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4_ 눈물겹도록 아웃소싱된 가장의 기능
금요일 오후 6시 30분.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KL).
체감온도 39도. 습도 90%.
KLCC 공원 앞, 내 앞에는 폭발 5분 전의 시한폭탄 두 개가 서 있다.
"아빠. 예약했다며."
딸은 방화벽(에어팟 맥스)을 다시 반쯤 올린 상태다. 어제 40만 원짜리 '빈티지 디카'로 뚫어놓은 호감도가 이 살인적인 더위에 속절없이 증발하고 있다.
"당신 진짜... 엑셀로 분 단위 계획 짠다더니, 그게 '길바닥 웨이팅 2시간' 플랜이었어?"
아내의 목소리는 이미 영하 10도였다.
유명 루프탑 레스토랑. 예약 시스템 오류로 내 이름이 누락됐다.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매니저에게 '글로벌 B2B 협상 스킬'을 시전하고 있었다.
"Look, I'm a VVIP from Korea..."
"No reservation, No entry. Sir."
자본주의의 꽃, 50링깃(약 1만 5천 원) 짜리 지폐를 은밀히 쥐여주려 했으나, 매니저는 나를 '팁으로 새치기하려는 진상 관광객' 취급하며 밀어냈다.
아내가 혀를 찼다.
"당신 지금 웨이터한테 식당 바닥에서 PPT 하니? 그냥 딴 데 가자. 쪽팔리게 진짜."
가장의 권위가 KL의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서 타들어가던 그 순간.
"Hey, K!!! (헉헉)... 와, 찾았다 이 양반아!"
누군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내 어깨를 덥석 잡았다.
겨드랑이가 땀으로 흠뻑 젖은 화려한 바틱(Batik) 셔츠.
과거, 우리가 효율성을 명목으로 토사구팽 했던 현지 파트너, 잭키(Jackie)였다.
"잭키...? 네가 여긴 어떻게."
"내 구역(Territory)이잖아! 지나가다 우연히... 하아, 우연히 봤지!"
잭키는 숨을 헐떡이며 내 뒤에 선 아내와 딸을 쓱 훑어보더니 단숨에 상황을 파악했다. 그는 땀을 닦을 새도 없이 식당 매니저에게 돌진했다.
현지어(Bahasa)로 매니저의 귀에 대고 속사포를 쏟아내더니, 지갑에서 두툼한 현금 뭉치를 빼서 매니저 가슴팍에 꽂아 넣었다. (50링깃을 내밀던 내 손이 부끄러워졌다.)
매니저의 태도가 180도 돌변했다. 허리를 90도로 굽히며 VVIP용 벨벳 로프를 열었다.
"자, 제수씨(Madam), 그리고 공주님(Princess). K의 가족은 저에게 VIP입니다. 당장 들어가시죠!"
에어컨 바람이 쏟아지는 프라이빗 룸. 페트로나스 트윈 타워가 정면으로 보였다.
딸이 입을 떡 벌렸다.
"와... 아빠 친구야? 개쩐다."
아내가 나를 곁눈질로 쳐다봤다. 짜증이 섞인 눈빛이 아니었다. 명백한 '재평가'의 눈빛.
잭키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최고급 샴페인을 주문하며 호탕하게 웃었다.
"제수씨! K는 아시아 뷰티 업계의 전설입니다. 제가 이 사람한테 비즈니스를 배웠죠!"
나는 울컥했다. 나는 회사의 지시로 그를 잘라냈고, 그는 씁쓸하게 돌아서야 했다. 하지만 잭키는 그 아픈 기억을 '의리'라는 포장지로 덮어, 가족들 앞에서 내 기(氣)를 살려주고 있었다.
차가운 재무제표의 '판관비' 항목에는 절대 기록되지 않는, 뜨거운 휴머니즘.
버렸던 뗏목이 호화 요트가 되어 나를 구출했다.
같은 시각. 서울 본사.
지옥문이 열리고 있었다.
오후 3시. 조 상무가 링링을 호출했다.
