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간제 교사로서의 운은 여기까지.
2년 반 정도의 교직생활은 어느 곳에도 연고가 없던 나에게 찾아온 행운의 시간이었다.
학교에서의 시간은 물질적으론 우리 집의 밀린 보험료와 몇 달간 고시공부를 할 수 있는 비용을 해결해 주었고, 정신적으로는, 잡히지 않을 것만 교사라는 직업을 진실로 꿈을 꿀 수 있게 해 주었다.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머리가 잘 돌아갈 때 공부해야 합격할 확률이 높다.’
‘얼른 합격해서 안정적으로 정교사 해야지.’
기간제 교사를 하며 수도 없이 들었던 말들, 물론 이 말들이 나를 위해 하는 조언임은 분명했겠지만, 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진 못했다.
먼저, 나는 가족들의 손을 빌려 고시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리고 해보지 않았던 공부를 하며 일을 병행하는 것은 일과 공부뿐만 아니라 건강도 잃을 것 같단 생각에, 우선 돈을 모아 놓고, 공부만 할 수 있을 때 온전한 시간을 보내야지 생각했다.
그리고, 시기와는 상관없이 정말 선생님이 되고 싶을 때 도전하고 싶었다. 안정적이라는 이유로, 사회적 대우가 좋다는 이유 때문이 아닌, 정말 좋은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나를 움직이게 할 때 그 마음으로 도전하고 싶었다.
그리고 스스로 당당하지 못했던 기간제 교사로서의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고, 고시공부의 기회는 생각보다 너무 늦지 않게 찾아왔다.
스물여섯, 나의 꿈에 어떤 방해도 없이 집중할 수 있는 기회. 일도 사랑도 건강도 모두 과도기였던 스물다섯을 지나 어느덧 나는 인생의 전환점에 도달해 있었다.
마지막 겨울방학, 20여 일의 대만 여행을 끝으로 학교에서의 나의 흔적을 모두 지웠다.
2년간 일했던 퇴직금이 나왔고, 짧지만 3개월 동안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었다. 그 사이에 일 년 간 나의 발이 되어준 경차 연두 콩과도 시원한 이별을 했다.
그렇게 모인 800여만 원의 돈으로 나는 10개월 동안의 고시공부를 시작했다. 최소한의 생활비, 1년간의 강의비, 서울로 직강을 들으러 가는 비용 등 내년 2월까지 버틸 만큼의 최소비용이었다.
생애 처음으로 도전한 고시공부. 이런저런 일들을 처리한다는 핑계로 4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공부를 시작한 난, 조언을 구할 새도 없이 부랴부랴 강의를 듣기 바빴다.
보통 1월에 시작하는 강의를 4월부터 들으려니, 정말 말 그대로 황새가 뱁새 쫓다 가랑이가 찢어질 노릇이었다.
그렇게 1-2월 강의를 4월에, 3-4월 강의를 5월에, 5-6월 강의를 6월에 듣고 7-8월은 노량진에 가서 직강을 하기로 마음먹고 계획을 짜고, 실행해 나아갔다.
생각보다 많은 양의 광범위한 이론, 중국어 전공과목 말고도 교육학 수업도 따로 들어야 했다.
그렇게 하다 보니 하루에 듣는 강의만 예닐곱 개, 복습까지 하려면 눈뜨고 있는 시간에 공부만 해도 빠듯했다.
오전 아홉 시, 책상에 앉아 하루를 시작하면 엄마와 점심을 먹는 30분, 저녁은 간단히 먹고, 혈당을 관리와 체력증진을 위해 탔던 사이클 시간 30분을 제외하고 밤 12시까지 빼곡한 시간을 보냈다.
거의 하루 15시간을 앉아서 보내면서도 지루할 틈이 없었다.
공부를 하면서 보니 나는 내 생각보다 모르는 게 너무 많았고, 순간 그동안 무지함에도 당당했던 날들이 너무 창피하게 느껴져, 조금이라도 빨리 이 무지함을 메우고 싶었기 때문에 지루할 겨를이 없었다.
그렇게 마침 군대를 가준 남동생의 방은 어느새 나의 고시원이 되어있었고, 하루하루 쳇바퀴를 굴리듯 지나간 날들은, 내 머릿속에 교육학과 중국어 교육론 등의 커다란 생각주머니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목이 왜 이렇게 아프지.’
