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 봉합, 워라밸은 대체...

ep.22_ 결재보다 어려운 가족여행

by 김멀똑


월요일 아침 9시.


습관적으로 "박 대리, 지난주 주간 보고서..."라고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오른쪽 대각선 자리, 박 대리의 책상은 깨끗했다.

그녀는 이제 '판교의 노비'가 아니라, '구독자 30만의 주인님'이 되어 떠났다.


그녀의 빈자리는 거대한 싱크홀 같았다.


데이터의 정합성, 제니퍼의 기분 예측, 그리고 나의 멘탈 케어까지 담당하던 나름의 '육각형 인재'가 사라지자, 사무실엔 뭔가 알 수 없는, 밀도가 느껴지지 않는, 기운 빠진 공기만 감돌았다.


나는 4B 연필을 내려놓고, 팀원들을 회의실로 호출했다.


"국내팀, 해외팀, 잠시 회의실로 들어오세요"




회의실 화이트보드에 박 대리의 업무 리스트를 적었다.

팀원들의 표정은 크게 아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우선은 가장 중요한, 데이터 분석.

일종의 대뇌피질 역할...


"링링. 앞으로 데이터 분석 업무 총괄을 맡아줘."


링링이 타이머를 누르며 즉각 반발했다.


"팀장님. 제 업무 로드(Load)가 120%를 초과합니다. 오버헤드(Overhead) 발생합니다."


뭐, 예상했던 반응이다. 나는 대꾸했다.


"대신, 박 대리 몫의 인센티브 40%를 자네 KPI에 배정하지. 그리고 서버 접속 권한 '관리자' 등급으로 올려주겠네."


링링의 눈동자가 '계산 완료' 신호를 보냈다.


"Deal. 엑셀 매크로 최적화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박 대리님 코드는 너무... '인간적'이었거든요."


이번엔 편도체 역할이 필요한데...

최적의 인물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양 과장. 너는 제니퍼 상무님의 '기분 파악(Mood Scanning)' 전담이다."

"네? 제가요? 저 상무님만 보면 오금이 저리는데... 그리고 저 영어를 잘 못해서.."

"너는 눈치가 빠르잖아. 상무님이 '아아(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찾는지 '뜨아'를 찾는지, 몽블랑 만년필 뚜껑을 여는지 닫는지 보고해서 내 방어율을 높여. 성공하면 내년 고과 'S' 보장이다."


양 과장이 벌떡 일어나 경례했다.


"충성! 저는 오늘부터 제니퍼 상무님의 '인간 습도계'가 되겠습니다! 기압골의 변화를 실시간으로 감지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어려운, 척수 반사신경...

이건 오랜 경험과 직감이 필요한 기능이다.

우리 조직에 한 사람밖에는 없다.


"부장님. 나머지... '논리로 해결 안 되는 일들'은 부장님이 맡아주십시오."


최 부장이 믹스커피를 휘저으며 코웃음을 쳤다.


"짬처리 하라는 거냐? 나보고 똥 치우라고?"

"아닙니다. 이건 '해결사' 역할입니다. 링링의 데이터와 양 과장의 눈치로도 안 뚫리는 막힌 혈(穴)들... 부장님의 그 '남대문 인맥'과 '동물적 감각' 아니면 누가 합니까?"


최 부장이 피식 웃으며 종이컵을 구겼다.


"말이나 못 하면... 알았어. 더러운 건 내가 처리할게. 대신 이번 주말 나 조기 퇴근이다?"

"뭐 이미 해주고 계시긴 해요, 다만, 박대리가 맡고 있는 업무들을 좀 포함해서"


수술 끝.


완벽하진 않지만, 굴러는 갈 것이다. 링링의 두뇌, 양 과장의 눈치, 최 부장의 직감이 합쳐진 새로운 업무 분장. 나머지 팀원들 일부는 자신에게 추가 업무가 오지 않은 것에 대한 안심의 표정, 그리고 나머지는 별생각 없어 보이는 표정들.


뭐 의미 없다.


하나하나 고쳐가면서, 대응하면 되겠지.




급한 불은 껐다. 하지만 진짜 불은 집에 있었다.


주머니 속의 '여행 상품권'과 '황금열쇠(3돈)'.

회사에서 준 20년 근속 포상이다.


