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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두초록 Jan 15. 2022

외면하고 싶었던 질문에 대한 휴머니즘적 대답

《생명 가격표》 리뷰


생명 가격표

저자 하워드 스티븐 프리드먼

역자 연아람

출판사 민음사

출간일 2021.07.30

페이지 328


대학생 시절에 교통사고를 당해 입원을 한 적이 있다. 보험사에서 보상금 청구에 참고할 산정 방식을 알려주었다. 당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어서 입원 일수의 일당이 가산된다고 했다. 만약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지 않았다면 보상 금액은 더 낮게 산정되었을 거라는 설명이었다. 소득을 반영하는 산정법은 언뜻 합리적인 계산처럼 보였다. 한편으로는 내 시간과 안전이 나의 경제적 가치로 환산되는 게 왠지 모르게 꺼림칙했다. 《생명 가격표》를 읽고 비로소 그 꺼림칙함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알았다.


《생명 가격표》는 금전적인 가치로 생명에 가격표를 매기는 현대 사회 시스템의 불공정성과 비윤리성을 꼬집는다. 인간의 생명에 일상적으로 금전적인 가치가 매겨지고 있다는 화두를 던지면서 우리가 외면하고 싶어하던 현실을 들추어낸다. 얼마 전 20주기를 맞은 미국 9.11 사건의 보상금은 소득 수준에 따라 매겨졌으며, 많게는 30배까지 차이가 났다. 보상금처럼 노골적인 사례 외에도 사회의 여러 정책을 결정하는 데에 '생명 가격표'의 논리가 적용된다. 정책은 인식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사회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 영향력에 비해 우리는 생명의 가치가 어떻게 매겨지는지에 대해서 지나치게 무지하다. 저자는 생명 가격표가 매겨지는 방식에 대해 잘 이해해야만 보호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소득을 기준으로 한 생명 가치의 산출 방식은 타당한가? 답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현 임금 책정 방식이 공정한가에 대한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현 임금 체계는 공정하지 않다. 성, 인종, 국적에 따라 불공정한 임금격차가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다양한 노동 형태를 반영하지 않는 것 또한 큰 허점이다. 가정 내 가사 및 돌봄 노동이나 예술 활동과 같은 '가시적이고 정기적인 소득으로 잡히지 않는' 노동은 쉽게 배제된다.

만약 임금격차의 불공정성이나 다양한 노동의 가치 환산 문제를 해소했다고 가정한다 해도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노동을 할 수 없을 정도의 장애나 질병을 가진 사람의 가치를 경제적인 측면에서만 본다면 어떻게 될까. 유가족의 돌봄 노동이나 병원비 등의 지출 부담이 없어지므로 사망이 경제적인 관점에서는 손실이 아닌 득으로 판단될 수 있으며, 이는 보상금이 0원으로 산정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경제 위주의 논리에 최소한의 인간 존엄성이 사라지는 지점이다.


'생명 가격표'라는 표현이 불편한 이유는 인간 생명에 금액을 매기는 것에 대한 윤리적인 거부감이 있어서다. 우리는 인권이 모든 인간에게 동등하게 보장되어야 한다고 '알고' 있다. 모든 인간의 인권이 동등하다는 절대 명제 앞에서 경제적 손실을 잣대로 삼는 방식은 설득력을 잃는다. 하지만 사회 시스템이 작동하는 방식의 실상은 인권에 관해서도 '경제적인 가치'라는 것을 반복 경험하면서, 우리는 '알고' 있던 윤리적 명제를 은연중에 포기한다. 모든 생명에 동일한 가치를 매겨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인간 존엄성을 포기하지 말자는 경고이자 격려다.


불가피하게 생명에 가치를 매겨야 한다면 산정 방식을 보완해야 할 필요가 있다. 숫자로 매길 수 없는 가치를 정량화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수치로 환산하기 쉬운 경제적인 가치만 취하는 현재의 방식은 위험하다. 특히 그 가격표가 사회 전반 시스템을 결정짓는 기준이 될 때는 경제적인 약자에 대한 생명 경시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지금도 운전할 때 고가의 차가 주변에 있으면 조심하고 저가의 차에게는 난폭 운전을 한다는 이야기를 흔하게 접한다. 경제적 약자의 생명에 대한 경시 풍조가 더 만연하리라는 예상은 어렵지 않다. 우리의 과제는 먼저 현 방식의 한계를 인지하고 생명 가격표 산출 방식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인간의 생명을 적절하게 보호할 수 있는 수준의 하한 금액을 요구하고, 판단에 영향을 주는 불평등과 불공정에 맞서야 한다. 결국 핵심은 '평등하고 공정한 사회 만들기'로 귀결한다. 


생명 가격표를 결정하는 방법은 우리가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지금 우리 사회는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가.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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