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1_ 갱년기와 사춘기가 공존하는 경계에 서다
금요일 오후 3시. 나른한 시간.
박 대리가 내 자리 앞쪽으로 걸어왔다. 결재판은 없었다.
대신 그녀는 주머니에서 '레이저 거리 측정기'를 꺼냈다.
삑-
그녀는 내 미간과 자신의 미간 사이 거리를 쟀다.
"팀장님. 현재 거리 1.8m. 심리적 안전거리 확보되었습니다."
"또 시작인가? 오늘 결재할 거 없어?"
그녀는 품에서 하얀 봉투를 꺼내 책상 위, 정확히 1.8m 지점에 밀어 놓았다.
사직서였다.
(뭐!!! 갑자기...)
음, 언제가 이 날이 올 줄을 알았지만, 그게 오늘이 될 줄은..
퇴사 사유 역시 일반적이지 않았다 ;
[Project Closing: 채굴 완료 및 엑시트(Exit)]
"팀장님. 제 사이드 프로젝트인 유튜브 채널 <판교의 노비>가 구독자 30만을 달성했어요. 월 애드센스 수익이 제 급여의 2.5배를 돌파하여, 노동 소득의 레버리지 효과가 소멸했다구요~"
들떠서 말하는 박대리는, 그동안 이걸 어떻게 숨겨 왔나 싶었다.
"아니 이거 너무 갑작스러운 아냐?"
"네. 뭐, 인생이 원래 그렇잖아요, 팀장님.. 아니 본부장님께는 조금 죄송한 마음도 있지만요, 제 인생은 한번뿐이니깐..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오 상무님과 최 부장님의 꼰대 발언, 조 상무님의 데이터와 무속의 경계, 양 과장님의 아부 스킬, 그리고 팀장님의... 그 은밀한 '이중장부 협상 스킬'까지. 모두 제 채널의 '킬러 콘텐츠'였어요~~ 덕분에 실버 버튼 받았습니다."
머리가 멍해졌다.
그녀가 회의 시간에 미친 듯이 타이핑하던 게 업무가 아니었나?
녹음기를 켜고, 거리를 재고, 팩트를 체크하던 그 모든 행동이...
우리를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채굴'하기 위해서였다니.
"박 대리... 아니, 다혜야, 여기 좀 더 있으면 과장도 달고, 해외 주재원도..."
"본부장님. 회사원은 어차피 'NPC'잖아요. 저는 '플레이어'로 살고 싶거든요. 인수인계는 제 멤버십 전용 영상에 다 올려놨으니 링크 보내드릴게요. 구독, 좋아요, 알림 설정 부탁드립니다."
그녀는 정중하게 배꼽 인사를 하고 나갔다.
나는 멍하니 그녀가 두고 간 '박하사탕' 하나를 까먹었다.
화했다.
내 가장 완벽한 방패이자 오른팔이, 나를 '콘텐츠'로 팔아먹고 떠났다.
인생참..
박 대리의 빈자리는 컸다. 사무실은 다시 야생으로 돌아갔다.
링링 : "박 대리 나갔으니, 그녀 몫의 일을 제가 맡아서 하면 될까요? 성과급만 보장된다면, 제가 그녀의 업무 60% 정도 흡수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양 과장: "아이고~ 박 대리, 유튜버였다며? 나 몰래카메라 찍힌 거 아냐? 초상권 청구해야 하나? 아, 본부장님 저는 절대 안 떠납니다! 저만 믿으세요~ 제네시스 할부 48개월 남았습니다!"
최 부장: "요즘 애들은 무서워. 내 욕도 썼겠지? '라테는 말이야' 이거 조회수 잘 나온다며? 어휴, 세상 말세다, 아주 얼굴에 철판을 깔았네 그냥"
나는 4B 연필을 깎았다. 손이 떨렸다.
이제 이 탐욕스러운 맹수들(링링, 양 과장)과 감정적인 호랑이(최 부장)를 나 혼자 통제해야 한다. '팩트'와 '거리두기'로 제동을 걸어주던 브레이크가 사라진 폭주기관차.
