업조직 통폐합'

'너는 괜찮은 거냐'

'승진하는 거?'

'오상무랑 친했잖아, 어떻게 된 거임?'



출장 복귀 첫날.


사무실 문을 열자마자 낯선 풍경이 펼쳐졌다.

파티션의 높이가 미묘하게 달라졌고, 복도에는 파쇄기 돌아가는 소리만 요란했다.


인사팀장이 지나가며 내 어깨를 툭 쳤다. 눈은 웃고 있었지만, 입꼬리는 경직되어 있었다.


“강 팀장님, 오셨어요? 고생 많으셨네. 짐 풀고 바로 임원실로 가보세요. 조 상무님이 찾으십니다.”


11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임원실 문이 열렸다.


조 상무(Jennifer)는 창밖을 보고 있었다.


그녀의 책상 위에는 몽블랑 만년필 대신, 두툼한 조직 개편안 서류가 놓여 있었다.

그녀가 뒤를 돌았다. 승리자의 얼굴이었다.


“Welcome back, K. 보고서는 봤어요. 일본 건까지 해낼 줄은 몰랐네. 역시 우리 팀 에이스야.”


칭찬인데, 온도가 낮았다. 그녀는 자리에 앉으라는 말도 없이 본론을 꺼냈다.


“회사가 어려워요. 이번 분기 영업이익률 방어가 최우선 과제(Top Priority)가 됐어요. 그래서 조직을 좀 슬림하게 가져가기로 했어요.”

“슬림하게… 라면?”

“국내 영업팀을 우리가 통합하기로 했어요. 그리고 통합 팀장은 K가 맡게 됐구요. 워낙 급하게 움직이는 바람에 미리 얘길 못했어요, 아직은.. 승진은 아니라.”


머릿속이 하얘졌다. 통합? 그건 명분일 뿐이다.


“그럼 오상무 님.. ”

"뭐, 이 바닥이 그렇잖아요, 임원이야, 발령이 나면 그 즉시 자리를 빼는 게.."


대략 얘기는 들었지만,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오상무와 지낸 시간들, 사건들을 떠올렸다..


"오상무 님과 친했던 거 알아요, K. 아마 오늘까지 출근이실 거 같은데, 인사라도 드리지 그래요?"

"네, 그래야죠"


돌아서는 뒤통수에 조상무가 넌지시 말했다.


"K, 시간이 별로 없어요, 출장 복귀하자마자 미안한데, 국내팀.. 손봐야 할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니에요, 서둘러주면 좋겠고"

"네, 알겠습니다"


국내팀은, 작년에 그만둔 최팀장 이후 공석이라 오상무가 직접 핸들링하며 끌고 왔었는데, 본사에선 결국 영업조직을 하나로 통합시키라는 주문을 내린 모양이다. 현장에서 구르며 25년간 잔뼈가 굵은 오상무가 드디어 아웃이 되고, 현장은 전혀 모르는 컨설턴트 출신인 조상무가 드디어 전체를 총괄하게 되는구나. 나는 얼마나 이 조직에 붙어 있을 수 있을까.


우선은 급한 불을 끄고 수습을 하고 나면,

그다음 차례는.. 이제 나인가..




오 상무는 짐을 싸고 있지 않았다. 이미 짐들은 정리가 되어 방 안은 텅 비어 있었다.


그는 최고급 자사호(차 주전자)에 보이차를 우리고 있었다. 방 안에는 은은한 차 향기와 클래식 FM의 선율이 흐르고 있었다. 탁자에는 프리드리히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놓여 있었다.


문득, 어이없는 웃음이 터졌다. 아니, 이 시국에 니체라니..


"아니 상무님.."

“왔냐, 강팀장. 일본은 잘했다며, 보고서 봤다”


그의 목소리는 너무나 맑았다.

지난 25년간 회식 자리에서 보여줬던 그 걸걸하고 혀 꼬인 목소리는 온데간데없었다.

안경 너머의 눈빛은 면도날처럼 예리했다.


