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5_ 임파워먼트라는 이름의 직무유기
월요일 오전 8시 30분.
서울 본사.
말레이시아의 끈적한 열대야는 수하물 벨트 어딘가에 두고 온 듯, 사무실의 공기는 서늘하고 건조했다.
월요일이지만, 출근 발걸음은 꽤나 가벼웠다.
비록 부하직원의 '외주 발주'와 협력업체의 '접대'로 만들어진 가짜 평화였지만, 어쨌든 20년 만에 처음으로 가족에게 ‘능력 있는 가장’의 지위를 회복하고 돌아온 출근길 아닌가.
"본부장님, 오셨습니까."
사무실 문을 열자마자, 서늘한 공기의 원인을 깨달았다.
평소라면 키보드 소리와 믹스커피 젓는 소리로 채워져야 할 공간이, 마치 서부극의 결투 직전처럼 고요했다.
가운데 파티션을 경계로, 두 진영이 서로를 씹어 먹을 듯 노려보고 있었다.
한쪽은 최 부장과 양 과장이 이끄는 '국내팀', 다른 한쪽은 링링이 버티고 있는 '해외팀'이었다.
내가 자리를 비운 단 4일. 그 짧은 시간 동안, 사무실은 거대한 사일로(Silo, 부서 이기주의)의 내전(Civil War) 상태로 변해 있었다.
"무슨 일이야?"
국내팀 양 과장이 핏대를 세우며 일어났다.
"본부장님! 해외팀 링링 대리가 이번 달 국내 홈쇼핑 주력 상품 재고 70%를 금요일 밤에 일본 선적 창고로 다 빼버렸습니다! 당장 내일모레 방송 펑크 나면 해외팀이 책임질 겁니까?"
해외팀 링링이 안경을 치켜올리며 건조하게 맞받아쳤다.
"데이터 기반의 최적화(Optimization)입니다. 주말에 통과된 일본 지사 제안서의 선결 조건이 '우선 물량 확보'였습니다. 조 상무님도 승인하셨고요. 국내팀의 위약금 방어는 제 KPI(핵심성과지표)가 아닙니다."
상황 파악을 하기도 전에 조 상무(Jennifer)가 나를 호출했다.
상무실 책상 위에는 그녀의 분노 게이지를 상징하는 '에스프레소 투 샷'이 놓여 있었다.
"K. 주말에 가족들이랑 파라다이스는 잘 즐겼나요?"
그녀가 모니터를 내 쪽으로 확 돌렸다.
[JPN_Proposal_Final_Merge_최최종. pptx] (용량: 150MB)
"이게 금요일 밤에 국내팀 양 과장이 '협업'이랍시고 나한테 보낸 파일이에요. 열어봐요."
마우스를 클릭하자 화면에 기괴한 혼종이 나타났다.
양 과장의 벚꽃 흩날리는 촌스러운 파스텔 톤 템플릿 위에, 링링이 던져준 쉼표(,) 투성이의 파이썬 로우 데이터(Raw Data)가 텍스트 상자를 뚫고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한글 인코딩마저 깨져서 일본 시장분석 결과가 [웱뗅: 45%, 뛠퀡: 20%]로 표기되어 있었다.
"머리(데이터)랑 손발(디자인)이 따로 놀다 못해 서로를 파먹었어. 내가 주말 내내 이 '좀비 제안서' 해독하느라 켄지한테 이메일로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고... understand?"
"상무님, 제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소통에 약간의 버그가..."
"Listen, K."
그녀가 몽블랑 만년필로 책상을 탁탁 쳤다.
"내가 주말에 답답해서 타로 카드를 봤거든? 근데 'The Tower(탑)' 카드가 역방향으로 나오더라고. 완벽한 붕괴(Collapse)의 Sign이지. 찝찝해서 Data를 돌려봤더니, 이 좀비 제안서부터 부서 간 재고 싸움까지... 아주 엉망진창이야. K가 임파워먼트(Empowerment) 랍시고 애들 방목한 결과가 이거야?"
아찔했다.
"내가 없는 동안 자율적으로 의사결정 하세요. 믿습니다."
나는 그것이 세련된 리더십이라 착각했다. 하지만 방향성(Alignment) 없는 권한 위임은, 그저 합법적인 '폭탄 돌리기' 면허증에 불과했다. 나는 연필을 깎아 룰을 정해주는 게 귀찮아서, 조각칼을 던져주고 각자 알아서 찌르라며 방관한 꼴이었다.
"일단, 제가 빠르게 파악해서, 제대로 수습... 하겠습니다"
"K, 생각보다 심각해요, 회사 기대에 한참 못 미쳐, 시너지는커녕.."
"면목없습니다"
"이러면, 국내팀, 해외팀 통합 의미가 없다니깐!!!"
상무실에서 나와 잿빛 얼굴로 사무실 중앙에 섰다.
해외팀과 국내팀이 내 바짓가랑이를 잡고 서로 책임을 미루기 시작했다. 교통정리를 위해 헛기침을 하려던 찰나였다.
유리문 너머로, 검은색 정장에 파란색 사원증을 목에 건 세 명의 남자가 우리 본부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텅 빈 사과박스가 들려 있었다.