머리를 묶고 하루 종일 앉아있어서 인지 그 머리카락 무게마저도 목에 무리를 주기 시작했다. 미용실 갈 시간조차 아까웠던 나는 화장실에서 머리를 묶은 채로 ‘댕강’ 그 무거움을 잘라냈다.
‘진작에 자를 걸.’
자르고 나니 새삼 나를 짓눌러 온 머리카락의 무게가 이토록 컸음을 느꼈고, 그렇게 나는 가뿐해진 머리만큼 더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다.
그렇게 숨 가쁜 날들이 지나 빼곡히 적은 달력을 세 번째 넘겼을 때. 그제야 난 비로소 남들과 비슷한 속도로 책장을 넘길 수 있었다.
‘이제 갈 수 있겠다.’
7월 여름방학 시즌이 시작할 무렵 드디어 노량진에서 직강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직강을 듣는다는 건 나에게 또 다른 도전이었다. 혼자만의 싸움으로 지난 3개월을 고군분투했다면, 이제 나와 일과가 비슷할 그들의 리그에 끼어, 경쟁과 협동이 공존하는 그 사이에서 함께 달리는 것.
도무지 나의 위치를 가늠할 수 없는 지금, 분명 이 두 달은 나에게 엄청난 자극제가 될 것이다.
그나저나 가장 난해한 부분이 있었다.
수·목·토, 한주에 세 번의 강의. 중국문학, 중국어 교육론, 모의고사 및 해설 수업으로 이루어지는 강의는 보통 오전 8시 반이면 시작해 저녁 6시가 다 되어야 끝이 났다.
수업을 들으러 노량진까지 왕복 6시간이 되는 여정을 매일 하기엔 내 체력과 길에 버려질 아까운 시간들을 무시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 고단했을 여정에 구세주가 되어준 건 바로 친구 K였다.
대학 졸업 후,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대기업에 다니고 있었던 자랑스러운 내 친구 K. 평소 시시콜콜 연락하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3년 내내 같은 고등학교 동아리에서 함께하며 쌓은 학창 시절 우정은 역시 사회에서의 친분과는 다른 깊이가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친한 친구라고 해도, 원룸에서 혼자 생활하는 게 익숙했을 K에게 단기 하숙생인 나는 분명 달갑지만은 않은 존재일 수 도 있었을 텐데.
“나는 정말 좋아, 요즘 너무 외로웠거든.”
친구 K는 특유의 배려 화법으로 나를 미안하게 만들지 않으려 했다.
그렇게 수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난 일주일에 3일을 K의 집에서 신세를 지게 되었고, 토요일 수업이 끝나면 다시 청주로 내려와 공부를 하다, 다시 수요일 새벽 첫차를 타고 노량진에 가는 생활을 두 달간 반복했다.
“룸메야, 여기 집 근처에 예쁜 카페가 있어, 공부하기도 좋을 거야.”
수업이 없는 금요일. 종일 혼자 공부해야 하는 나에게 추천해준 카페는 역시나 조용하고 예쁘다.
어느덧 룸메이트라는 정다운 호칭으로 나를 불러 주고 있었던 K, 그녀는 내가 가는 수요일 저녁이면 미리 이불을 챙겨놓았고, 우린 도란도란 이번 주에 있었던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그리고 까만 방에 누워 잠들기 전까지 어른의 성장통을 겪고 있는 진솔한 느낌을 서로에게 터 놓았다.
K라면, 이 친구라면 아픔 없이 행복한 삶을 살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오목조목 예쁜 이목구비에 아담한 키, 우리 중창단에서 기둥 역할을 하고 있던 소프라노에 피아노도 노래도 잘했던 아이였다. 그리고 공부까지. 참 다재다능한 녀석이라 뭘 해도 잘할 거라 생각했는데, 역시나 공대 쪽으로 유명한 대학에 진학했고, 졸업 후 굴지의 대기업에도 떡 하니 붙어 3년이 넘게 잘 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내 밴드 활동으로 좋아하는 취미생활인 노래도 맘껏 부르며 지내고 있는, 뭐하나 빠지지 않는 자랑스러운 친구였기에 나는 그녀의 마음에 어떤 아픔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요즘 진짜 너무 힘들다.”
