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터에는 담기지 않는 것들

ep.26_ 회사의 꼬리자르기를 반전의 기회로

by 김멀똑


화요일 오전 10시.

경영감사팀 임시 조사실(구 제2회의실).


불투명 시트지가 발린 유리문 너머로, 25년 차 최 부장의 어깨가 보였다.


감사팀 대리가 모니터에 엑셀 시트를 띄워놓고 최 부장을 몰아세우는 중이었다.


타깃은 '국내팀 밀어내기(Dumping)'.

연말 목표를 맞추기 위해 남대문 도매상에게 헐값에 악성 재고를 털어낸 배임 행위.


"K 본부장, 거기서 구경만 할 거예요?"


내 뒤에서 조 상무(Jennifer)가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그녀가 내 쪽으로 다가오더니, 자신의 손에 이솝(Aesop) 핸드워시를 펌핑해 비비며 허공에 페브리즈를 두 번 분사했다. 감사팀 방에서 새어 나오는 '스트레스의 냄새'가 불쾌하다는 제스처였다.


"어차피 누군가는 짐을 싸야 끝나는 게임이야. Audit(감사) 팀 Target은 Clear 하잖아. 고연봉에 실적 안 나오는 최 부장 선에서 꼬리 자르고, 우리 본부 Re-org(조직 개편) 가요. 알았지?"


"상무님. 4년 전, 회사 현금 흐름 막혔을 때 특판 채널 돌리라고 압박한 건 경영진이었습니다. 최 부장님은 총대 메고 폭탄을 떠안았을 뿐입니다."


"Hey K."


그녀가 눈을 치켜떴다.


"Data는 과거의 수고로움을 기억해주지 않아. 현재의 마이너스 ROI(투자대비수익)만 증명할 뿐이지. Business is business잖아? 근데 진짜 소름 돋는 게 뭔지 알아요?"


그녀가 내 어깨의 먼지를 손가락으로 튕겨냈다.


"내가 어제 청담동 명상센터 갔다가 타로를 봤거든? 'Death(죽음)' 카드가 정방향으로 떡 하니 나오더라고. Universe가 나한테 Sign을 주는 거야. 우리 본부에 쌓인 Negative Energy를 한번 Cleansing 하라고. 안 그래도 올해 최 부장님 사주에 원진살(怨嗔煞)이 껴서 우리 조직이랑 상극이야. 내일까지 퇴직 권고 대상자 명단 올려요. K가 결단 못 내리면, 내가 직접 그 책상 빼버릴 테니까."


데이터와 ROI를 부르짖으면서, 인력 구조조정의 명분을 타로카드와 원진살에서 찾는다. 합리적 허울을 쓴 K-임원의 기괴한 샤머니즘. 나는 대답 없이 고개만 숙였다.




오후 2시. 탕비실.


최 부장이 종이컵 두 개를 겹쳐 쥐고, 맥심 모카골드 세 봉지를 거칠게 뜯어 붓고 있었다. 봉지를 찢는 그녀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뜨거운 물을 붓고 플라스틱 스틱을 휘젓는 소리가 탕비실을 날카롭게 울렸다.


"진혁아. 그냥 내 책상 내가 뺄게."

"부장님. 제가 어떻게든 방어 논리를..."

"됐어. 회사라는 게 거대한 '문서 파쇄기'잖아. 이면지처럼 이리저리 쓰이다가, 쓸모없어지면 갈려 나가는 거지. 괜히 본부장인 너까지 휩쓸리지 마. 여기서 깔끔하게 선 그어. 그게 너 살고 애들 사는 길이야."


그녀는 진한 믹스커피를 단숨에 들이켜고 탕비실을 나갔다. 회사를 위해 시키는 대로 물어오기만 하던 낡은 사냥개는, 분노 대신 체념을 택했다.


자리로 돌아오자, 양 과장이 은밀히 내 파티션 쪽으로 다가왔다.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본부장님. 감사팀 분위기가 실무선에서 끝날 사이즈가 아닙니다."

"그래서?"

"배가 가라앉을 때는 가장 무거운 짐부터 버려야 합니다. 솔직히 저는 진작에 최 부장님 구시대적 영업 방식, 리스크 헷지(Hedge) 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감사팀은 명분이 필요하고, 상무님은 제물이 필요합니다."


양 과장이 내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저는 철저히 본부장님 지시에만 Align 되어 있습니다. 최 부장님 짐 정리, 제가 조용히 돕겠습니다."


단 1초의 망설임 없는 손절. 늙은 사냥개는 스스로 파쇄기에 들어가려 하고, 얍삽한 미어캣은 그 스위치를 올리겠다고 자처한다.


