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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두초록 Dec 26. 2021

백여 년 전 쓰여진 어느 본캐들의 시

《시는 내가 홀로 있는 방식》 리뷰


시는 내가 홀로 있는 방식

저자 페르난두 페소아

역자 김한민

출판사 민음사

출간일 2018.10.05

페이지 268


시집의 해설을 읽기 전까지 장을 나눈 기준이 명의라는 것을 전혀 몰랐다. 단지 제목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선택했을 뿐 시인이나 시집 자체에 대한 배경지식이 전무했기 때문이다. 여러 명의로 쓴 시를 실었다는 걸 알고 나서야 각 장마다 버젓이 이명이 써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심지어 한 이명이 다른 이명에게 쓴 시도 있다. 재미있는 시인이다. 문학계에서 이명을 쓰는 케이스를 처음 본 건 아니지만 실제로 이명으로 쓴 작품을 한 권으로 엮은 책은 처음이다.


몇 년 전 '부캐'가 흥했던지라 지금에 와서는 이렇게 이명으로 작품을 발표하는 게 그리 낯설지 않을 수도 있겠다. 페소아의 이명들을 부캐로 봐야 하는가는 엄청난 문학적 논쟁 거리가 될만한 주제다. 단순하게 판단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명의 정체성과 작품 세계가 고유하다면 '또 하나의 본캐'로 간주하는데, 고유성 여부의 판단 자체가 쉽지 않다. 일단 창작자가 이름을 다르게 했으니 잠정적으로 본캐라고 보았다.


이명 여러 개로 시를 쓴 시인의 시집 제목이 《시는 내가 홀로 있는 방식》이라니. 엄청 아이러니하지만 묘하게 납득이 갔다. 선집이기 때문에 아마 시인 본인이 지은 건 아니고, 알베르투 카에이루 명의의 <양 떼를 지키는 사람> 속 구절―시인이 되는 건 나의 야망이 아니다. / 그건 내가 홀로 있는 방식―에서 따 온 제목인 듯하다. 매우 탁월한 제목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해설에 의하면 페소아의 이명은 넓게는 130개 이상으로 볼 수 있으나 페소아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건 카에이루, 레이스, 캄푸스라고 한다. 페소아 본인까지 포함하면 대략 네 명(?)으로 좁힐 수 있다. 《시는 내가 홀로 있는 방식》에는 캄푸스를 제외한 알베르투 카에이루, 리카르두 레이스, 페르난두 페소아 이 세 명의로 된 시가 실렸다.


내 '원픽'은 알베르투 카에이루다. 표제시인 <양 떼를 지키는 사람>이 무려 80페이지―원어 부분을 제외한다고 해도 40페이지―나 되는 무시무시한 시인데, 가장 이해하기 쉬웠고 마음에 들었다. 존재에는 이유나 의미따위 없고 그냥 존재할 뿐이라고 주구장창 외치고 있다. 저작권은 소중하니까 기억에 남는 몇몇 부분만 기록해 본다.


그래, 이것들이 내 감각들이 혼자서 배운 것들이다 -
사물들은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존재를 지닌다.
사물들의 유일한 숨은 의미는 사물들이다.
<양 떼를 지키는 사람> 중에서

시인의 생각이 나와 일치하는지는 차치하고 선언하는 단호함이 이상하게 마음에 들었다.


내 집의 가장 높은 창문에서
흰 손수건을 들고 안녕이라 말한다
인류에게로 떠나는 나의 시들에게.
나는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다.
그것이 내 시들의 갈 길.
<양 떼를 지키는 사람> 중에서

내 시를 세상에 내보내는 것을 '인류에게로 떠나는'이라고 표현하다니, 너무 재미있지 않나. 알베르투 카에이루는 좀 나랑 코드가 맞다. 그것이 내 시들의 갈 길이라는 것도 시인을 자신의 운명으로 여기는 존재만이 할 수 있는 단정이라서 멋지다. 거의 100년 전의 존재―이명이니 '사람' 대신 '존재'라고 하겠다―에게 공명할 수 있다는 게 즐거웠다.


어떻게 일몰을 슬프다고 생각할 수 있는지 이해해 본 적이
    없다.
일몰이 일출이 아니라는 이유 말고는 없겠지.
<엮이지 않은 시들> 중에서

* 들여쓰기는 민음사의 《시는 내가 홀로 있는 방식》의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동 시집에 실린 원문에서도 들여쓰기가 되어 있다. 구글링으로 원문을 검색했을 때에는 들여쓴 텍스트가 없어서 혼동이 오지만 민음사를 믿기로 한다.

인간이 일출과 일몰을 받아들이는 차이의 본질을 이렇게 꿰뚫다니, 시인은 역시 다르다. 정말 재미있는 존재다, 알베르투 카에이루는.


시는 가까이 하고 싶지만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을 만날 가능성이 타 문학 장르에 비해 현저히 낮은 것이 사실이다. 국내 시도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나에게 외국 시는 정말 가까이 하기가 두려운 분야였다. 심지어 낯설기 그지없는 포르투갈 시라니. 원문이 함께 실려 있지만 솔직히 어느 구절이 어디쯤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약 백 년 전에 낯선 나라에 살았던 사람의 시와 만나서 '코드가 맞다'고 여길 수 있었던 경험이 색다른 즐거움이었다. 이렇게 또 새로운 세계를 접하는 것에 마음을 일 센티미터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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