제니퍼는 메신저로 쿨하게 말했다.
[Jennifer]: K. 박 대리 '실버 버튼' 받았다며? 우리 회사 홍보 채널로 제휴 가능한지 물어봐요. 역시 우린 인재를 키우는 곳이야! (엄지 척 이모티콘)
홍보? 상무님, 그 채널 제목이 <판교의 노비>입니다.
댓글창 보면 우리 회사 불매운동 일어날 걸요 ;
경기도의 34평 아파트.
내가 20년 동안 대출금을 갚고 있는 나의 성(Castle).
도어록 비밀번호를 누르는데, 왠지 모를 긴장감이 흘렀다.
띠로리-
문이 열리자마자 냉기가, 아니 열기가 훅 끼쳤다.
거실 소파에는 아내가 앉아 있었고, 방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이 집안에는 지금 세 개의 계절이 공존한다.
식지 않는 활화산 같은 아내의 갱년기는 그 어떤 때보다도 뜨겁다.
다가가면 타버릴 것 같은 극단의 고온.
반대로 얼음공주 딸래미는 늦게 찾아온 사춘기로 사실상 모든 대화는 단절된 상태.
카톡으로 오가는 대화라 해봤자, 용돈 입금 요청, 입금 완료 톡이 전부. 몹시 춥다.
그 와중에 난 회사에서 모든 에너지를 태우고 재만 남아 돌아온다.
따뜻한 밥과 위로가 필요하지만, 여기도 안전해 보이진 않는다.
"왔어?"
아내가 부채질을 하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어... 더.. 워?"
"나 지금 몸에서 불이 나! 당신은 좋겠다. 밖에서 맛있는 거 먹고 다니고, 에어컨 빵빵한 사무실에 있어서."
억울하다.
나는 오늘 편의점 샌드위치로 때우고, 링링과 양 과장 사이에서 등 터지다 왔는데.
하지만 말대꾸는 금물이다. 그녀는 지금 '핵폭탄' 스위치를 쥐고 있다.
"수진이는?"
"학원 다녀와서 문 잠그고 들어갔어. 건드리지 마. 오늘 모의고사 망쳤대."
나는 조용히 안방으로 들어갔다.
식탁 위에는 밥 대신 '카드 명세서'와 '학원비 청구서'가 놓여 있었다.
마치 박 대리가 놓고 간 사직서처럼, 건조하고 명확한 청구서들.
옷을 갈아입고 베란다로 나갔다. 아파트 단지의 불빛들이 별처럼 반짝였다.
담배를 한 대 물려다 내려놓았다. 아내(갱년기)와 딸(사춘기)이 냄새난다고 질색하니까.
나는 회사에서 나름, '협상의 달인'이었다.
중국 법인의 리베이트 장부를 찾아내고, 제니퍼의 헛소리를 필터링하고, 최 부장의 자존심을 세워주며 문제를 해결했다.
하지만 정작 내 가정의 문제는 해결할 수 없었다.
박 대리는 나를 'NPC'라고 했다.
맞다. 나는 회사라는 게임의 퀘스트를 수행하고, 집이라는 게임의 골드(돈)를 채굴하는 NPC였다.
정작 '나'라는 '플레이어'의 스토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갑자기 딸아이 방에서 쿵, 소리가 났다. 이어폰을 던진 건지, 책을 던진 건지.
아내는 안방에서 "아이고, 내 팔자야" 하며 TV 볼륨을 높였다.
나는 베란다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을 봤다.
푸석한 피부, 휑한 눈.
박 대리가 거리 측정기로 쟀던 1.8m.
어쩌면 나와 가족 사이의 거리는 1.8km,
아니 1.8광년쯤 떨어져 있는지도 모른다.
새벽 2시. 잠이 오지 않아 서재(라고 부르지만 사실상 창고방)에 앉았다.
피에르가 주고 간 '오피넬 나이프'로 연필을 깎았다.
사각. 사각.