나는 주머니 속의 4B 연필을 꽉 쥐었다. 이대로 스위치를 당겨 최 부장을 넘긴다면, 나는 평생 조 상무의 타로카드 패로 전락할 것이다.




밤 10시. 텅 빈 사무실.


나는 퇴근하려던 링링을 불렀다.


"링링. 지난번 조직 개편되면서 받았던 국내 비즈니스 data 폴더, 그거 다시 열어봐바."

"제 공식 업무 시간은 18시 부로 종료되었습니다만."

"이번 달 본부 운영비 150만 원, 너한테 다 준다."


링링의 미간이 잠시 움찔, 하더니,

군말 없이 노트북을 열었다.


"어떤 Data를 원하십니까."

"최 부장이 남대문 도매상한테 털어낸 악성 재고들. 이게 아마 최근 3-4년 전 자료일 텐데, 그거 보따리상(따이궁)들 통해서 아세안으로 다 빠져나갔을 거야. 그 물건들의 최종 도착지(End-User)랑 실판매 단가, 싹 다 크롤링(Crawling) 해서 정리해 줘."


링링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무심하게 날아다녔다. 그녀의 안경알에 수백 개의 엑셀 셀들이 반사되었다.

손가락의 움직임이 경이로웠다.


30여분이 흐른 뒤, 링링이 대답했다.


"나왔습니다, 본부장님"


링링이 모니터를 내 쪽으로 돌렸다.


"남대문으로 빠진 물량의 60%가 베트남 다낭, 인도네시아 수라바야 같은 '3선 도시'로 흘러갔습니다. 더 흥미로운 건 단가입니다. 정식 수출가보다 불과 10% 낮은 가격에, 현지 틱톡(TikTok) 뷰티 인플루언서들을 통해 2차 유통되고 있습니다."


모니터를 보는 순간 뒤통수가 쭈뼛 섰다.


이건 '브랜드 가치 훼손'이 아니었다. 우리가 정식으로 뚫을 엄두조차 내지 못해 손가락만 빨고 있던 아세안 변두리 시장을, 남대문 도매상들이 자생적인 바이럴을 통해 뚫어버린 것이다.


머리가 문득 맑아졌다.


"링링. 이거 내일 아침까지 '신규 비즈니스 모델'로 시각화해. 철저하게 조 상무 스타일로 건조하고 숫자로만 꽉 채워서."

"추가 수당은요?"

"조 상무 결재 떨어지면, 잭키 벤더 등록할 때 네가 뜯어낸 물류 단가 인하분, 네 성과급에 100% 태워준다."

"Deal. 새벽 3시 전에 메일로 꽂아드리겠습니다."




수요일 오전 9시. 징계 위원회 겸 조직 개편 회의.


감사팀장과 조 상무가 최 부장의 권고사직안에 서명하려는 순간, 내가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내 손에는 제련된 10장짜리 [글로벌 마이크로 B2B 채널 양성화 전략서]가 들려 있었다.


"K 본부장. 룰 어길 거야? Death 카드 떴다니까."


조 상무가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그녀 앞의 에스프레소 잔을 옆으로 살짝 밀어내고, 전략서를 내려놓았다.


"상무님. 감사팀 타깃이 틀렸습니다. 이건 불법 덤핑이 아닙니다. 국내팀이 오가닉(Organic)하게 개척한 '아세안 B2B 마이크로 도매망'입니다."


감사팀장이 어이없다는 듯 서류를 던졌다.


"강 본부장. 비정상적인 유통으로 본사 이익률 갉아먹은 명백한 배임이에요."

"데이터를 보시죠."


나는 링링이 밤새 뽑아낸 엑셀 차트를 짚었다.


"인도네시아 3선 도시 매출 데이터입니다. 우리가 마케팅비 100억 들여도 못 만들 트래픽을, 최 부장이 남대문 네트워크를 이용해 마케팅 비용 '0원'으로 만들어냈습니다. 이 회색지대(Grey Zone)를 징계해서 싹을 자르는 게 회사에 이익입니까, 아니면 합법적인(Legal) 글로벌 B2B 채널로 양성화해서 우리 본부 매출로 잡는 게 이익입니까?"


회의실에 정적이 흘렀다. 조 상무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녀는 윤리나 명분보다, 엑셀 시트 우측 하단의 'Net Profit(순이익)'을 숭배하는 여자다. 숫자는 완벽했다. 나는 결정타를 날렸다.