나는 야심 차게 이번 주말 '말레이시아 3박 5일 가족 여행'을 기획했다.

국내 여행보다 훨씬 임팩이 있을 것으로 판단이 된다 ;


가족과의 관계 회복을 위한 골든 타임.


나는 엑셀을 켜고 [Project: Family Reunion] 시트를 만들었다.


06:00 기상

07:30 조식 (현지식 체험)

09:00 페트로나스 타워 관람 (동선 최적화)

12:00 이동 (택시비 절감 루트)


점심시간, 팀원들에게 이 계획표를 보여줬다. 반응은 싸늘했다.


"팀장님."


링링이 내 엑셀 화면을 보며 혀를 찼다.


"이건 여행 계획이 아니라 '행군 작전명령서'입니다. 따님(User)의 이탈률(Bounce Rate) 100% 예상합니다."

"진혁아, 아니 본부장님."


최 부장이 내 어깨를 쳤다.


"마누라 갱년기라며? 더워 죽겠는데 동남아 가서 저렇게 뺑뺑이 돌리면, 황금열쇠로 이마 찍힌다? 당신은 지금 '가장'이 아니라 '가이드' 놀이를 하려는 거야."


"그럼 어떡해요? 비행기 표는 이미 끊었는데."


최 부장이 내 엑셀 파일을 닫아버리며 말했다.


"강 팀장. 가정에서의 리더십은 '나를 따르라'가 아니야. '제가 결제했습니다'지."


그녀의 솔루션은 간단했다.


계획표 폐기: 무계획이 계획이다.

포지션 변경: 가이드(Leader)가 아니라 짐꾼(Porter)이자, 물주(Sponsor)가 되어라.

준비물: 엑셀 말고 '신용카드 한도 상향 문자'를 캡처해서 가족 단톡방에 올려라.


"가족 여행은 '패키지 투어'가 아니야. 아랫사람(가족)을 모시는 '의전(Protocol) 행사'라고 생각해. 자존심은 수하물로 부치고."


나는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회사에서는 고객의 니즈를 그렇게 따지면서, 정작 내 가족의 니즈(편안함, 쇼핑, 늦잠)는 무시하고 '나의 효율성'만 강요하고 있었다.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퇴근길.


나는 가족 단톡방에 엑셀 파일 대신 짧은 메시지를 올렸다.


[이번 주말 말레이시아 여행. 일정 없음. 기상 시간 자유. 먹고 싶은 거 다 사줌. (아빠 카드 한도 상향 완료)]


1분 뒤.


방문 닫고 살던 딸에게서 답장이 왔다.


[헐. 진짜? 면세점 가능?]


이어서 아내의 답장.


[호텔에 스파 있어? 예약해.]


성공이다.

제니퍼의 결재를 받는 것보다 10배는 짜릿한 '컨펌(Confirm)'이었다.


이번 주말, 나는 20년 차 팀장이 아니라 '신입 인턴 짐꾼'으로 돌아간다.


"링링, 나 휴가 동안 연락하지 마. 급한 건 최 부장님한테 넘겨."

"알겠습니다. 단, 부장님이 사고 치면 수습 비용은 팀장님 몫입니다."

"그래, 그 정도 비용은 감수해야지"


나는 공항 리무진을 예약하며, 딸아이가 보낸 이모티콘(하트 날리는 고양이)을 캡처했다.


이게 내 유일한 성과급이니까. 얼마만인가..





[당신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Q1. 누군가의 빈자리는 어떻게 채워집니까?

핵심 인재가 떠났을 때, 당신의 조직은 마비됩니까, 아니면 '프랑켄슈타인'처럼 기괴하게라도 굴러갑니까? 리더의 능력은 완벽한 팀을 만드는 게 아니라, 부족한 조각들을 맞춰서라도 굴러가게 만드는 '봉합 수술' 능력에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무엇인가요?


Q2. 가족에게 '결재'를 받고 있습니까, '통보'를 하고 있습니까? 회사에서는 "의견 수렴"을 외치면서, 정작 집에서는 "내가 돈 내니까 나를 따르라"며 독재를 합니다. 당신이 짠 엑셀 여행 계획표는 배려가 아니라 '통제 욕구'의 발현일지도 모릅니다. 이번 휴가, 당신의 계획표를 찢어버리고 가족들에게 '백지수표(위임)'를 건넬 배짱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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