직장인 3년 차. 3·6·9의 법칙. 3개월 또는 3년을 주기로 찾아온다는 슬럼프라고만 생각했다.
한편으론 불확실한 미래를 꿈꾸고 시험을 앞두고 있는 나에겐 그 슬럼프조차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K의 상처는 꽤나 크고 깊었다. 저기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어린 시절의 모습. 장녀로 지내 온 그녀의 삶도 온전히 스스로 만든 모습이 아니었구나 싶었다.
그녀의 말투 속에서 어린아이의 상처와 투정이 느껴졌다.
‘다행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어서….’
그저 들어줄 수밖에 없었던 역할에서 나는 다행스러움을 느꼈다. 이렇게라도 터 놓고 말할 수 있고, 그 힘들었던 날들을 이제 가족들과도 함께 나눌 수 있다면, K의 자존감이 단단히 자라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K의 집에서 보낸 시간들은 나에겐 척박하기만 한 서울 땅에서 따뜻한 온기를 주는 시간이었다면, K에게는 진짜 자신과 이야기하는 날들이 되어 가고 있었던 게 아닐까.
이 두 달의 시간은, 아직 마음만은 여린 소녀였던 우리 두 사람이 사회에서 얻은 병을 치유하는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다만 물질적인 여유가 없어 신세를 지는 게 너무 미안했던 나에게 아량을 베풀어 준 그 마음을, 나는 평생 잊지 않기로 했다.
룸메이트로의 마지막 날, 나는 마음을 담아 꾹꾹 눌러쓴 짧은 편지와 꼬깃한 오만 원을 화장대에 두고 집을 나섰다. K는 자기 용돈이냐며 귀여운 아이처럼 좋아했지만, 그때의 나는 스스로의 초라함에 멀리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K가 가장 행복한 순간에 진심을 다해 축하해주는 친구가 되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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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진을 제 집처럼 드나들며 공부하던 여름이 지나고, 배낭 틈에 땀이 식어가는 가을이 오고 있었다.
‘요즘 왜 이렇게 잘 체하는 걸까.’
밥을 먹을 때뿐만 아니라 물을 마시거나, 커피를 마셔도 명치끝이 꽉 막혀 답답했고, 소화가 전혀 되지 않는 기분이었다. 이제는 주말 하루만 서울에 가면 되어 집에서 통학을 하던 그때.
난 하루가 멀다 하고 한의원을 찾았다.
‘아무래도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는 게 좋겠어요.’
마침 외래진료를 앞두고 피검사를 했고, 결과를 듣는데 또 한 번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이 몸으로 공부가 잘 되었어요? 안 되었을 텐데.”
당장 수혈을 받지 않는다면 6개월 이상 철분제를 복용해야 정상수치를 회복할 정도의 상태였다.
그렇게 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았건만, 3년 전 승무원을 준비했던 그때와 같은 진단을 또 받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여름을 지나며 찾아온 무력감, 피로, 소화장애, 부정맥은 빈혈로 인한 증상이었다.
공부를 한다고 한들, 머리에 정말 들어오는 게 아니었을 거다.
하지만 12월 초 임용고시를 고작 두 달 남겨 놓고, 몇 개월을 쉼 없이 달려온 나의 노력을 헛되이 무너뜨리고 싶지 않았다. 이번에 시험 삼아 보고, 내년에도 도전하면 된다고 말하는 엄마의 말에 나는 단호하게 수혈을 받겠다고 말했다.
하루 밤샘 입원으로 네 팩의 피를 수혈받았다. 수혈을 받고도 철분제를 복용해야 했지만, 그래도 정상치에 가까이 회복된 혈액으로 몸 상태가 돌아오면 빨리 공부를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또다시 나에게 일어난 이 시련을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
고작 하루 있는 병원에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못했을 만큼, 내게 얼마 남지 않은 이 시간들을 그냥 흘려보내기에는 하루하루가 너무나 소중했다.
드디어 시험 당일. 시험은 전부 서술형 또는 단답형 문항으로 이루어진다. 교육학은 한 문제안에 여러 가지 항목의 답을 써야 했고, 제2외국어인 전공은 그 나라 언어로 서술해야 했기에 중국어를 하나하나 신경 쓰며 써 내려가야 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교육학, 중국어 전공시험을 치르고 오후가 되어 교문 밖을 나왔다.
