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19.06.03
돌담회 봉사 갔다 오던 일요일
시내 나가 제일서적에서
내가 아끼는 일번 책
춘원 이광수의 <사랑>
책 앞에 쓰여진 문구 뒤에
6천원이란 가격의 정가가 박혀있다.
94년 내 나이 스물두 살.
그때 나는 이 책을 읽고
내 사랑의 그릇된 정의를 안고 살았다.
사랑이란 제목 앞에
나는 천겁 만겁 그 억겁의 세월을
너무 이른 나이에 심취해서일까?
사랑이 뭘까?
절대 사랑을 해보지 않고 모르는 게 사랑이고
사랑이란,
단 한번이라도 받아보지 않았다면
절대 깊이있는 사랑을 모른다.
절대 모른다.
결혼이 사랑의 종착역도 아니고
결혼이 사랑의 결실이라
결코 정의 내릴 수 없는 이유들은
분명히 너무 많다.
사랑은
유희가 주는 것만으로 채울 수 없고
사랑이란
시절이 아니라 영원이고
사랑한다는 건
온 우주를 안는 포옹이다.
한낱 육체적 결합이 주는 안도와 평안이
익숙해진 것에 사랑이라 믿고
착각할 수도 있으며
보이는 사랑만 믿으며
자기가 받은 것이 전부 사랑이라
오해하며 믿고 살 수도 있고
그래서 사랑이란
육체와 정신을 절대 하나로 결합시켜야 되는 정의가
사랑일까?
사랑.
이 세상 가장 흔하게 쓰는 단어가 사랑이고
이 세상 가장 어려운 숙제가
사랑일 수 있다는 것에
누구나 공감하듯
사랑은
애처롭고 애잔하고 안쓰러움인 것이다.
사랑에 질투가 따르고
불륜이라는 남녀 간의 색정은
사랑이 아니라
인간사 욕심이 빚어낸 집착이라 말하기 어렵고
소유에서 오는 쾌락일지 모르는 게
사랑이 아닐 수 있는 것.
그런데 사랑은
추악한 그 어떤 더러움이 없어야
사랑이 될 수 있다.
사랑에 빠져 다투고 싸우고
폭행에 폭언이나
추태나 추악한 감정이 깃들어야 하는 것은
절대 사랑이 아니다.
그렇다.
스물두 살 내가 배운 사랑은 그런 것이었다.
책으로 배운 사랑이라기엔
내게 너무 큰 세계였다.
'사랑'이란 책을 읽고
나는 공상을 꿈꿨는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사랑에 실패했다.
스무 살에 나는 사랑을 몰랐고 sex를 몰랐다.
그건 스물두 살에도 몰랐다.
그냥 단지 그 시절 무수히 읽었던
사랑이 주어가 된, 주제가 된 글 속에 묻혀
사랑을 배웠다.
사모란 단어가 주는 가슴뜀을 그때 처음 알았다.
사랑은 뜨거운 것 만이 아니라고
소설 속 사랑에 빠져
현실을 허우적거리면서 사랑에 빠졌다.
그렇게 스물두 살에
춘원 이광수의 사랑이란 책 안에서
마음에 사랑을 늘 붙잡아매어
난 늘 사랑 이야기를 썼다.
아니 지금도
밥벌이를 손에서 놓을 수 있을 자유를 만난다면
나는 사랑 이야기를 쓸 것이다.
물론 한강 같은 굵직한 작가의
부러진 연필심보다 작은 석탄가루 수준의 글을 쓰더라도
나는 변치 않을 수 없는 사랑이 아니라
변할 수밖에 없는 사랑도
사랑이라고
내가 배운 사랑을 쓰고 싶다.
사랑은 변하기 전까지만 사랑이라고 말이다.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닐까?
속박 속에 남녀 간의 사랑이란 아름다운 구속.
그런데 그 때 내가 얻은 영감의 사랑은
사람이 죽어 물로 바뀌고 흙으로 녹아들어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변하지 않는 존재여야 한다는 춘원의 글에서
나는 더러운 속인의 사랑을 구별할 수 있게 되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돈을 벌었을까?
사랑이란 게 그런거다.
어느 글처럼
'가난이 창문 틈으로 들어오면 사랑은 문으로 나간다'고 하듯
내가 배운 사랑은 더러운 속세의 때를 묻혀버렸다.
그래서 사랑은 원한이 되어서도 아니 되며
사랑은 원수가 되어서도 안 된다.
그런데 내가 산 속세의 사랑은 그랬다.
내 사랑부터
혼인이란 것이 주는 기쁨에는 책임이 따르듯
사랑이 주는 세상 안에서는 전부가 있다.
연애도 그리고 이별도 결혼도 이혼도 그렇고
다시 재혼도 그런 게 아닐까?
곡절 많은 인생이라고
사랑을 많이 했다고
손가락질 할 수 없음은,
다 늙은 뒤에 인생 끝자락에 수절과부로 살았다고
무엇도 달라지지 않는 이유는,
사랑이란 횟수에 있지 않다.