"링링. 일본 지사 켄지한테 보낼 긴급 제안서. 월요일 아침 8시까지 내 책상 위에 올려놔. 주말 특근 가능해?"
"네. 제가 하겠습니다."
링링의 머릿속 컴퓨터가 주말 초과 근무 수당을 계산하며 타이머를 켜는 순간, 양 과장이 다가왔다.
"대리님. 혼자 주말 내내 고생하지 말고 내가 도와줄까?"
"아닙니다. 본부장님께서 양 과장님은 '가만히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칼 같은 거절. 양 과장의 안면 근육이 파르르 떨렸다.
명색이 과장인데, 굴러온 돌에게 철저히 배제당했다.
자존심에 치명상.
오후 3시 30분. 양 과장은 곧장 조 상무의 방으로 직행했다.
직보(Bypass). 조직에서 가장 달콤하고도 위험한 지름길.
"상무님, 일본 제안서 건. 링링 대리 혼자 주말 내내 끙끙대기엔 '비즈니스적 감각'이 부족할 겁니다. 제가 상무님의 '의중'을 담아 서포트하겠습니다."
조 상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둘이 주말 동안 잘 '협업' 해봐."
오후 4시. 링링의 메신저가 울렸다.
[Jennifer] 링링, 양 과장이 같이 하고 싶대. 혼자 안고 있지 말고 협업(Collaboration) 해.
링링의 손가락이 멈췄다. 데이터 분석가에게 가장 거슬리는 변수. '사내 정치'가 개입됐다.
"대리님, 파일 넘겨줘. 내가 템플릿에 예쁘게 얹을게."
양 과장이 의기양양하게 다가왔다.
"네. 보내드렸습니다."
양 과장이 자기 자리에서 파일을 열었다.
[JPN_Raw_Data_ver0.1.csv] (용량: 150MB)
화면을 본 양 과장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의 고물 PC에서 엑셀이 멈췄다.
겨우 열린 파일은 정제되지 않은 쉼표(,) 덩어리와, 외계어 같은 파이썬 크롤링 로직뿐이었다. 그래프도, 요약 텍스트도 없었다. 심지어 한글은 인코딩이 깨져서 '웱뗅뛠'으로 보였다.
"이... 이게 뭐야? 글씨가 다 깨졌잖아! 바이러스 보냈어?!"
"UTF-8 인코딩도 모르십니까? 데이터는 완벽합니다. 저는 제 R&R(데이터 추출)을 끝냈습니다."
링링은 타이머를 끄고 가방을 챙겼다.
"이제 폰트 크기 맞추고, 상무님 입맛에 맞게 '감성'을 담아 표를 그리는 '협업'은 과장님 몫이죠. 월요일 아침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주말 잘 보내세요."
양 과장의 얼굴이 토마토처럼 붉어졌다.
링링은 화를 내지 않았다. 그저 완벽하게 계산된 '날것의 데이터'를 던져, 상대의 무능을 시스템적으로 짓밟았을 뿐이다.
퇴근길 탕비실. 최 부장이 믹스커피를 타며 그 광경을 지켜봤다.
"어휴... 강 본부장 없으니 머리랑 손발이 따로 노네. 월요일 아침에 조 상무 책상 위에 아주 끔찍한 '좀비'가 올라가겠구먼."
다시 쿠알라룸푸르. 밤 10시.
호텔 침대에 누웠다. 아내는 스파를 받고 와서 기분이 최고조다.
"당신 친구 말이야. 당신 밖에서는 꽤 대접받고 사나 봐?"
"뭐... 내가 비즈니스 짬밥이 20년인데. 내가 뿌린 인맥이 있잖아."
아내가 내 쪽으로 돌아누웠다.
"고생했어. 맨날 야근만 하느라 헛살진 않았네. 멋있었어, 오늘."
무뚝뚝한 아내의 투박한 위로. 나는 어깨가 으쓱해졌다. 휴머니즘의 승리다. 역시 사람을 남기는 장사가 최고다.
그때, 내 폰이 짧게 진동했다. 링링이었다.
본부장님. 쿠알라룸푸르 '가족 여행 프로젝트'는 잭키(Jackie) 덕에 성공적으로 마감되었습니까?
