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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두초록 Jan 02. 2022

젊은 베르테르의 영어

영어는 슬픔과 치환된다

* 이 글은 2020년 6월에 쓴 글이다. 나는 여전히 영어 공부중이다.


오래 전 지인들과 영어 스터디를 한 적이 있다. 스터디 이름은 '젊은 베르테르의 영어'였다. 구성원들이 모두 문학도였으므로 나름 위트 있는 이름을 지으려는 노력의 결과였다. 섬세한 감성을 지닌 청년들이니 '젊은 베르테르'에도 부합하고 영어공포증에 가까운 우리에게 영어는 슬픔과도 같으니 딱 맞는 이름이라 자찬했다. 이름을 잘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스터디는 오래 가지 못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에게 영어는 가까이 하기에 너무 먼 언어로 남게 되었다.


영어를 못해도 사는 데 결정적인 지장은 없었지만 왜 영어가 슬픔과도 같았는지를 떠올리게 되는 순간들이 종종 찾아왔다. 공인 영어 점수를 필요로 하는 회사는 아무리 다른 조건이 마음에 들어도 쳐다도 볼 수 없었다. 해외 출장을 갔을 때 영어로 내 의사를 제대로 밝힐 수가 없어서 울컥하곤 했다. 업무 진행을 위해 모든 대화를 녹음해야 했다. 영어를 사용하는 나라로 여행을 떠나도 대부분의 대화는 단어만으로 진행하거나 파파고에 의존했다.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아 알게모르게 불이익을 받으면서 여행을 다녔다. 데이터 분석을 하면서 막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구글링을 하면 개발자용 지식인 같은 영문 사이트가 나오는데 답변을 해석할 수 없었다. 크롬에서 제공하는 번역기를 돌려보지만 중간에 메소드명이나 변수명까지 번역이 되어서 더 혼란이 생기는 경우도 많았다.


영어는 왜 슬픔일까. 영어가 슬픔으로 치환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번째는 정치적인 관점에서다. 언어는 권력이다. 권력을 가진 주류 언어 사용자는 타 언어를 배우지 않아도 되는 특혜를 누린다. 비주류가 부와 권력을 얻기 위해 주류의 언어를 습득해야 하는 구조다. 한국에 사는 영어권 외국인이 한국어를 전혀 못해도 살아가는 데 큰 어려움이 없는 것을 떠올리면 된다. 주요 프로그래밍 언어가 영어를 기반으로 하는 것도 권력과 관련이 있다. (물론 이 점에 대해선 중국어가 아님에 감사한다. 한자로 코딩한다고 생각하면 두렵기 짝이 없다.) 즉, 영어를 공부하려는 목적은 '재밌어 보여서'나 '궁금해서'가 아니라 무언가를 잘 알기 위해서나 불이익을 당하지 않으려면 '필요해서'다. 그래서 나에게 본질적으로 영어는 슬픔이다.


두번째는 실패의 기억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연초마다 새해 계획을 세울 때 영어 공부가 빠졌던 때는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대단한 각오를 한 건 아니고 관성처럼 목표에 넣곤 했다. 12월에 목표 성취를 확인할 때마다 취소선이 그어지지 않은 것으로 남아 있었다. 나름 영어 학원을 다니거나 Grammar in Use 같은 교재로 독학을 해 보기도 했지만 어느 하나 오래 지속한 것은 없었다. 영어에는 시도했던 것을 지속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실망의 기억이 쌓여 있다. 학창시절 딱히 영어 점수가 낮은 건 아니었지만 영어가 슬픈 이유는 졸업 이후에도 성취하지 못한 경험이 축적되었기 때문이다. 이 경험은 첫번째 이유와 상호작용을 해서 나를 슬프게 만든다. 영어가 미숙해서 부당한 대우를 당해도 의사 표현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던 경험, 신기술 관련 영어 논문 앞에서 작아졌던 경험 같은 것들 말이다.


2020년 목표에도 어김없이 '영어 공부'를 적었다. 더이상 영어라는 슬픔의 해소를 유보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월부터 영어 1:1 수업을 받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이어가고 있다. 수업 시간 외에 따로 공부를 하지 못하고 있어  실력이 늘었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하지만 중단하지 않았다는 자체에 점수를 주고 싶다. 5월부터 조금씩이나마 자율학습을 시작했더니 그나마 실력 바로미터의 눈금이 1mm 정도는 오른 느낌이다. 조금 늦더라도 꾸준히 하면 1cm, 1m, 내 키 이상이 될 날이 오겠지.


나를 격려하기 위해 이 글을 쓴다. 이 글이 언젠가는 영어 성취 기록의 첫 페이지가 되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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