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3_권한은 나눠지는가, 쪼개져 칼이 되는가
화요일 오전 10시 37분.
양 과장이 내 자리 앞으로 왔다.
결연한 표정.
손에는 A4 용지 3장이 들려 있었다.
"본부장님, 보고 드립니다."
"뭔데?"
"조 상무님 기분 일일 리포트입니다."
[Jennifer 상무 감정 모니터링 로그 / Day 1]
09:12 - 출근. 손 소독제 2회 분사. (평소 1회 대비 100% 증가. 불쾌감 지수 높음)
09:15 - 아아(아이스 아메리카노) 주문. 얼음 많이. (열받아 있음 추정)
09:47 - 몽블랑 만년필 뚜껑 열었다 닫음 7회. (초조함 지표. 폭발 임박)
10:35 - 현재 메신저 상태: 'Focusing(집중 중)'
종합 위험 레벨: 橙色 (주황색, 대피 준비)
...
나는 A4를 조용히 엎어 놓았다.
"야, 양 과장."
"네!"
"이건... 좀..., 너무 디테일한 거 아냐"
"아닙니다! 본부장님께서 어제 분명 '제니퍼 상무님의 인간 기압계가 돼라'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명령에 충성합니다!"
양 과장의 눈이 광기로 불타고 있었다.
문제가 생겼다.
'기압계'를 만들려 했는데,
'합법적 스토커'를 만들어버렸다.
나는 연필을 꺼냈다.
드륵.
칼날을 밀었다 넣었다.
권한 위임(Delegation)의 1단계 부작용: 과잉 충성. ㅜ
수요일 오후 6시.
말레이시아 출국 전날.
나는 남은 팀원(프랑켄슈타인의 조각들)을 회의실에 모았다.
"제가 금, 토, 일, 월. 4일 자리 비웁니다. 소피아가 없으니 링링이 실무 총괄. 양 과장이 커뮤니케이션 서포트. 최 부장님은... 그냥 자리에 계시면 됩니다."
최 부장이 믹스커피를 홀짝이며 비웃었다.
"나? 나는 그냥 응급실 당직 의사야. CPR(심폐소생술) 필요할 때만 불러."
링링이 안경을 치켜올리며 화면에 [부재 시 의사결정 트리]를 띄웠다.
완벽한 프로세스였다.
"좋아. 그럼 믿고 다녀오겠습니다."
그때 양 과장이 손을 들었다.
"본부장님, 그런데 실무 의견이 충돌할 때 최종 결정권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당연히 링링이지. 데이터가 베이스니까."
양 과장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0.3초.
"네,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승복'이 아니었다.
짬밥은 내가 위인데 굴러온 돌한테 결재를 받으라니. 그의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나는 소리가 들렸다.
인천공항 제2터미널. 마티나 라운지.
냉전 현장.
테이블에 세 명.
아내는 떡볶이를 찌르며 중얼거린다.
"여기 왜 이렇게 짜? 로밍은 신청했어? 가서 데이터 안 터지면..."
나머지 말은 듣지 않았다. 익숙하다.
딸은 에어팟 맥스를 쓰고 있다.
눈은 폰.
입은 닫힘.
"여권 챙겼지?"
고개만 끄덕. 0.5초 지연.
소통율: 0%.
나는 맥주를 들이켰다.
쓰다.
20년 근속 포상 휴가.
유배와 뭐가 다른가.
가방 구석에서 묵직한 무게.
출발 전날, 링링이 내 책상 밑에 밀어 넣었던 쇼핑백.
"팀장님. 현지 바이어 접대용. 면세점엔 없는 물건. 타이밍 잘 보고 오픈하세요."
나는 화장실 가는 척 열어봤다.
뽁뽁이 포장.
손바닥만 한 디지털카메라.
[Canon IXY 400 / 2003년 모델]
기스투성이. 고물.
링링, 미쳤나. 최신 고프로도 아니고 이걸?
카톡이 왔다.
[링링] 따님 인스타 부계정 분석 완료.
#Y2K #빈티지디카 해시태그 급상승. 해당 모델 번개장터 품절.
지금입니다.
나는 쇼핑백을 닫았다.
데이터는 거짓말 안 한다.