'경영감사팀(Audit)'이었다. 회사 내의 합법적 저승사자들.
그들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국내팀 파티션으로 향하더니, 가장 구석에 앉아 지뢰 찾기를 하던 최 부장의 자리 앞에 섰다.
"경영감사팀입니다. 최근 3년간 국내 도매상 특판 거래 내역, 그리고 하드디스크 임의 제출 바랍니다."
최 부장의 입에 물려 있던 믹스커피 종이컵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사일로의 내전 따위는 애교였다. '진짜 지옥'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오후 2시. 비상 회의실.
조 상무가 블라인드를 내리고 팔짱을 꼈다.
"감사팀 타깃, '국내팀 밀어내기(Dumping)'야."
조 상무의 입에서 나온 단어에 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국내팀이 연말 매출 목표를 맞추기 위해 남대문/동대문 도매상에게 헐값에 재고를 털어냈고, 이 물건들이 보따리상(따이궁)을 통해 해외로 우회 수출되며 글로벌 브랜드 가치를 훼손했다는 제보였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4년 전, 실적 압박에 시달리던 나 역시 최 부장에게 '특판 채널 좀 돌려보시죠'라며 암묵적으로 방관했던 장본인이었다. 위에서 시키는 대로, 회사를 위해 맹목적으로 숫자를 맞췄던 최 부장과 국내팀이 이제 와서 범죄자 취급을 받게 생겼다.
"K. 회사가 요즘 Cash Flow(현금 흐름) 안 좋은 거 알죠? 위에서는 이참에 국내팀이랑 해외팀 조직 통폐합해서 인건비 20% 날리라고 지시 내려왔어요."
조 상무가 내 앞으로 서류철을 하나 툭 던졌다.
"K가 결정해요. 감사팀에 늙고 비싼 최 부장을 제물로 던져주고 조직을 슬림화하든가, 아니면 남의 일에 껴들어서 좀비 제안서나 만드는 양 과장을 날리든가."
"상무님. 최 부장님은 그저 위에서 떨어진 매출 압박을 견디려고..."
"Data는 거짓말 안 해, K. 국내팀 ROI(투자대비수익)는 이미 마이너스, you know that."
그녀가 눈을 가늘게 떴다.
"게다가 최근에 신점(神占)을 봤더니, 올해 최 부장 사주에 원진살(怨嗔煞)이 껴서 우리 본부랑 상극(相剋)이래. 액운은 빨리 털어내는 게 맞아요. 내일까지 명단 올려주세요."
회의실에 홀로 남겨졌다.
주머니 속의 4B 연필을 꽉 쥐었다. 손끝이 하얗게 질렸다.
회사는 필요할 땐 실적이라는 피를 빨아먹고, 위기가 오면 가차 없이 꼬리를 자르는 거대한 '고기 분쇄기(Meat Grinder)'였다. 그리고 지금, 그 분쇄기의 스위치가 내 손에 쥐어졌다.
누군가를 썰어 넣어야만 내 목이 온전해진다. 오래된 전우(최 부장)인가, 충성스러운 부하(양 과장)인가.
나는 눈을 감았다. 아직, 포기하기엔 이르다.
이제 막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지, 채 24시간도 지나지 않은 시간.
또 다른 지옥문이 열리고 있다.
[당신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Q1. 당신의 '임파워먼트'는 날개입니까, 방패막이입니까?
명확한 룰(Rule)과 타 부서와의 '조율(Alignment)' 없이 던져진 권한은, 실무자들에게 각자의 밥그릇을 두고 싸우게 만드는 콜로세움을 여는 것과 같습니다. 리더가 연필을 깎아 방향을 제시하는 수고를 회피할 때, 조직은 서로를 파먹는 '좀비'를 만들어냅니다. 당신이 최근 직원들에게 위임한 업무 중, 진정한 성장을 위한 '권한'과 골치 아픈 일을 떠넘긴 '방치'의 비율은 각각 몇 % 입니까?
Q2. 시스템의 '기억상실증' 앞에서 당신은 누구를 지키겠습니까?
어제의 매출 1등 공신이, 위기가 닥치면 오늘의 불법 덤핑 주동자로 감사팀에 끌려갑니다. 거대한 시스템(회사)은 목표를 달성할 때는 침묵하지만, 리스크가 발생하면 가장 먼저 개인의 헌신을 핑계 삼아 꼬리를 자릅니다. 회사가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의 목을 요구할 때(트롤리 딜레마), 당신은 순응하여 스위치를 당기는 관리자입니까, 아니면 선로의 방향을 바꿀 '새로운 가치(해결책)'를 찾아내는 리더입니까?
Q3. 쓸모의 유효기간은 누가 결정합니까?
데이터와 효율만을 숭배하는 조 상무는 최 부장을 '원진살이 낀 악성 재고'로 취급합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폐기물인 능력이, 판을 바꾸면 대체 불가능한 무기가 되기도 합니다. 지금 당신 조직에서 '성과가 저조한 직원' 혹은 '유통기한이 지난 낡은 방식'이라고 치부되는 것들 이면에, 우리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비즈니스의 '회색 지대(기회)'가 숨어 있지는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