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3_ 검토하겠습니다,라는 이름의 우아한 거절
인도의 매운 카레 냄새가 옷에서 빠지기도 전에, 우리는 하네다 공항에 내렸다.
도쿄의 공기는 서늘하고, 투명하고, 날카로웠다. 싱가포르의 깨끗함이 '기계적'이라면, 도쿄의 깨끗함은 '강박적'이다.
거리의 사람들은 무채색 코트를 입고, 소음 없이 움직였다.
인도의 경적 소리가 환청처럼 들릴 지경이었다.
“팀장님, 여기 데시벨(dB) 실화입니까? 도서관보다 조용해요. 제 숨소리가 소음공해로 신고당할 것 같은데요.”
박 대리(Sophia)가 마스크를 고쳐 쓰며 속삭였다.
그녀는 이미 ‘눈치’라는 보이지 않는 압력에 눌려 있었다.
“피에르, 너는 어때? 네가 좋아하는 동방예의지국 끝판왕에 왔는데.”
내가 묻자, 피에르는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거리를 둘러봤다.
“아아… 팀장님. 보십시오. 남에게 폐(Meiwaku)를 끼치지 않으려는 저 절제된 몸가짐. 이곳이야말로 공자님이 꿈꾸던 대동사회(Great Unity)가 아니겠습니까?”
피에르는 지나가는 행인에게 깍듯이 90도로 인사했다.
하지만 행인은 피에르를 투명 인간 취급하며 스쳐 지나갔다.
피에르의 인사는 허공에서 길을 잃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이 도시의 친절은 ‘벽’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미팅 상대는 일본 3대 드럭스토어 체인 중 하나인 ‘마츠모토(Matsumoto)’의 구매 부장,
‘다나카(Tanaka)’ 상이었다. 긴자(Ginza)의 고급 회의실.
다나카 부장은 사람 좋은 미소로 우리를 맞이했다.
“먼 곳까지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명함 교환하시죠.”
다나카 부장은 명함을 두 손으로 공손히 받더니, 마치 보물지도라도 되는 양 테이블 위에 정렬해 두었다. 피에르는 그 모습에 또 한 번 감동했다.
“역시… 예(Etiquette)를 아는 분이시군요.”
회의는 순조로워 보였다. 아니, 순조로워 ‘보이기만’ 했다.
내가 제안서를 한 장 넘길 때마다 다나카 부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추임새를 넣었다.
“하이(네), 하이. 소데스네(그렇군요). 나루호도(과연).”
박 대리는 신이 나서 노트북에 기록했다.
(박 대리의 화면: 긍정 시그널 감지. 고개 끄덕임 분당 15회. 미소 유지율 100%. 이번 건은 식은 죽 먹기 예상.)
하지만 나는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다나카 부장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1시간의 프레젠테이션이 끝난 후, 내가 결정타를 날렸다.
“부장님, 그래서 이번 시즌 입점, 가능하시겠습니까?”
다나카 부장이 “쓰읍-” 하며 곤란한 듯 숨을 들이마셨다.
일본 비즈니스에서 가장 위험한 소리.
“Kang 상의 제안은 정말 훌륭합니다. 감동했습니다. 다만… 사내에서 ‘젠쇼(전향)’적으로, ‘켄토(검토)’해 보겠습니다.”
옆에서 피에르가 해맑게 웃으며 통역(?)했다.
“팀장님!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답니다! 잘 될 거 같은데요”
나는 박대리의 정강이를 걷어차고 싶었다.
“피에르, 조용히 해. 저건 거절이야.”
“네? 검토한다는데요?”
“일본에서 ‘검토하겠다’는 건 ‘너랑은 절대 안 한다’는 뜻이고, ‘전향적’이라는 건 ‘기적이나 일어나면 생각해 보겠다’는 뜻이야.”
다나카 부장은 끝까지 웃으며 우리를 엘리베이터 앞까지 배웅했다.
문이 닫히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90도로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문이 닫히자마자, 박 대리가 거리 측정기를 바닥에 던질 뻔했다.
“와… 소름. 팀장님, 방금 저 사람 감정 수치 그래프 보셨어요? 목소리 톤 변화가 0이에요. AI보다 더한 NPC인데요?”
저녁 식사 자리.
다나카 부장은 우리를 전통 가이세키(Kaiseki) 요리점으로 초대했다.
분위기는 엄숙했다. 물 흐르는 소리와 다나카 부장의 술 따르는 소리만 들렸다.
그는 끊임없이 우리를 칭찬했다. 한국의 역동성, K-뷰티의 위상, 그리고 피에르의 예절 바름까지. 하지만 정작 계약 이야기가 나오면 그는 뱀장어처럼 미끄러져 나갔다.
“아직 본사 결재 라인이 복잡해서요. 하하.”
