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숫자에 대한 해석을 할 수 없는 지식이라... 그냥 의사소견란에 재검이라고 되어 있어서 전화드린 거예요. 시간이 없으니 내일 당장 가셔서 재검받으셔야 해요"
오랜 은둔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 물류센터에서 일을 시작하기로 했는데, 심야(오후 11시 ~ 오전 8시) 근무자는 신체검사 통과가 필수였던 까닭에 1주일 전 검진센터에서 받았던 검사 결과, 재검이 필요하다는 채용담당자의 전화였다. 늘 책상 앞에 앉아 있었고 운동은커녕 야식을 안주 삼아 술잔을 자주 기울였었기에 어느 정도 몸이 비정상일 줄은 예상했지만 재검 통보를 받고서는 많이 당황스러웠다.
이튿날 아침 재검을 받기 위해 지정 검진센터를 다시 방문했고, 의사와의 문진 때에 어렵사리 의사에게 물었다.
"제가... 어디가 안 좋아서 재검을 받아야 했나요?"
"음... 당뇨 기운도 있고, 지방 관련한 지수도 썩 좋질 않습니다."
"그럼, 검사엔 통과할 수 없나요? 저에겐 취업이 걸린 문제입니다."
"요즘은 검사 결과 수치가 나오면 시스템에서 자동으로 소견이 나갑니다."
"그래도 의사 소견을 피력하는 곳은 있지 않겠습니까?"
의사는 잠시 뜸을 들였다.
"물론... 같은 수치라도, '이 항목을 지속 관리하면'이라는 단서를 달 수는 있지요..."
"부탁드립니다. 꼭 통과해야 합니다."
평소 같았으면 그냥 알겠다는 말만 하고 나왔을 텐데, 어떻게든 새 생활을 하고 싶다는 마음에 의사에게 청탁했던, 예전의 내 모습이 아닌 나를 생각하며 쓴웃음을 짓고 검진센터 문을 나섰다. 몇 년 동안 겪지 못했던 굴욕의 시작이었다.
의사가 소견을 어떻게 썼는지는 모르지만 재검을 통과하고 물류센터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트럭에 실려오는 수하물과 택배를 하차하는 작업을 맡았다. 평소 부실한 허리를 미리 염려할 수밖에 없었지만, 다행히 물건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그것보다 쉬운 밀고 당기는 일을 하게 되어 내심 안심했다. 하지만 나이 많은 동료와의 첫 만남에서 '저 배 좀 봐라' 하는 지적을 받으며 굴욕은 계속되었다.
처음 적응하는 2~3주간이 힘들면서도 그동안 제대로 운동을 하지 않던 몸에 육체노동을 더하다 보니 몸무게가 조금씩, 흐르는 땀과 함께 빠져나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체력을 많이 소모한 덕에 쉬는 시간 동안 뭔가를 허급지급 먹기 시작하면서 몸무게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는데, 조금씩 몸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끼게 된 것은 횡단보도를 건너면서였다. 횡단보도와 거리가 좀 떨어져 있으면 파란 불이 들어와도 이내 건너가는 것을 포기하고 다음 파란 불을 기다렸던 이전의 나였다. 하지만 스스로의 몸무게를 이겨 내며 내가 펄쩍펄쩍 뛰어가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슬로모션으로 느껴졌다) 내 몸이 왜 이래 하는 생각이 끼어들었다. 동시에, 시간이 지나면 지금까지의 굴욕도 이겨낼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도 들었다. 뱃살해방을 결정한 건 그때부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