"상무님. 어제 보셨다는 타로카드 'Death' 말입니다. 그거,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과거의 낡은 것을 부수고 완전히 새롭게 부활(Rebirth)한다'는 뜻 아닙니까? 최 부장님 원진살 낀 게 아니라, 이 썩어가는 악성 재고를 돈으로 바꿔줄 '귀인(貴人)'이었습니다. Universe가 보낸 Sign을 이렇게 파쇄기에 넣으실 겁니까?"


조 상무의 동공이 커졌다. 그녀의 샤머니즘적 세계관과 데이터 기반의 자본주의가 완벽하게 교차하는 순간. 그녀가 몽블랑 만년필을 굴리더니, 징계안 서류를 반으로 죽 찢어버렸다.


"Make sense. K, 본부장 치고는 제법 영적인 인사이트가 있네. 감사팀장님, 이 건은 우리 본부 '신규 글로벌 전략'으로 Turn 하겠습니다. 수고하셨어요."


감사팀장이 떫은 표정으로 서류 뭉치를 챙겨 들고 퇴장했다.




오전 11시. 사무실.


내가 회의실에서 걸어 나오자, 파티션 너머로 눈치를 보던 직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 꽂혔다.


"최 부장님."


내가 부르자, 모니터 전원을 끄고 있던 최 부장이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다.


"부장님. 짐 싸지 마시고, 그 남대문 도매상 김 사장님한테 전화 한 통 돌리시죠. 불법 유통 딱지 떼고, 우리 본사 정식 B2B 벤더로 계약 맺자고 하십쇼. 마진은 우리가 5% 더 쳐준다고요."


최 부장의 굽은 등이 서서히 펴졌다. 초점이 없던 낡은 사냥개의 눈빛에 다시 살기가 돌아오고 있었다.


"어... 김.. 사장, 바.. 바로 연락하겠습니다. 본부장님"


링링은 무심하게 계산기를 두드렸고, 양 과장은 재빨리 탕비실로 달려가 최 부장에게 바칠 믹스커피의 물을 올렸다. 태세 전환은 전광석화와 같았다.


사일로의 내전은 멈췄고, 파쇄기는 전원이 꺼졌다.


누군가의 유효기간은 조 상무의 타로카드나 감사팀의 잣대가 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어디에 서 있는지, 누구와 손을 잡고 있는지에 따라 썩어가는 재고도 새로운 시장의 마스터키가 된다.


간만에 개운하게 하루가 정리되는 기분.

맥주 한잔하기 딱 좋은 오전이다.




[당신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Q1. 당신은 '회색지대'를 리스크로 봅니까, 혁신의 씨앗으로 봅니까?


감사팀은 통제되지 않는 덤핑 물량을 '징계 대상'으로 보았지만, K는 데이터를 통해 마케팅 비용 0원의 '신규 채널'로 재해석했습니다. 모든 혁신은 기존의 룰을 벗어난 회색지대에서 시작됩니다. 지금 당신 부서를 골치 아프게 하는 꼼수나 통제 불능의 현상이 있습니까? 관점을 바꿔서, 그것을 회사의 합법적인 비즈니스 모델로 '양성화'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Q2. 구조조정의 칼바람 앞, 스위치를 당깁니까, 궤도를 바꿉니까?


회사가 효율을 핑계로 '파쇄기'를 돌리려 할 때, 무능한 리더는 얍삽한 미어캣(양 과장)처럼 살아남기 위해 늙은 사냥개(최 부장)를 밀어 넣습니다. 하지만 유능한 리더는 희생양을 고르는 대신, 판 자체를 비틀어버릴 새로운 '가치'를 증명해 냅니다. 상부의 부당한 압박이나 제로섬(Zero-Sum) 게임이 주어졌을 때, 당신은 팀원 중 누구를 버릴지 주판알을 튕깁니까, 아니면 판 자체를 키워 모두를 살릴 '제3의 대안'을 회사에 던질 배짱이 있습니까?


Q3. 상사의 '비이성'을 설득의 무기로 활용할 수 있습니까?


K는 조 상무를 설득하기 위해 완벽한 데이터를 준비했지만, 결정타는 그녀가 맹신하는 '타로카드'의 의미를 입맛에 맞게 비틀어 해석해 준 것이었습니다. 상사를 움직이는 것은 논리만이 아닙니다. 그들의 은밀한 맹신을 이해해야 합니다. 당신의 상사가 겉으로 내세우는 논리 이면에, 진짜로 집착하는 그들만의 '비이성적 고집이나 취향'은 무엇입니까? 당신은 그것을 혐오합니까, 아니면 설득의 무기로 역이용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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