식사가 끝날 무렵, 종업원이 밥 위에 녹차를 부은 요리, ‘오차즈케’를 내왔다.
순간, 나는 젓가락을 든 손을 멈췄다. 교토(Kyoto) 화법.
손님에게 오차즈케를 내오는 것은 “이제 그만 집에 가라(이 밥 먹고 떨어져라)”는 은유적 표현이다.
‘끝났구나. 완벽한 축객령(逐客令)이다.’
나는 체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런데 그때, 눈치 없는(혹은 눈치를 초월한) 피에르가 숟가락을 들었다.
“오! 맙소사. 식사 끝에 속을 편안하게 해주는 죽(Porridge)까지 주시다니! 역시 손님을 끝까지 배려하는 ‘유종의 미(Finishing well)’가 느껴집니다.”
피에르는 다나카 부장을 향해 합장하며 감격의 눈빛을 보냈다.
“다나카 상, 당신은 제가 만난 사람 중 가장 ‘인(仁)’이 넘치는 분입니다. 이 따뜻한 국물처럼, 당신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피에르는 오차즈케를 후루룩 소리 내며 정말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C'est magnifique! (훌륭해!) 한국의 국밥과는 다른, 절제된 숭고함이 있는 맛이군요!”
다나카 부장의 동공이 흔들렸다.
‘이놈 뭐지? 나가라는 뜻인데 왜 감동을 하지?’라는 당혹감이 그의 포커페이스에 균열을 냈다.
박 대리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폰을 꺼내 다나카에게 들이댔다.
“부장님! 저희 피에르 씨가 이렇게 맛있게 먹는 거 처음 봐요. 이거 숏폼(Shorts) 찍어서 올려도 될까요? 제목은 ‘일본의 정(情)에 감동한 프랑스인’. 이거 대박 나면 마츠모토 드럭스토어 홍보 효과 장난 아닐 텐데.”
다나카 부장은 피에르의 순수한(?) 먹방과 박 대리의 카메라 공세에 완전히 포위당했다.
계산된 침묵이, 무식한 진심과 무례한 렌즈 앞에서 무너진 것이다.
다나카 부장이 처음으로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가식적인 영업용 미소가 아닌, 진짜 웃음이었다.
“하하하! 정말 못 말리는 팀이군요. 오차즈케를 이렇게 맛있게 먹는 외국인은 처음 봅니다. 졌습니다. 내일… 실무진 미팅 다시 잡으시죠.”
호텔로 돌아가는 택시 안. 도쿄 타워가 붉게 빛나고 있었다.
피에르는 배를 두드리며 만족해했다.
“팀장님, 역시 진심은 통합니다. 다나카 상도 저의 예절에 감동한 게 분명합니다.”
나는 피식 웃었다.
“그래, 피에르. 네가 이겼다. 가끔은 눈치 없는 게 최고의 무기네.”
박 대리는 뒷좌석에서 영상을 편집하느라 바빴다.
“팀장님, 근데 일본 사람들 진짜 피곤하게 사네요. 싫으면 싫다, 좋으면 좋다 하면 되지. 왜 밥으로 멕여요? 데이터 분석 불가예요, 진짜.”
창밖으로 샐러리맨들이 넥타이를 머리에 매고 비틀거리며 걷는 모습이 보였다.
낮에는 로봇처럼 일하고, 밤에는 술에 취해 흐트러지는 사람들.
그들의 침묵은 평화가 아니라, 비명이었다.
우리는 인도의 소음보다 더 시끄러운 도쿄의 침묵을 뚫고, 겨우 계약의 실마리를 잡았다.
하지만 내 마음은 여전히 무거웠다. 서울 본사에서 날아온 메일 한 통 때문이었다.
[발신: 인사팀 / 제목: 긴급 조직 개편 및 임원 인사 발령 공지]
드디어 올 것이 왔다. 태풍은 도쿄가 아니라, 서울에 있었다.
뭔가 느낌이 쎄하다. ;
말이 많은 사람보다, 웃으면서 침묵하는 사람이 더 무서울 때가 있습니다. 당신의 비즈니스 현장에도 '다나카 부장'처럼 예의 바른 거절을 하는 사람이 있나요? 그들의 ‘가면(Persona)’ 뒤에 숨겨진 진심을 읽어내는 당신만의 노하우는 무엇입니까?
강팀장은 눈치(High Context)로 상황을 비관했지만, 피에르는 눈치 없는 둔감력으로 상황을 반전시켰습니다. 너무 많은 것을 읽어내느라 스스로 지쳐가고 있진 않나요? 가끔은 피에르처럼 ‘모르는 척’ 밀고 나가는 무식한 용기가 교착 상태를 뚫는 열쇠가 되기도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어떠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