홀가분한 기분, 그렇지만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너무 떨려서였을까. 문제를 다시 읽으니 떠오르는 답들이 너무 많았다.
‘그래도 잘했어. 괜찮아, 넌 최선을 다했잖아.’
가채점 결과 교육학은 안정권이었고, 전공은 커트라인에 아슬아슬하게 안착해있었다.
포기하긴 아직 일렀다. 1차 합격 결과가 나오면 바로 2차 수업시연 면접이 있다. 합격여부와는 상관없이 모든 수험생은 2차 시험을 준비해야 했다.
주 1회, 수업시연을 확인받기 위해 다시 또 노량진을 오가며, 집에서 간이 칠판을 만들어 촬영을 하며, 면접 예상 질문에 답을 준비하며, 또다시 한 달이 흘렀고 어느덧 1월, 새 해가 밝아왔다.
그리고 1차 합격자 발표일.
‘1차 합격자 명단에 없습니다. ’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한 덕분일까, 생각보다 충격이 크진 않았다. 지난 10개월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는 생각도, 다행히 들지 않았다.
‘아직 그만큼의 실력이 되지 않았나 보다. 아직 내가 교사가 될 준비가 부족했나 보지.’
그저 다음번에는 긴장은 좀 덜 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시험을 봐야겠다고 다짐했다.
빼곡한 글자들과 씨름했던 2016년이 그렇게 지나있었다.
나에게 남은 건 책상 위로 켜켜이 쌓여 있는 모의 고사지와 답안들, A4용지를 담는 박스 2개를 가득 채운 수업자료들, 아직 분필 자국이 남아있는 간이 칠판과 수업시연 녹음파일들.
그 순간이 지나고야 알았다.
진실로 최선을 다했다면, 후회가 남지 않는다는 걸.
결과로 증명되는 세상에서, 결과 없는 노력을 인정받기 위해 가장 필요한 건, 스스로 최선을 다했다는 자신의 인정뿐이었다.
새벽 4시 30분. 눈을 뜨며 한 번도 노량진에 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미용실 가는 시간이 아까워 머리카락을 손수 자를 때에도 처량하다 생각하지 않았다.
20대의 예쁘고 귀한 시간들이 계절을 잊을 만큼 빠르게 지나가도 아깝지 않았다.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나만 생각하며, 나를 위해 진실로 최선을 다했다는 걸 누구보다 내가 가장 잘 알기에, 이번 해는 나의 가장 후회 없는 해가 되었다.
우리나라에는 안정적인 직장을 얻고자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
하지만 그들 중 시험에 붙는 사람보다 다시 다른 길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그럼 그 사람들은 실패한 인생을 사는 것일까?
시험에 합격하고도 적성에 맞지 않아 다시 그만두는 사람도 있고, 합격의 기쁨도 잠시, 업무 스트레스로 행복한 근무는 꿈도 꾸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시험에 떨어지고도 재도전하기 위해 다른 일을 병행하면서도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사람도 있고,
우연한 기회에 시작하게 된 다른 일에서 되려 또다른 꿈을 찾게 되는 사람들도 있다.
모든 경험에는 이유가 있다.
분명한 건 헛된 경험은 없다는 것이다.
시험에 떨어지고 붙었다는 것. 이렇게 경험을 성공과 실패로 가르는 것은 경험이 주게 되는 가치를 폄하시키는 말이다.
사회가 날 받아주지 않았다는 불합격의 서글픔은 어쩌면 나 자신에 대한 실망감보다는, 믿고 기다려주는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 앞서가는 친구들에 대한 부러움 그리고 합격의 끝에 도달해 있는 사람들에 대한 질투가 섞여 있는 복잡한 응어리가 아닐까.
가장 다독여 주어야 하는 건 자기 자신이다.
이 힘든 순간을 잘 넘어가는 건 가족도, 친구들도 아닌 나 자신이기에.
그러니 아픔의 시간이 너무 길지 않았으면 좋겠다. 맘껏 아파하되 그 시간이 너무 길지 않기를, 자신을 너무 가혹하게 탓하지 않기를 바란다.
나이와 학벌과 돈의 유무와 상관없이, 당신은 이 세상에 하나뿐인 대체 불가의 사람이니까.
당신은 그 자체로 소중하고 귀한 사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