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늘의 온도 Oct 04. 2022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할 수는 없다.



“너는 왜 나만 보면 웃어? 기분 나쁘게.”


그날의 충격은 쉽게 가시지 않는다.

어린 시절 사진 속 나는 작은 눈이 더 안 보일 때까지 웃는 표정이 대부분이었고, 나의 웃음에 기뻐하는 가족들을 보며, 웃는 표정이 상대방을 기분 좋게 해주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믿었었다.


그런데 내가 웃는 게 기분이 나쁘다니...


중학교 2학년, 그날의 난 믿고 있던 사회생활의 공식이 깨져버려 꽤나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모두가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건 아니구나.’

‘내가 생각한 친절도, 상대방에겐 불편할 수 있겠구나.’


그날 이후 괜스레 눈만 마주치면 민망함에 웃어 보였던 나의 표정은 환한 웃음에서 적당한 미소로, 또 그 이후엔 눈 마주침 자체를 최소화하기 위해 다른 것에는 신경 쓰는 것조차 안 하게 되는 경지에 이르렀다.


.

.



한 번의 깨달음이면 되는 줄 알았는데, 역시나 장착된 버릇은 쉬이 고쳐지지 않았고, 계획되지 않은 상처는 고통스러웠다.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고등학교 1학년, 열정적인 담임선생님을 만났고, 선생님의 지도 아래 우리 반 아이들은 똘똘 뭉쳐져 지냈다. 아침 8시부터 밤 10시까지 가족들보다도 더 오랜 시간을 붙어있었던 우리들.

서로가 친해질 수밖에 없던 구조 덕분에, 종일 지루한 공부만 반복해야 하는 인문계 고등학교는 답답한 감옥이었지만 모두가 한 명의 낙오자 없이 즐겁게 생활했었다.


그러던 중 나는, 어느 순간 소위 말해 ‘은따’ 은근한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다.

그날의 기억을 지우고자 노력했고,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기에, 기억하는 것조차 외면했다.

하지만 한 달 남짓한 그 순간들은 내 인생에서 아프고도 고마운 순간으로 남아있다.


어떤 이유였는지는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잠시 혼자가 되었던 이유를 생각해보자면

누군가가 나의 말이 거슬려서, 아니면 나의 행동이 보기 싫었다 거나, 나의 말과 행동에 상처를 입었다 거나, 아니면 그 어떤 이유도 없이 싫어서였을 것이다.

그런 혼자만의 생각과 행동은 주변인들에게 군중심리로 이어지고, 끝내 충분히 한 무리를 동요시킬 수 있으니, 만나는 사람이 한정적인 학교라는 작은 집단속에서 혼자가 되는 일은 생각보다 자주 일어나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여자 중학교를 거치고, 여자고등학교에서 생활하며 초등학교 때의 수줍음을 지운 난,

어느새 말 많고, 잘 웃고, 앞서서 행동하는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그런 아이가 어느 순간 종일 있어야 하는 공간에서 내 눈을 피하는 사람들과 종일을 보내야 했다.

차라리 초등학교 때 그랬다면 이 일은 별일도 아니었을 텐데.


아주... 아주 외로운 시간이었다.

그리고 오해를 받는 일은 무엇보다 괴로운 일이었다.

공부에 집중하면 되었지만, 집중이 될 리가 없다. 그렇다고 누구에게 말할 수조차 없었다. 내가 물리적인 폭행을 당한 건 아니지 않은가.



"얘네가 나랑 안 놀아줘."


엄마에게 말할 수 있었을까, 아니면 엄한 선생님께 말할 수 있었을까?

아니 설령 말한다고 할지라도 뭐가 달라질까, 상황이 더 나쁘게 흘러가지 않을까.


그냥 기다리는 것 말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오해가 풀리지 않으면, 그냥 사그라들 때까지 기다리는 것, 아니면 이 상황을 벗어나는 것.

그때 며칠 가지 못해 난 엄마에게 전학 이야기를 했었다.


“원래 나 요리하고 싶어 했는데, 농고 가서 요리하고 싶었는데, 엄마 때문에 인문계 온 거잖아, 그냥 나 지금이라도 농고로 전학 갈래.”


틀린 말은 아니었다. 중학교 3학년. 당시 인문계, 실업계를 두고 오랜 시간 고민했었던 나였다.

한해 먼저 고등학교에 진학했던 언니는 뒤늦게 공부에 전념해 내신점수를 올렸지만 아슬아슬했던 점수 탓에 원하는 고등학교를 쓸 수 없었고, ‘여자 혼자 애들 키우는데, 다 안 좋은 학교 보내면 엄마가 애들 못 키웠다는 소리 들을까 봐.’ 하는 걱정에, 엄마는 더더욱 인문계고등학교라는 프레임에 나를 꼭 넣고 싶어 했다.

