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지독한 바이러스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2020년 1월, 우리를 공포에 몰아넣고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괴롭히고 있는 코로나바이러스.
자연세계의 질서를 무너뜨린 인류를 향한 복수였을까, 만약 정말 그런 것이라면, 제대로 된 복수가 되어 버렸음이 분명하다.
코로나가 국내에서 처음 발발하기 시작한 1월 말, 나는 갓 팀장이 된 새내기 관리자였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육회사의 팀장. 주로 방문 수업을 하는 교사들을 관리하는 일을 하는 직업이고, 때때로 상담과 수업, 그리고 홍보활동을 하는 직업이었다.
코로나바이러스는 정규직 자리로의 승진에 잠시 설렜던 나를 시험하듯 그렇게 찾아왔다.
“다음 주부터 수업 안 받겠습니다. 선생님 오시지 않게 해 주세요.”
1월이 끝나 갈 무렵부터, 마치 짠 것처럼 같은 내용의 전화들이 빗발치기 시작했다.
한 과목의 수업중단은 곧 교사들의 급여, 회사의 이윤과 직결되는 일이었다. 팀장은 그 중간에서 어느 한쪽이라도 구멍 나지 않게 땜질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
“어머니, 걱정되시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아이가 선생님과 학습을 중단하는 것보단 시간을 두고 잠시 지켜본 뒤 결정하시는 건 어떨까요?”
‘그래 한 두 달 정도 통제가 되어 잘 끝난다면 괜찮아지겠지.’
내일에 대한 희망을 품고, 이 공포의 끝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말뿐이라곤 단지 시간을 두고 지켜보자는, 다음을 기약하자는 말뿐이었다. 당장 회원들이 떠난다는 걸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상황은 희망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1월을 시작으로 3월, 가장 회원이 많이 들어오는 새 학기 입학 시즌은 회사도 나도 가장 힘든 달이 되고 있었다.
‘그 회원 그만 둔대.’
‘아휴, 나도 못하겠어.’
‘이번 주엔 나도 무서워서 못 나갔잖아.’
무엇보다 힘들었던 건, 함께하는 선생님들도 그 두려움에 지켜가고 있었던 것이다.
힘을 내려 발버둥 치던 초보 팀장은, 점점 힘을 잃어 가고 있었고, 그 무렵 내 롤모델이었던 선배 팀장님이 회사를 떠났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이 지독한 바이러스는 대체 언제쯤 종식이 될까?’
‘수업이 줄어들어 선생님들 월급이 자꾸 줄면 어쩌지?’
정작 지병이 있어 몸을 사려야 하는 나는 안중에도 없었던 것 같다.
하고 싶었고, 원했던 팀장 일이었기에, 잘 해내고 싶었는데. 이번에도 운을 기대하기는 글렀다.
만약 회원들이 계속 줄어든다면, 선생님들의 수업도 줄어들 것이고, 생계문제와 연결되는 수입이 줄면 회사를 떠나는 교사들이 많아질 것이다. 그럼 그 지역에 나갈 대체 교사가 필요한데 코로나로 인해 접촉을 꺼리는 시기에 방문학습교사를 채용하는 것은 역시 쉽지 않을 것이다.
그야말로 난국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이 상황을 잘 이겨내 보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울상인 얼굴이 선생님들이 출근하는 날 아침에만 방긋방긋 웃는 얼굴이 되어있는 걸 보면서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라는 말을 몸소 체험 중이었다.
나만, 우리 회사 사람들만 힘든 건 아니었다.
직업을 잃는 사람들도, 등교하지 못하는 아이들로 인해 직장을 포기해야 하는 부모들도 많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인류의 멸종은 핵전쟁이 아닌 바이러스로 끝날 것이다.’라는 말을 동감하긴 했지만, 내가 경험하는 날이 이렇게나 빨리 오게 될 줄이야.
바이러스의 끝은 없어 보였지만, 이내 사람들은 적응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살아가야 하는 삶, 적응해 갈 수밖에 없었다.
잠잠해질 만하면 이따금씩 번지는 유행이 기지개를 켜던 어깨를 한 번씩 움츠러들게 했다.
그렇게 1년이 무력함 속에 지나갔다.
그 사이 나는 한 번의 인사발령을 거치며, 불황 속 회오리치는 회사에서 한 번은 더 살아 남아 보기로 다짐했었다. 팀장에서 센터장으로, 이름만 바뀌었고 할 일은 더 많아졌다. 진급을 한다는 건 그만큼의 책임감을 수반하는 자리로 간다는 뜻이다. 딱 3개월만 더 해보자 하고 시작한 일은 이번에도 역시, 빨리 흘러가는 시간 덕분인지 1년을 채워가고 있었다.
마스크는 우리의 일상이 되었고, 자유롭지 못한 일상도 우리의 일상이 되어버렸다.
‘아침에 출근하면 홍보랑 상담일정 먼저 잡고, 교사교육... 또.. 아 지역분석도 해야 하지.’