순간,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황급히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오늘 오후, 잭키가 '한국 지사 신규 벤더(Vendor) 등록' 건으로 사정사정을 하길래, 제가 미션을 하나 줬습니다. 지금 본부장님이 KL에 가족 여행을 가셨다. 그런데 그분이 엑셀로 일정 짜는 수준을 보아하니, 분명 길바닥에서 사모님께 엄청 깨지고 있을 거다. 따님 인스타 아이디 알려줄 테니 동선 추적해서 기(氣) 좀 살려놔라. 그럼 월요일에 벤더 등록 기안 올려주겠다.
나는 숨을 헉 들이마셨다.
벤더 등록 조건으로 물류 단가 5% 인하도 확답받았습니다. 오늘 드신 샴페인은 잭키 대표의 BTL 마케팅 비용(판관비)으로 처리될 겁니다. 가장으로서의 체면 보존 서비스, 만족하셨습니까? 월요일 뵙겠습니다.
나는 멍하니 변기 뚜껑 위에 주저앉았다.
루프탑 앞에서의 우연한 만남? 우연은 무슨.
잭키는 무더위 속에서 우리 딸의 인스타 스토리를 실시간으로 새로고침하며, 내가 가장 곤란해질 타이밍을 골라 뛰어든 것이다. 어쩐지 땀을 비 오듯 흘리더라니.
아, 휴머니즘? 의리? 사람을 남기는 장사?
웃기고 있네.
이 모든 감동적인 서사는, 신규 벤더 등록을 담보로 한 링링의 '가족 평화 외주(Outsourcing) 발주'와 잭키의 처절한 '영업 활동'이 만들어낸 한 편의 자본주의 연극이었다.
나는 헛웃음을 터뜨리다 못해 변기통을 부여잡고 낄낄거렸다.
"독한 기집애... 넌 진짜 내 월급의 반은 떼가야 한다."
처참할 정도로 철저한 비즈니스.
하지만 이상하게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완벽한 안도감이 들었다.
감정과 의리는 언제든 배신하지만, 이해관계(Interest)로 묶인 거래(Transaction)는 이토록 정확하고 안전하다. 그 덕분에 나는 오늘 아내의 존경과 딸의 환호를 샀으니까.
오늘은, 자본주의 시스템이 완벽하게 구원해 낸 나의 '아웃소싱된 가장의 역할'을 즐길 시간이다.
[당신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Q1. 기적을 믿습니까, 아니면 기획을 믿습니까?
우리는 종종 비즈니스에서의 호의를 '나를 향한 의리'로 착각하며 감동합니다. 하지만 K를 구원한 것은 우정이 아니라, 신규 벤더 등록이라는 명확한 '보상'과 링링의 치밀한 '정보 거래'였습니다. 당신의 인맥은 당신의 '매력'으로 유지됩니까, 아니면 '이익(Benefit)'으로 굴러갑니까?
Q2. 당신은 '위임'을 했습니까, '방치'를 했습니까? 명확한 경계(R&R) 없이 던져진 권한은 '협업'의 도구가 아니라 서로를 찌르는 '칼'이 됩니다. 리더가 자리를 비웠을 때 부하직원들이 서로의 무능을 증명하기 위해 싸운다면, 그것은 실무자의 탓이 아니라 리더의 직무유기입니다. 내일 당신이 출근하지 않는다면, 당신의 팀원들은 조화롭게 돌아갈까요, 아니면 각자의 폴더에 '비밀번호'를 걸까요?
Q3. 오늘, 당신의 자존심은 누가 결제했습니까? 가족 앞에서 세운 K의 번듯한 체면은, 사실 부하직원(링링)이 하청을 준 협력업체(잭키)의 '판관비'로 유지되었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알량한 권위와 평화의 이면에는, 이렇듯 누군가의 치열한 노동과 보이지 않는 엑셀 시트가 숨어 있습니다. 오늘 당신이 가족 앞이나 회사에서 어깨에 힘을 줄 수 있었던 건, 정말 당신 혼자만의 능력 덕분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