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퇴직, 7명의 책상을 빼다

ep.28_ 회사를 다니는 진짜 이유

by 김멀똑


몇 주가 지난 월요일

오전 8시 30분.


발리에서 신혼여행을 마치고 복귀한 링링이 파티션 사이를 돌며 면세점 봉투를 배급하고 있었다.


"발리산 마카다미아 넛입니다. 현지 도매가 매입으로 개당 단가를 낮췄습니다. 당 충전 후 오전 업무 효율 3% 상승을 기대합니다."


가장 낭만적이어야 할 허니문 답례품마저 철저하게 자본주의적 투자대비수익(ROI)으로 치환하는 저 지독한 일관성. 양 과장이 헛웃음을 지으며 견과류 봉지를 깠다.


하지만 사무실의 얄팍한 평화는 거기까지였다.


사내 인트라넷에 팝업창이 떴다.


[경영 효율화를 위한 특별 희망퇴직(ERP) 시행 공고]


조 상무(Jennifer)의 호출이 떨어졌다. 그녀는 창밖을 보며 미간을 짚고 있었다.


"K. 결국은 윗선에서 우리 본부 인력 20% 감축 지시가 떨어졌어요. 내가 주말에 타로를 뽑아봤는데, '은둔자(The Hermit)' 카드가 정방향으로 나오더라고. 썩은 가지는 쳐내고 본질에 집중하라는 Universe의 Sign이야. 내일까지 살생부 추려와요. K가 못하면 내가 아무나 찍을 거니까."


자리로 돌아온 나는 회의실로 22명의 전 직원을 소집했다.


내 손에는 뾰족한 4B 연필도, 살생부도 없었다. 나는 화이트보드에 커다랗게 원(Circle) 하나를 그렸다.


"본부장으로서 제가 직접 찍어서 내보내는 권고사직은 없습니다."


술렁이던 공기가 얼어붙었다. 안도와 의심이 교차했다.

나는 화이트보드를 짚었다.


"대신, 기존의 관행, 사내 정치, 연차 다 걷어내고 가장 밑바닥의 본질만 남기겠습니다. 우리 본부의 존재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나는 마커로 원 안에 적었다.


[효율적으로 물건을 팔아, 글로벌 캐시플로우로 브랜드를 만든다]


"앞으로 모든 업무와 평가는 이 기준 하나로만 진행됩니다. 이 숨 막히는 속도전과 효율성 압박을 견디기 힘들 것 같은 분들은... 지금 회사가 미끼로 던진 18개월 치의 위로금을 챙겨서 나가는 게 현명할 겁니다. 선택은 여러분 몫입니다."


그것은 배려가 아니었다. 스스로 감당 못 할 자들은 알아서 떨어져 나가라는, 아주 정중하고 잔혹한 선전포고였다.





금요일 오후.


내 책상 위에는 7장의 사직서가 놓여 있었다. 엑셀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번아웃이 온 과장들, 정치질로 연명하던 부장급들이었다. 물론 가지고 있던 코인이 대박이난 MZ직원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건 무자비하게 잘라내는 구조조정이 아니라, 철저한 '인적 자원의 거름망 필터링'이었다.




22명에서 15명의 정예 요원(혹은 독종들)만 남은 빈 도화지.


나는 이들을 기존의 파벌이 아닌, 완벽한 공정 라인으로 재조립했다.

팀보다는 파트로서, 가볍게 빠르게 움직이는 게 필요하다.


실탄을 확보할 [국내 파트],

전선을 확대할 [해외 파트],

그리고 이 둘을 연결하고 조종할 뇌, [비즈니스 전략 파트].


해외 파트의 수장 자리를 채우기 위해, 나는 본사 마케팅실에서 남미 출신의 외국인 직원 한 명을 차출해 왔다.


이름은 마테오(Mateo).


그는 첫 출근 날, 핑크색 파스텔 톤의 실크 스카프를 두르고 섬세한 손길로 데스크를 세팅하고 있었다. 모니터 옆에는 반려묘 3마리와 반려견 2마리의 사진이 든 은색 액자가 쪼르르 놓였고, 책상 위에는 각기 다른 질감의 비건 핸드크림과 유기농 미스트가 일렬로 정렬되었다.


"올라(Hola)! 본부장님. Buenos días (좋은 아침). 저 마테오입니다."