“상무님… 괜찮으신 거죠?”


그가 피식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진혁이 너는 그동안 내가 진짜 술꾼인 줄 알았던 건 아니지?”

"뭐 대충 알고는 있었어요.."


그는 책상 서랍에서 두툼한 수첩 하나를 꺼내 던졌다.


“지난 25년 동안, 내가 마신 술은 1리터도 안 될 거다. 회식 자리? 접대? 그거 다 연기야. 메소드 연기.


나는 수첩을 펼쳤다. 그곳에는 바이어들의 약점, 조 상무의 비자금 의심 내역, 사장의 내연녀 정보까지… 회사의 모든 치부가 깨알 같은 글씨로 적혀 있었다. 알코올에 뇌가 절여진 사람은 절대 쓸 수 없는, 정교한 ‘복수 노트’였다.


“물수건.”


그가 짧게 말했다.


“술 마시는 척하다가 뜨거운 물수건에 뱉어내고, 화장실 가서 가글 하고. 그렇게 버틴 25년이다. 맨 정신으로는 그 더러운 놈들 비위를 못 맞추니까, ‘미친개’ 코스프레를 한 거지.”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그는 알코올 중독자가 아니었다. 그는 이 미친 회사에서 유일하게 맨 정신(Sober)을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 광대(Clown)가 된 지식인이었다.


“억울하지 않으십니까? 토사구팽이잖아요.”

“억울? 아니, 뭐 할 만큼 했어...”


그는 니체의 책을 가방에 넣으며, 정말로 후련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이제야 내 직업을 찾으러 간다. 청소부 노릇은 끝났어.”

“무슨 사업하시게요?”

“사업은 무슨. 시(Poetry) 쓸 거다.”


그는 소년처럼 웃었다.


“세금계산서랑 경위서 말고, 진짜 문장. ‘신은 죽었다’는데 사장이 대수냐? 나는 이제 내 세상의 신이 되러 간다. 크크”


그는 빈 보이차 잔을 씻어두고, 가방 하나만 달랑 멘 채 일어섰다.


“강 팀장, 너는 영리한 놈이니까 잘 버티겠지. 근데, 너무 오래 연기하지는 마라. 가면이 얼굴 가죽에 들러붙으면, 그때는 진짜 네 얼굴이 기억 안 날 테니까, 그리고 제니퍼.. 너무 믿지 마. 아, 그리고 그 수첩은 버리던지 잘 간직하던지..”


그는 비틀거리는 척도, 소주를 찾는 척도 하지 않고, 아주 우아하고 곧은 걸음으로 사무실을 나갔다.

25년의 연극이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오상무는 그렇게 내 앞에서 사라졌다.

순간이라 너무도 비현실적인 눈앞의 상황이라니.


때로는 원망하고, 때로는 의지가 되었던 선배이자 상사가 이제 완벽히 사라졌다.

이제 남은 것은, 논리와 무속으로 가득한 나이 어린 상사와 30명에 가까운 문제 투성이 팀원들과 무시무시한 매출목표뿐.


그야말로 소설적 상상력이 필요한 순간이다.




[당신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당신의 오 상무는 누구입니까? 힘들 때 욕하면서도 의지했던 상사, 나의 실수를 덮어주던 ‘어른’이 당신의 조직에 있습니까? 아니면, 존경할 어른은 사라지고 ‘관리자’와 ‘감시자’만 남은 삭막한 정글에 남겨져 있습니까?


떠나는 자의 뒷모습 우리는 모두 언젠가 회사를 떠납니다. 30년 뒤, 당신이 짐을 싸서 나갈 때 후배들은 당신을 어떻게 기억하길 원하나요? 스스로 어떻게 정의하고 싶은가요?


오상무는 25년간 주당 연기를 하며 맨 정신을 지켰습니다. 당신이 회사에서 쓰고 있는 가면은 당신을 보호하고 있나요, 아니면 당신의 영혼을 잠식하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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