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9_ 엑셀 밖으로 세상을 통달한 생존자의 마지막 조언
"운에 속지 마라(Fooled by randomness).
그러나 자본주의의 야생에서는,
그 운을 '자신의 실력'으로 포장할 줄 아는 자만이 살아남는다."
사건의 발단은 6개월 전이었다.
출처는 불분명한, 아마도 새롭게 부임한 본사의 마케팅 부서장발 아이디어였을 것으로 추정이 되는, 기괴한 신제품이 출시되었다. 제품명은 <미스틱 문라이트 바디 오일>. 보라색 펄이 번쩍거리는 데다, 향은 명상 센터에서나 맡을 법한 짙은 파촐리(Patchouli) 향이었다.
뭐, 이 바닥에서 20년 정도 굴러먹다 보면, 별의별 사연을 가진 상품들이 많은데, 대체.. 이번 건은 괴상함의 밀도가 달랐다. 더구나, 그놈의 MOQ 맞추겠다고 싸질러 놓은 재고만 10만 개. 국내에서 난리를 쳐도 안되니, 우리 쪽으로 밀어 넣으라는 '압박'이 밀려왔다.
어찌 되었건 본사 지시라면, 세상 까다롭고 시니컬한 조상무도 단 한마디의 불만 없이 no problem이었다.
"상무님. 덥고 습한 동남아에 끈적이는 바디 오일을, 그것도 보라색 펄을 넣어서 팔면 악성 재고로 100% 폐기 수순입니다, 이거 완전 미친 짓이라고요"
"K, 나도 뭐 몰라서 이래? 우리는 그냥 본사에서 지시하면, 따르는 거예요. 알잖아, 우린 그냥 월급쟁이.."
나와 링링이 파이썬 코드가 멈출 정도로 반대했지만, 조 상무는 결국 10만 개라는 어마어마한 물량을 현지에 강제 할당했다.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현지 창고에서 보라색 오일은 반년째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고, 우리는 폐기 비용을 엑셀에 반영하며 누구 하나 희생양이 되어 잘려나가는 거 아닌가 걱정하고 있었다. 이럴 때 보면, 조상무는 또 다른 모습의 여유가 느껴진다. 돈이 많아서 인가. ;
그런데, 월요일 아침.
마테오가 핑크색 카디건을 펄럭이며 내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본부장님! ¡Dios mío! (오 마이 갓!) 틱톡(TikTok)에서 터졌어요! 그 보라색 오일이요!"
"뭐가 터져..?"
영상 속 아세안 Z세대들은 그 오일을 몸에 바르지 않았다. 그들은 보라색 펄 오일을 슬라임(Slime, 액체 괴물 장난감)에 섞어서 기괴하고 영롱한 '우주 슬라임'을 만드는 놀이에 열광하고 있었다. 누군가 우연히 올린 숏폼 영상이 바이럴을 타면서, 쓰레기 악성 재고가 단 일주일 만에 100억짜리 글로벌 캐시카우로 부활해 버린 것이다. oh my...
철저한 분석과 땀방울이 아니라, 순도 100%의 '운(Luck)'이 만들어낸 폭력적인 결과였다.
너무나 다행이었지만, 또 한 번으로 어이가 없어 웃음이 튀어나왔다.
"허, 참... 우주 슬라임이라니."
[조 OO 상무, 업계 1위 글로벌 브랜드 'L사' 아시아 태평양 총괄 전무(VP)로 스카우트]
정확히 2주 뒤, 사내 메신저엔 이런 메시지가 올라왔다.
제니퍼는 긴 휴가를 다녀올 거라고 했는데, 결국은 돌아오지 않을 휴가가 된 셈이다.
그녀가 짐을 싸서 떠나기로 한 금요일 저녁.
텅 빈 상무실에는 언제나 피워두던 인센스 스틱의 향기 대신, 종이 박스의 건조한 먼지 냄새만 감돌았다. 나는 결재 서류를 핑계로 그녀의 방에 들어섰다.
에르메스 찻잔을 뽁뽁이로 포장하던 제니퍼가 나를 보더니 픽 웃었다.
"K. 표정이 왜 그래? 내가 운 좋게 대박치고 도망가서 억울해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가 포장을 멈추고, 탕비실에서나 굴러다니는 종이컵에 싸구려 믹스커피 두 잔을 타서 하나를 내밀었다.
페리에 탄산수만 마시던 그녀의 손에 들린 노란색 맥심 커피. 묘한 이질감이었다.
"K. 기억나요? 작년에 우리 인도(India) 출장 갔을 때. 고속도로 한가운데 미친 소 떼가 주저앉아서 길을 막았을 때."
그녀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창밖을 보았다.
"그때 우린 미팅 시간에 늦을까 봐 차 안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엑셀로 플랜 B, 플랜 C 동선을 짜고 있었죠. 근데 현지 기사는 그냥 시동 끄고 차에서 내려서 소한테 절을 하더니, 담배 한 대 피우면서 낮잠을 잤죠. 소가 스스로 비킬 때까지."
나는 가만히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 거대한 대기업은 말이죠, 인도의 고속도로랑 똑같아요. you know 아무리 우리가 제살 깎아가며 완벽한 엑셀을 돌려도, 회장의 변덕이나 시장의 트렌드라는 '소 떼'가 길을 막으면 답이 없어요. 우린 늘 그 소를 계산기로 밀어내려다 우리 영혼을 다 갉아먹죠, right?"
제니퍼가 책상 위에 놓인 타로카드를 손가락으로 툭 튕겼다.