검은 흑연 가루가 영수증 위에 떨어졌다.
박 대리의 마지막 말이 맴돌았다.
"팀장님. 그 표정 썸네일 각 나왔습니다."
지금 내 표정은 어떨까.
'구독 취소된 유튜버'의 표정일까, '폐업 직전의 자영업자'의 표정일까.
나는 핸드폰을 켰다. 유튜브 검색창에 <판교의 노비>를 쳐봤다.
최신 영상 썸네일. 내 뒷모습이 모자이크 처리되어 있었다.
제목: [꼰대 상사 유형 TOP 3: 겉은 스마트한 척하지만 속은 텅 빈 강정]
클릭하려다 멈췄다. 댓글을 볼 용기가 없었다.
대신 나는 [주말 가족 여행]을 검색했다.
강릉? 제주도?
아니다. 아내는 덥다고 싫어할 거고, 딸은 와이파이 안 터진다고 싫어할 거다.
나는 조용히 [갱년기 여성에게 좋은 선물]과 [사춘기 딸 용돈 시세]를 검색했다.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협상'이자 '생존 전략'이니까.
연필 끝이 뾰족해졌다.
나는 포스트잇에 한 문장을 적어, 잠든 아내의 머리맡과 딸의 방문 앞에 붙였다.
[내일 점심, 아빠가 쏜다. 메뉴 선택권 100% 양도, 예산 무제한]
비굴한가? 아니. 이건 비굴한 게 아니다.
이건 벼랑 끝에 몰린 가장이 던지는 '필살기(Ultimate Skill)'다.
창밖이 밝아온다.
다시 전쟁 같은 월요일이 올 것이다.
하지만 그전에, 나는 이 차가운 아파트라는 정글에서 주말을 버텨내야 한다.
이제 오른팔은 없지만,
나에겐 아직 깎아야 할 연필과,
입금해야 할 학원비가 남아 있으니까.
우리는 회사를 '채굴'하고 있는가, 아니면 회사에 '채굴'당하고 있는가?
박 대리에게 회사는 자신의 자유를 사기 위한 '광산'이었습니다. 그녀는 철저하게 필요한 만큼만 캐내고, 미련 없이 곡괭이를 던지고 떠났습니다. 이것을 '이기적'이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요? 반면, 평생을 바쳐 회사를 '집'처럼 여겼던 최 부장이나 강 팀장은, 어쩌면 회사가 자신들의 젊음과 열정을 채굴하도록 방치한 것은 아닐까요? 당신과 회사의 계약서에는 보이지 않는 조항이 있습니다. 당신은 이 거래에서 주체(Miner)입니까, 아니면 자원(Resource)입니까?
'쓸모'가 사라진 자리에도 '관계'는 뿌리내릴 수 있는가?
가족에게 강 팀장은 '돈 벌어오는 사람(ATM)'이었고, 강 팀장에게 가족은 '책임져야 할 의무였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기능(Function)'으로만 존재할 때, 그 기능이 고장 나면 관계는 어떻게 될까요? 은퇴한 가장, 전업주부가 된 커리어 우먼, 성적이 떨어진 자녀... 우리가 서로의 '유용함'을 증명하지 못할 때, 과연 현관문의 도어록은 우리에게 열릴까요? 우리는 '쓸모없는 서로'를 견딜 수 있는 사랑을 하고 있습니까?
연필은 깎일수록 뾰족해지지만, 동시에 짧아진다.
강 팀장은 밤마다 연필을 깎으며 날카로운 통찰력과 생존 본능을 다듬었습니다. 덕분에 그는 조직에서 가장 '뾰족한(유능한)' 무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대가로 그의 본체(자아)는 점점 짧아지고 있습니다. 언젠가 더 이상 깎을 곳이 없이 몽당연필이 되었을 때, 그는 여전히 쓰임새가 있을까요? 당신은 지금 자신을 태우거나 깎아서 빛을 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 빛이 꺼진 뒤에 남는 것은 따뜻한 재(Ash)일까요, 아니면 검은 그을음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