자리로 돌아왔다.
딸은 틱톡. 아내는 떡볶이.
나는 무심하게 카메라를 딸 식판 옆에 툭 놓았다.
"집 정리하다 나왔는데, 쓸래?"
딸의 시선이 폰에서 카메라로 이동.
1초.
2초.
3초.
동공 확장.
에어팟 한쪽을 뗐다.
방화벽 해제.
"헐... 아빠. 이거 익시?"
"어. 그런가 봐."
"대박. 이거 당근마켓 얼마나 뒤졌는데!"
딸이 카메라를 켰다.
징- 낡은 기계음. 자글자글한 저화질 화면.
"와 미쳤다. 감성 쩐다. 아빠, 진짜 나 주는 거야?"
처음으로 웃었다.
사춘기 빙하기가 20년산 고물 앞에서 녹는다.
아내가 옆에서 말했다.
"당신이 웬일로 애 취향을 알아?"
"뭐... 트렌드 분석이 직업이니까."
거짓말.
비행기 탑승.
딸은 창가 자리. 카메라로 구름을 찍는다.
"아빠, 비켜봐. 앵글 가려."
퉁명스럽지만 목소리에 생기가 돈다.
시작은 성공.
폰이 진동했다.
[링링] 고객 만족도 상승 확인.
정산.
기기 매입가 (S급): 250,000원
희귀 매물 수배료: 100,000원
당근마켓 잠복 수당: 50,000원
Total: 400,000원 (귀국 후 인센티브 공제)
나는 헛웃음을 쳤다.
40만원.
딸 미소 구매가로는 싸다.
하지만 씁쓸하다.
나의 20년 부성애 < 링링의 3일짜리 데이터 분석. 이라니... 쯧
답장을 보냈다.
[승인. 고맙다.]
비행기 이륙.
중력이 몸을 누른다.
딸이 찍는 저화질 세상을 곁눈질로 본다.
흐릿하고 노이즈 낀 화면.
어쩌면 그게 우리 가족의 진짜 모습일지도.
고해상도 환상 vs 저화질 현실.
나는 창밖을 봤다.
구름이 흐른다.
비행기 안 좌석.
아내(좌), 딸(중앙), 나(우).
물리적 거리 0m.
심리적 거리: 측정 불가.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40만원짜리 고물 카메라 덕분에,
조금 가까워진 것 같다.
착각이라도 좋다.
비즈니스 인사이트 : Customer Journey Map.
고객이 원하는 건 제품이 아니라 '결핍의 해소'다.
딸이 원한 건 카메라가 아니라 '희소성이라는 자랑거리'겠지.
나는 20년간 딸에게 '용돈'과 '잔소리'를 줬다.
범용 상품.
링링은 72시간 만에 '레어템'을 찾았다.
대체 불가능.
마케팅 교과서에는 이렇게 나온다.
"Need(필요)를 충족시키는 것보다, Want(욕망)를 자극하는 것이 더 강력하다."
링링은 Need를 넘어 Desire를 찔렀다.
그녀는 딸을 '어린애'가 아니라 'Gen-Z Y2K 취향 보유자'로 정의했다.
정확한 타겟팅.
나는 가족을 '사랑'했지만, 링링은 가족을 '분석'했다.
결과는?
링링의 승리.
음...
[당신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Q1. 진심 vs 데이터
"진심은 통한다"는 믿음은 아름답지만, 비즈니스와 육아에서 진심은 '기본값'일뿐입니다. 상대의 마음을 여는 건 투박한 진심이 아니라 '상대가 지금 가장 필요로 하는 결핍'을 정확히 찌르는 것입니다. 당신은 가족을 사랑합니까, 분석합니까?
Q2. 업데이트된 데이터베이스
K가 딸을 '어린애'로만 생각하고 인형을 샀다면 실패했을 겁니다. 가족을 사랑한다면, 머릿속 데이터베이스를 최신 버전으로 업데이트하세요. 당신이 아는 가족은 몇 년 전 버전입니까?
Q3. 희소성의 법칙
흔한 용돈보다 구하기 힘든 '레어템' 하나가 더 강력합니다. 당신이 가족에게 줄 수 있는 대체 불가능한 희소가치는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