게다가 호프집에서 날마다 요리를 하는 엄마는 ‘요리하는 일’을 업으로 삼는 건 너무 힘든 일이라고, 그냥 취미로만 하라며 나를 설득했다.



사실 지금이야 어느 학교를 가든 본인의 선택이고, 또 대학을 굳이 가지 않아도 된다는 인식이 자리 잡혀가는 시대이기에 고등학교의 선택이 이렇게 잘 키우고 못 키우고를 따질 만한 일은 아닌 일이 되었지만(아니 어딘가에선 아직도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 수도 있겠다.) 당시의 사회 분위기는 아니 우리 집 주변 분위기는 인문계는 똑똑하고 조신한 애들이, 실업계는 공부 못하고, 노는 애들이 가는 곳이라는 편견이 심했다.

나 또한 이런 시대적 말들에 암묵적으로 동의했기에 그냥 성적에 맞추어 인문계에 진학했었다.


어찌 되었건 나의 선택이었는데, 엄마를 핑계 삼아 전학 투쟁을 시작했다.

하지만 가게로 바쁜 엄마가 나의 투쟁에 민감하게 반응할 리 없었다.


‘길이 없다면 찾으면 된다, 친구가 없다면 새로운 친구가 있는 곳에 가면 된다.’


종일 학교에 붙어있는 여고생이 어디를 갈 수 있으랴.

참을 수 없는 우울감과 슬픔에 내가 찾은 곳은 중창 동아리였다.

처음엔 ‘공부하기도 바쁜데 어떻게 동아리 활동까지 할까’ 하는 생각에 가입할 생각도 하지 않았었다.

그런 곳에 내 발로 걸어 들어올 줄이야.


이곳은 나에 대한 편견이 없고,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배우기도 하고 연습할 수 있는 곳이었다.

간단한 테스트를 하고 동아리에 가입하게 되었다. 그렇게 감옥 같던 학교는 음악실이라는 도피처가 생기며 그나마 숨 쉴 수 있는 곳이 되어갔다.



‘알토 1. 내가 음역대가 낫은 편이었구나.’


노래를 좋아했지만 배운 적은 없었던 난, 동아리에 들어오고 처음으로 나의 목소리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매일 저녁시간, 동아리 친구들과 가장 빨리 석식을 먹고, 답답한 교실을 벗어나 맘껏 소리치며 노래할 수 있는 음악실 작은 골방에 모였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

목을 풀어주는 반주에 맞추어 너도나도 소리를 냈고, 열일곱의 소녀 열두명의 웃음소리는 끊이질 않았다.



처음엔 그저 도피처였던 곳이었는데, 고등학교 시절 중창 동아리는 어느덧 나의 학창 시절의 전부가 되었고, 소중한 추억거리가 되어있었다.


열일곱, 길고 긴 일 년의 연습을 끝에 선배 언니들의 공연에서 노래를 부르던 그때.

열여덟, 중창 연합 공연으로 다른 고등학교 친구들과 함께했던 ‘사랑의 메아리’ 공연과 학교 축제, 시•도에서 개최했던 중창대회, 그리고 고3이 되기 전 함께 준비한 우리들의 정기발표회.

그 외에도 한 겨울 시내에 한가운데에서 함께 노래하던 자선모금 공연, 다른 학교 졸업발표회에서 함께했던 공연들...


동아리가 아니었다면, 내 고등학교 시절은 1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 싶었던, 매년 네 번의 시험과 모의고사를 보던 노잼(재미없는) 학교로 남아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소중한 인연들을 평생 놓치고 살았겠지.


어떤 일이든 그냥 일어나는 일은 없다고 하는데, 두어 달의 짧은 방황, 그 우연한 기회로 들어간 동아리 생활이 소중한 추억과 친구들을 만들어 주었고, 그 인연들은 또다시 일상의 감사함을 느끼게 해주고 있다니, 정말 그런가 보다.


서로가 인생의 가장 바쁠 삼십 대를 보내고 있는 요즘, 우리들의 단톡 방엔 생일과 결혼을 축하하는 메시지를 보낼 때를 제외하곤 소통할 일이 많지 않지만, 마음속으론 분명 다들 알고 있을 거다.


‘우리는 잊히는 존재가 아니라 마음속에 묻어둔 존재라는 걸.’


가장 철이 없었던 그때, 여린 맘이 상처로 쓸려도 에너지가 넘치던 그때,

작은 일상조차 전부 나누었던 친구는, 언제든 다시 꺼내 볼 수 있는 마음 한켠에 항상 자리하고 있다.



모두가 나를 좋아할 수는 없다. 또 그럴 필요도 없었다.

모두를 담기엔 마음의 크기도 그렇게 넓지 않으니.











매거진의 이전글 MBTI라는 세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