그가 수줍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국말이 아직은 조금 서툰, 사내에서 유명한 섬세한 뷰티 매니아이자 게이(Gay) 직원. 그가 바로 마테오였다.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책상 위에 소형 가습기를 틀고 얼굴에 선크림을 꼼꼼하게 덧바르기 시작했다.


그때, 전략 파트의 링링이 안경을 척 치켜올리며 건조하게 물었다.


"마테오 파트장님. 실내 조도(Lux) 데이터상 자외선 노출량은 제로에 수렴합니다. 실내에서의 과도한 자외선 차단제 도포는 화장품 소모 비용 대비 비효율적 행위 아닙니까?"


마테오가 토끼처럼 놀란 눈으로 링링을 쳐다보더니, 서툰 한국어로 더듬더듬 대꾸했다.


"오, Dios mío (오 마이 갓). 링링 대리님. 이 사무실, muy seco (너무 건조해). 내 피부, 사막 같아요. 그리고 이 모니터 빛, 블루라이트? 피부에 veneno (독)입니다. 대리님 쿨톤 피부, 이거 안 바르면 rápidamente (빨리) 늙어요. 이 에센스 텍스처 한번 느껴볼래요?"


"저의 노화 속도는 엑셀 작업 속도와 무관하며, 스킨케어에 소요되는 시간은 일평균 3분을 초과하지 않습니다. 사양하죠."


인간 전기톱이라 불리는 자본주의 소시오패스(링링) vs 동물과 화장품 텍스처를 사랑하는 섬세한 뷰티 소울(마테오).


사무실 한가운데서 파이썬 코드와 뷰티 에스테틱이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었다. 양 과장은 미어캣처럼 두 사람 사이에서 눈동자를 굴리고 있었고, 국내 파트의 최 부장은 "외국 친구가 나보다 피부 관리를 더 하네"라며 혀를 찼다.




나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화이트보드 앞으로 나갔다.


"Stop. 둘 다 완벽해. 그래서 우리 조직을 3개의 파트로 찢어 놓은 거야."


나는 마커를 들고 조직도를 그렸다.


"1단계. [비즈니스 전략 파트: 양 과장 & 링링]"


"링링. 너는 국내와 해외 비즈니스의 전략적 방향과 데이터 분석을 총괄해 줘. 양 과장은 링링의 그 외계어 같은 데이터를 경영진과 지원부서가 알아먹게 인간의 언어(API)로 통역해서 전략자료를 작성한다, 제니퍼의 일상적 멘탈 커버는 디폴트로"


"2단계. [국내 파트: 최 부장 & 국내 영업진]"


"지금 잘 나가고 있는 MBS(Multi Brand Store) 채널을 비롯해, 라이브, 이커머스 채널에서 남대문 B2B거래처까지. 최 부장님이 총괄해 주세요. 국내파트는 '캐시카우(Cash Cow)'가 되겠습니다. 최대한 많은 돈을 벌어 주세요"


"3단계. [해외 파트: 마테오 & 해외 영업진]"


나는 마테오를 가리켰다.


"마테오. 네 역할은 링링이 찾은 그 삭막한 시장 데이터에, 화장품의 '서사와 텍스처'를 입히는 거야."


마테오가 미스트를 뿌리다 말고 눈을 깜빡였다. "서사...? Historia (이야기)?"


"그래. 남대문 뒷골목에서 쓸어 담은 덤핑 화장품. 이걸 단순히 '싸구려'로 팔면 우리는 보따리상에 불과해. 하지만 마테오, 네가 가진 그 섬세함으로 크루얼티 프리(Cruelty-free, 동물실험 반대) 감성과 K-뷰티 특유의 은밀한 에스테틱을 틱톡 숏폼으로 풀어낸다면? 그건 덤핑이 아니라 아세안 밀레니얼들이 열광하는 '숨겨진 인디 브랜드'가 되는 거야."


마테오의 눈이 계산적으로 반짝였다. 감동해서가 아니었다.


"아! 본부장님 말은, 이 '덤핑' 물건들, 내 틱톡(TikTok) 감성으로 포장해라? Comprendo (이해했어요). 그럼 회사 마케팅 비용으로 콘텐츠 만들면, 내 개인 채널 팔로워도 늘어나요? 오케이. Trato hecho (거래 성사). 우리 집 Gato (고양이) 다섯 마리, 최고급 유기농 캔 먹여야 해요. 저, 열심히 할게요."


철저한 개인적 이득(인플루언서 성장 및 반려동물 부양)을 위한 거래 성사.