"내가 이 미신 같은 종이 쪼가리를 왜 믿었는지 알아요? 내 실력이 부족하다는 걸 나도 아니까. 임원이라는 자리는 내 노력으로 통제할 수 없는 '운'과 '정치'의 영역이라는 걸 인정하는 거죠. 그래서 난 계산기를 두드리는 대신, 회사가 환상으로 착각할 만한 '스토리'를 파는 거고. 그리고 운 좋게 룰렛이 터졌고, 사실 그전부터 어딘가 자리를 물색하던 중이었는데, 이렇게 대박이 날 줄이야. 참. 인생.. "
그녀는 운 좋은 멍청이가 아니었다. 이 회사가 실력보다 포장과 운이 지배하는 '거대한 카지노'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먼저 깨닫고, 그 부조리한 시스템에 맞춰 가장 완벽한 광대 연기를 해낸 지독한 생존자였다.
"K 도 알고 있지 않나요? 그러니까 이제 남의 카지노에서 그만 엑셀 돌리자고요. 소 떼가 비키길 기다리지 말고, 당신만의 목장을 만들어봐요"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과박스 두 개. 그녀가 이 카지노에서 합법적으로 챙겨가는 전리품이었다.
"아, 그리고 조심해요. 본사 영감탱이들이 내 '감성팔이'가 글로벌에 먹힌다고 착각해서, 다음 상무 자리에 진짜 맑은 눈의 광인(명상가)을 꽂아 넣었어. 고생 좀 할 거예요, 그리고.."
조상무는 약간 멈칫하더니.
"그동안 고마웠어요, 나이 어린 상무, 짜증 다 받아내느라"
그녀는 마지막으로 사람 좋은, 아니, 짐을 덜어낸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회전문을 빠져나갔다.
그녀가 남긴 믹스커피의 단맛이 입안에 씁쓸하게 감돌았다. 그녀의 마지막 조언은 내 21년 직장 생활의 명치를 정확하게 찔렀다. 나는 엑셀의 칸을 완벽하게 채우면 회사가 나를 구원해 줄 거라 믿었던, 가장 순진하고 미련한 일개미였던 것이다.
사내 메신저가 팝업을 띄웠다.
[인사발령] 글로벌 통합 본부 신임 상무 곽필립 부임 안내 (다음 주 월요일 09:00 예정)
양 과장이 인트라넷을 뒤지더니 경악한 표정으로 외쳤다.
"본... 본부장님! 신임 상무님 이력이 미쳤습니다. 프랑스 소르본 철학과 중퇴에, 파리 16구에서 아유르베다 명상 센터를 운영하셨답니다. 그룹 회장님 처조카의 와인 파트너의... 배다른 동생?이라는 소문이 있습니다!"
마테오가 립밤을 떨어뜨렸고, 링링의 키보드 소리가 멎었다.
최 부장이 "씨벌, 회사가 절간이냐"라며 이마를 짚었다.
나는 제니퍼가 버리고 간 텅 빈 상무실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환영할 일이지. 감시하는 딜러가 멍청하고 우아할수록, 테이블 밑에서 우리가 카드를 바꿔치기하기엔 더없이 좋은 법이니까."
제니퍼의 말대로다. 나는 더 이상 고속도로 위에서 소 떼와 싸우지 않을 것이다. 무능한 철학자 상무를 완벽한 방패로 삼아, 이 미친 팀원들(양 과장, 최 부장, 마테오, 링링)과 함께 남의 돈으로 내 비즈니스를 굴려볼 것이다.
전장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진짜 '오션스 일레븐'이 막을 올리고 있었다.
Q1. 당신은 '통제 불가능한 변수(소 떼)'와 싸우고 있습니까? 제니퍼는 대기업이라는 시스템이 노력과 논리만으로 통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찍 인정하고, 자신만의 생존 방식(포장과 운의 활용)을 선택했습니다. 반면 K는 끊임없이 엑셀로 세상을 통제하려다 번아웃을 겪었죠.
Coaching Question: 당신의 업무 중 아무리 야근을 하고 논리를 세워도, 외부 요인(상사의 변덕, 시장의 변화) 때문에 어그러지는 '통제 밖의 영역'은 몇 % 나 됩니까? 그 영역을 억지로 통제하려 쏟는 에너지를, 차라리 상황을 유연하게 타고 넘는(Surfing) 데 쓴다면 무엇이 달라질까요?
Q2. '광대'의 가면 뒤에 숨은 생존 본능을 읽어낼 수 있습니까? 조 상무는 그저 운 좋은 멍청이가 아니었습니다. 무능해 보이는 겉모습 뒤에, 시스템의 맹점을 꿰뚫고 타이밍을 낚아챈 영악한 맹수였죠. 진짜 무서운 사람은 늘 화를 내는 사람이 아니라, 멍청한 척하며 실속을 다 챙기는 사람입니다.
Coaching Question: 당신의 주변에 실력도 없어 보이는데 이상하게 승승장구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를 속으로 경멸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가 '조직의 욕망을 어떻게 읽고 포장하는지' 그 영악한 기술을 분석해 본 적이 있습니까?
Q3. 당신은 '카지노의 딜러'입니까, '플레이어'입니까? "남의 카지노에서 엑셀 돌리지 말고, 네 목장을 지어라." 제니퍼의 마지막 말은 K를 각성시킵니다. 회사의 부품으로 성실히 일하는 것을 넘어, 회사를 이용해 내 가치를 키워야 할 때입니다.
Coaching Question: 당신은 지금 회사가 시키는 게임의 규칙 안에서만 착실하게 주사위를 굴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회사의 자원, 인맥, 인프라를 지렛대 삼아 '당신만의 비즈니스 모델(독립)'을 기획하는 플레이어로 움직이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