10번을 사랑해서 10번을 결혼하고 10번을 이혼해도
사랑이 아닐 수 있었고
그래서 헤어진 것이 아닐 테지만
사랑이란 꼭 함께 동거해야 한다는 것으로
사랑을 더 많이 하는 것으로
절대 정의될 수 없다.
사랑은
함께 산다고 같은 이불을 덮고 산다고
다 사랑이 아닐 수도 있음은
sex 없이도 사랑할 수 있다는 게 증명되고
한평생 멀리서 바라만 보고도
사랑하며 살아낼 수 있는 이별도
사랑이 된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라는
기형도의 시 귀처럼
나는 사랑을 하며 살아가는 일에
시작과 멈춤은
쌍방이 아니라
사랑의 실체
자신만이 가지는 약속일 뿐이기도 하다.
세세생생 같이 살 수도 있지만
정신의 충만으로
톨스토이의 글 실력으로도 해설되지 못하는 것이
사랑인 것이다.
그래서 사랑이란
사모와 그리움인 듯하다.
나는 그런 사랑을
스물두 살에
사람에게 인연이란 게 있다는 걸 모르고
인연을 모를 나이에
겁 없이 사랑을 믿었는지 모른다.
사랑에도 지혜가 필요한지 몰랐다.
내가 한 사랑은 불나방처럼 대책이 없었고
일평생 산다는 게 뭔지도 모르고 사랑을 한 죄
사랑이 무서운 것이란 걸 모른 죄
그렇게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어 철이 들어가며
마주하게 된 나의 사랑은
속이 없었다.
알맹이 없는 사랑을 했다.
사랑은 무심코 찾아오지만
관계란 것은
그리 무심히 정리될 수 없다는 것마저 몰랐던 시절
사랑은 그랬다.
본능에 충실한 것이었을까?
사랑이란 건
행복과 불행 사이의 줄다리기 같다.
사랑할 때는 이별을 알 수 없고
떠날 때를 몰라서 행복하고,
이별할 때는 온 힘으로 사랑할 때를 되 물리는 기억
그것이 진리일까.
지금 내 나이 마흔 중반에서
사랑을 논해 본다.
첫사랑 첫날밤을 기억했던 순수가 상실된 시계 앞에
한평생 사랑에 대해 늙은 감성을 풀어낼
내 늙음이 오면
나는 어떤 정의를 내릴까.
그렇다.
사랑은 이별이다.
지금 내 나이에 내리는 정의는 이별이다.
우리는 헤어질 약속 앞에
하루하루 사랑하며 살기도 하고
사랑을 잊은 채 살아가기도 하고
아니 사랑할 수도 있다.
사랑은 그렇게
이별 앞에 작별하고 사는 날들이다.
깊이 사랑하고 얕게 사랑하는 게 아니라
우리 일생에
사랑을 모르고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을 수 있다고.
그런데 누군가 자신의 사랑을 평가할까봐
떳떳하지 못하게 살 수도 있고
사랑 안 하고도 살 수도 있고
진짜 유혹 앞에서도 흐트러짐 없이
그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국 멀리 떨어져 살고 있을 수도 있고
사랑에 진절머리 나서 혼자 사는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에도
사랑은 가득 찬 것.
그래서 이혼이 졸혼이 비혼이
사랑이 없는 게 아니라
사랑해서 그렇게 살아갈 수도 있고
운명을 기다리며 사랑을 기다리며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며 살고 있을지 모르는
그 수많은 기다림도 사랑이기에
내게 사랑은
미어지고 보고싶은 그리움으로
죽는 날까지 가슴에 품고
한평생을 외로움 속에서도
영원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지금 옆에서 연애하고
육체를 나누는 정을 가졌다 하여도
일생에 단 한 사람
영원한 사랑으로
억만 겹 세월을 지나서도
기다릴 수 있는 사랑을 믿는다.
그래서 내게 사랑이란
긴긴 겨울 한이 맺힌 여자의 서리처럼
뜨거운 것이라 말하고 싶다.
얼마나 뜨거우면 한이 맺힐까?
그렇듯 사랑은
모든 것을 품어야 하는
꽤 힘든 삶에 숙제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누군가의 가슴에 박혀서
그 사랑의 뜨거움으로
그 하룻밤의 애절함으로
생명을 잉태해 낳은 아이를
혼자서 인생을 걸어 키워낼 수 있는 약속처럼
사랑은 사연이다.
그래서 이 나이를 먹고 보니
황량한 가슴에도
추억할 것들이 있다는 게 재산이고
사람 도리를 다해 살 듯
사랑에 도리가 있다는 걸 배워간다.
터져 나오는 질투를 잡초 뽑듯 뽑아낼 수 있는
그런 침노의 기분도 일순간이 될 수 있는
그런 연륜의 나이가 오면
나는 어떤 사랑을 딸에게 일러줄까.
내 인생에 사랑은
구구절절 신세타령이 아닌
내가 살아낼 수 있었던
내 생명력이 되어준
종교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한 나는
지천명을 기다린다.
사랑을 기다리듯 믿고 산다.
그래서 사랑은 종교다.
적어도 내겐 종교였고
세세생생 다시 못 올 약속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