링링이 계산기를 두드리며 거들었다.


"해당 감성 마케팅이 성공할 경우, 아세안 도매단가를 현행 대비 12% 인상할 수 있는 가격 탄력성(Price Elasticity)이 확보됩니다. 환영합니다, 마테오 파트장님."




회의가 끝났다.

20%의 인원을 감축하고도, 20% 성장을 하라는 경영진의 메시지는 차마 전달하지 못했다.


우선은 조직이 하나가 되어, 뛰어다니는 것이 우선이겠다 싶었다.


국내 파트 최 부장은 생존을 위해 벤더 계약을 맺으러 뛰어 나갔다. 전략 파트의 링링은 인센티브를 위해 데이터 맵핑을 시작했고, 해외 파트 마테오는 자신의 틱톡 계정을 키우기 위해 '한국의 숨겨진 비건 뷰티 시크릿' 기획안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군더더기 없이 걸러진 15명의 완벽한 이기주의자들.


각자의 명확한 욕망과 결핍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했다. 감동이나 의리가 아닌, 철저한 '이해관계의 일치'가 만든 견고한 시스템.


나는 내 방 창가에 서서 판교의 빌딩 숲을 내려다보았다.


유리창에 21년 차, 50을 바라보는 중년 사내의 서늘한 미소가 비쳤다.


나는 지금 단지 회사의 한 '본부'를 뜯어고친 것이 아니다. 회사의 자본(국내), 회사의 데이터 시스템(전략), 그리고 마테오라는 회사의 인적 자원(해외)을 엮어, 나만의 비즈니스 모델을 바닥부터 테스트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일개 월급쟁이의 업무가 아니라, '미래의 창업자(Founder)'가 남의 돈으로 진행하는 거대한 실험이었다.


만약 내가 여기서 15명의 조직을 완벽하게 굴려 이 시스템을 입증한다면...


1년, 혹은 2년 뒤에 이 낡은 사원증을 벗어던지고 독립했을 때, 나는 실패할 확률이 현저히 낮은 게임을 시작할 수 있다.


이 회사는 나에게 월급을 주는 곳이 아니다.


내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리스크를 시험해 볼 수 있는, 가장 완벽하고 거대한 '비즈니스 시뮬레이션 카지노'였다.


나는 주머니 깊숙한 곳을 만지작거렸다. 부러진 4B 연필은 진작에 내다 버렸다.


이제 엑셀의 빈칸을 채우며 회사의 부속품으로 사는 일은 끝났다.


회사를 철저히 이용해 먹고, 진짜 내 세계를 설계할 서막(Prologue)이 오르고 있었다.





[당신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Q1. 당신은 '살생부'를 씁니까, '거름망'을 짭니까? 무능한 리더는 위기 때마다 누구를 자를지 이름(살생부)만 고민합니다. 하지만 유능한 리더는 '제1원칙'이라는 절대 기준을 세워, 감당 못 할 자들이 제 발로 걸어 나가게 만듭니다. 지금 당신의 조직에서 '진짜 일하는 자'와 '버티는 자'를 걸러낼 가장 잔혹하고 명확한 기준(거름망)은 무엇입니까? 당신은 그 스위치를 켤 용기가 있습니까?


Q2. 극단을 엮어낼 '번역기(API)'가 있습니까? 비즈니스는 차가운 '숫자(데이터)'와 뜨거운 '욕망(서사)'의 충돌입니다. 두 세계가 서로를 공격하지 않고 기계처럼 맞물리려면, 이질적인 언어를 통역해 줄 시스템과 연결자가 필수적입니다. 당신은 상극의 재능을 가진 인재들을 각자의 파티션 안에서 싸우게 둡니까, 아니면 철저한 이해관계로 엮어 시너지를 내도록 판을 짜고 있습니까?


Q3. 회사의 '부속품'입니까, 회사를 '이용하는 자'입니까? 월급쟁이는 회사를 위해 자신의 시간을 태우지만, 미래의 창업자는 남의 자본과 리스크를 이용해 내 비즈니스를 테스트합니다. 회사는 뼈 묻을 곳이 아니라, 내 돈 안 들이고 돌려보는 '공짜 시뮬레이션 카지노'입니다. 오늘 마주한 이 지독한 업무 스트레스를 '독립을 위한 경영 수업'으로 비튼다면, 당신은 지금 당장 이 회사에서 무엇을 더 훔쳐 배우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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