일주일, 한 달 계획을 짜고, 실행하고, 반복하길 몇 개월.
아침에 집을 나서면 8시를 넘겨 집에 오는 일이 다반사.
씻으려고 옷을 벗으면 울리는 전화에 발가벗은 채로 전화기를 붙들고 또 두 시간.
“대체 언제까지 통화를 하는 거야.”
참을성 있는 남편도 참다못해 한마디를 하는 날이 잦아졌다.
‘십 수년 이 일을 한 선배들은 대체 어떻게 버틴 걸까.’
버티는 게 맞는 걸까, 즐기고 행복하게 일하는 건 역시 욕심일까?
내 안에서 줄다리기하고 있는 두 자아가 싸움을 멈추지 않았고, 그 싸움은 나의 몸을 지배하고 있었다.
‘역류성 식도염입니다.’
하루에 커피는 두 잔 이상, 점심 한 끼를 대충 먹고, 저녁은 아주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먹는 일상.
식도염이 안 올 수가 없었다지만. 그 전에도 비슷한 일상을 4년 동안 반복했는데, 왜 지금에서야 이런 아픔이 온 걸까.
‘샘, 이러다 번아웃(burn out) 올 것 같아요.’
기간제 교사 근무 시절 들었던 말.
번아웃 증후군은 한 가지 일에 몰두하던 사람이 정신적 육체적으로 극도의 피로를 느끼고 이로 인해 무기력증, 자기혐오, 직무 거부 등에 빠지는 증상을 말한다.
동료 선생님들은 내가 이런 무기력함에 빠지지 않을까 나를 걱정해주곤 했었다.
‘내가 그 사실을 인정하면 그때 번아웃이 올 거야.’
내가 인정해버리면 정말 그렇게 될 것 같아 두려웠다.
‘나는 아직 더 긍정적일 수 있고, 일을 더 지속할 수 있으며, 나에게는 그런 힘이 아직 남아있다.
슬럼프는 슬럼프를 인정하는 사람에게 오는 것이다.’
‘나에겐 더 이상 어떤 불행도 없을 것이고, 나에게 못 할 일이란 없다.’
이런 다짐은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지만
반대로 적절한 때에 멈추는 능력을 앗아가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난 참 아둔하고 미련한 사람이다. 십 년이 넘게 바뀌지 않는 이 고질병은 아마 1형 당뇨와 함께 찾아온 녀석이었을 거다.
.
.
“나 요즘 너무 무기력하고, 삶이 힘들고 지쳐.”
인정하기 시작했다.
나를 나대로, 내 모습을 그대로, 나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에게 보여주기 시작했다.
5년의 시간이 어떻게 지나왔는지 모를 정도로 빨리 흘러버렸다.
하지만 지나 온 시간을 탓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지금 내가 느끼는 이 한계에 대해서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일을 그만두려고 합니다. 다음 달까지는 마무리 짓고 그만두겠습니다.”
사람 일이라는 게 단칼에 무 자르듯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건 참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나를 위해 그래 보고 싶었다.
같이 일하는 동료들 때문에
나를 믿어주는 팀원들이나 회원들 때문이 아닌
지치고 힘들어 주저앉아버린 나를 위해서였다.
우는 아이에게 사탕을 주면 금방 울음을 그치겠지만
커버린 나는 그 달콤함이 잠깐이며, 근원적인 것을 고쳐주지는 않을 거란 걸
이미 알게 되어 버린 어른이었다.(아니 어쩌면 근원적인 부분을 고쳐줄 거란 기대는 사실 없었다)
정들었던 곳에서, 안정적인 월급을 포기하고 떠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선택에 후회가 들지는 않았다.
이번에도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방법으로 최선을 다했다. 후회가 남을 리 없다.
‘몸도 마음도 더 잘 돌봐줄게. 그동안 너무 혹사시켜서 미안해.’
퇴사를 하는 날, 나는 나에게 사과했다.
회원이나 선생님들, 상사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동안 최선을 다하느라 늘 뒷전이었던 나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해야 했다.
‘그런데, 앞으로도 최선을 다하지 않겠다는 말은 아니야, 대신 나도 잘 돌볼 거야.’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 마음이 조금 간질거리는 말들이지만 소리 내어 말했다.
참 솔직한 말들이었다.
코로나가 없었다면 내가 퇴사하지 않았을까,
퇴사를 결심하며 들었던 생각이다.
하필이면 내 승진과 함께 찾아온 불행 때문에 내가 이런 선택을 했는지, 나도 의문이었다.
하지만 이내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나 때문이다. 이유는 온전히 나다.’
누구 때문도 아닌, 나를 위한 선택이었다.
그래서 미련도, 후회도 없는 거다.
‘나를 위한 새로운 일을 시작하게 되겠지, 그동안은 재충전의 시간을 갖는 거야.
조급해하지 않았으면 해. 너를 믿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