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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 05
내 생애 가장 빛나는 날은
1973년 9월 11일이다.
그렇게 나는 태어났다.
여자아이로
내 첫 만남이 엄마였겠지만
나는 기억하지 못하고
나는 내 엄마와 함께 커갈 수 없었지만
내 어린 시절은
의례적인 삶이었으리라.
그렇게 나는 육십에 선물 받은
5남매를 둔 할머니의
첫 손녀가 되었고
그 아홉의 손자 손녀 중
내가 그 첫 번째다.
내 할머니는 내게 엄마셨다.
태어나 그렇게 두 돌이 되기 전
할머니와 나의 운명은
그렇게 십 오년을 함께 살았다.
그래서 내 할머니를 보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단번에 알 것 같다.
내 할머니는
나를 많이 존중해 주셨다.
늘 내게 사랑을 주셨다.
심하게 홍시 하나를 얻어 오셔도
어린 손녀주려
손수건에 다 터지도록 싸들고 오셔서
나에게 먹이셨다.
가난한 할머니께선
잔칫집에 혼자 가시면
한복 안 바지주머니에
뭘 그렇게 주섬주섬 넣어 오셔선
가늘고 어린 내가 먹는 것엔
늘 행복해 하셨다.
너무도 과분하게 아끼셨다.
5~6살까지 업고 다니셨다.
그땐 몰랐다.
할머니가 늙은 사람이란 걸
그렇게 나는 지극정성 할머니 손에서 컸다.
방학이면 늘 기차를 태워 데리고 다니셨고
온 동네 동냥한 먹거리들은
온통 내 몫이었다.
참으로 위대한 사랑이었다.
늘 내가 불쌍하다고
늘 나만 보면 그렇게 부르셨다.
불쌍한 것, 불쌍한 것.
그렇게 나는 불쌍해서 황송한
할머니의 대접과 신뢰를 받으며 자랐다.
지금 생각해 돌아보면
나는 할머니 덕에
오늘의 내가 있다는 것에 틀림이 없다.
신세 망치는 어긋난 길 앞에 설 때마다
나는 할머니의 사랑에 어긋나지 않도록
나 자신에게 엄청 노력했다.
그 어떤 혼선 앞에서
혼자 남아 설 때도 그랬다.
할머니가 떠나가고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사랑해 주는 이를 잃는 슬픔은
무능한 현실 앞에
헤어 나올 수 있는 용기가 되었다.
성격을 바꾸고
누군가에게 비위를 맞추고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버릇은
이때부터 생겼다.
뒤늦게
내가 잘 되어야
할머니께서 주신 사랑에
빚 갚은 일.
재능과 능력이 없어서
남들의 수십 수백 배로 시도했고
절대 안 되는 일은 만들지 않았다.
다들 가난한 동네
가난한 친구들 속에
가난한 마인드 안에서
잘될 리 없다.
미련 없이 그 안을 박차고 나왔다.
근근이 먹고 사는 사람들이 싫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보였고
성공한 사람들도 보이기 시작했다.
빈손으로 맨손으로
결코 쉬운 일이 아닌 성공을 위해
끼니를 아끼고
하루 24시간 밖에 없는 걸 억울해 하며
저절로 철이 들었고
그로 인해
하고 싶어도 못하는 게 무엇인지 적기 시작했다.
자존심과 자존감
내게 선물하고 싶은
나를 지탱해 준 것은
자존심이 아닌 자존감이었다.
그렇게 되기 위해
밥은 굶어도 책은 굶주리지 않았다.
돈 벌어 책을 사도
남의 책은 빌려 읽지 않는 자존심도 지켜가며
사회수준 문화의 격식을 생겨나게 했을까.
내게 할머니는
사랑을 넘어
꿈의 작용이 되신 분이셨다.
그렇게 치열하게 살아낼 수 있었던 원천은
할머니의 깊은 손녀 사랑이
나를 각성시켰던 것 같다.
이젠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지도
10년이 훌쩍 넘어
내 가난해방을 보시지는 못하셨지만
나는 할머니께서 남기신 숙제를
또 이렇게 풀어가고 있다.
나의 자식에게
언젠가 만나게 될 나의 손녀 손자들에게
할머니의 사랑 그대로
할머니 사랑보다 훨씬 더 뜨겁게 훨씬 치열하게
내 영토의 확장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할머니가 남기신 정신적 유산은
내가 내 새끼와 그 새끼들에게
돌려주는 것이 도리일 것이다.
나로서는 조금은 억울했던 유년시절일 수 있지만
그 억울함에
현실을 뛰어넘는
이 강한 벽을 뛰어넘었으니
제대로 살아낸 것 같다.
내 할머니는
광산 김씨로 1912년생이시다.
일제시대에 태어나셔서
6•25 동란을 겪으시며
광복 후 자식 5남매에 나까지
손발이 닳도록 가난과 싸우시다
94살의 나이에
치매 5년을 앓으시다 돌아가셨다.
총기가 있으신 분이셨다.
아마 할머니의 영향력이
정 많은
조금은 사람 같은
나를 만드셨는지 모르겠다.
물론 만만치 않은 콤플렉스와 열등감도 함께 지녔지만
인생이란
살아보니 억울하지만
그것으로도 얻는 게 있을 것 같다.
이 글을 읽는
다음카페 왕비재테크 당신 또한
당신 삶에 분명
결정적 존재가 있으리라 믿는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서
그 존재로부터
인생의 중요한 밑천이 된다면
때론 너무 서럽고 힘들고 괴로운 일들이
발목을 잡고
이를 악물어 살아내야 하는 현실이 오더라도
가끔은 아파서 밥 한 숟가락 못 먹는 날이 있더라도
살아내어지리라.
그 사람의 지배가
당신의 영향력이 되어
좀 더 성숙한 자아로 살아가는데
책임감을 심어주는 것이 아닐까.
이젠 나 역시
그 지긋지긋한 청춘에서 벗어났다.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절,
굽신 거리며 살았던 내 영혼
이젠 그 녹슨 기억을 지우려 애쓴다.
나의 잔인한 그 시절에
나는 내 할머니가 계셔서 싸워 이길 수 있었듯
오늘 당신과 내가 물살을 거슬러 헤엄쳐 가더라도
책임과 믿음, 사랑과 신뢰로
아무도 예상치 못하는 미래를 만들어
보상받고 공유하자.
부단한 담금질과 절박한 간절함으로
그 어떤 억울함도 원망하지 않으며
신세를 지고
또 그렇게
다음 세대에게
신세를 갚으며 살자.
다음 세대는
우리를 영영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우리 삶에
생명이 생명에게
무엇을 남기고 갈 수 있다는 건
바로
사랑이고
정신이리라.
6월 6일 현충일도 그렇듯
이번 미션은
조금이라도 주고 가는 조상이,
그런 할머니가,
그런 할아버지가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