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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두초록 Feb 19. 2022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라는 절망은 어디로 갈까

《내 무덤, 푸르고》 리뷰


내 무덤, 푸르고

저자 최승자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출간일 2001.03.31

페이지 84


시는 만만치 않은 장르다. 이야기를 따라가는 소설이나 글쓴이의 삶을 간접 경험할 수 있는 에세이와 비교했을 때 시는 상대적으로 해독이 어렵다. 한창 시를 많이 접했던 때에는 이해가 갔던 시도 지금 읽으면 무엇을 말하는 시인지 이해할 수 없는 일도 다반사다. 예전에는 이해했었다는 기억만 있고 시에서 말하려는 바가 뭐였는지는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이가 없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시가 좋고 시가 정신의 영역에 주는 풍요로움을 믿기에 의식적으로 시집을 독서 리스트에 넣는 편이다.


시는 무슨 책을 읽을지를 고르는 단계부터가 쉽지 않다. 소설이나 에세이, 비문학 장르는 이미 관심 작가나 분야가 있기 때문에 읽고 싶은 책 리스트는 넘쳐난다. 그중 그때그때 가장 끌리는 것을 읽는다. 하지만 시는 내가 가진 데이터 자체가 너무 적어서 책 선정부터가 어렵다. 내 대안은 '제목으로 고르기'다. 자칫 어처구니없게 보일 수도 있지만 따지고 보면 그렇지만도 않다. 시를 두고 정제의 미학이라고 하는 걸 생각하면 시집의 핵심이자 정수가 제목에 담겨있으리라는 기대는 합당하다. 제목으로 시집 고르기는 일리가 있는 방법이다. 물론 순전히 제목으로만 시집을 고르는 건 아니고, 서점 시 코너에서 제목이 마음에 드는 책의 중간 부분쯤을 보고 읽고 싶은 마음이 들면 사는 식이다. 최승자의 《내 무덤, 푸르고》도 그렇게 만났다.


시집 전체에서 느껴지는 주요 이미지는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경계'다. 이 이미지를 가장 잘 드러내는 부분을 발췌했다.

죽은 사람의 손톱 발톱 머리칼이
무덤 속에서 조금은 더 자라듯,
아직 완전히 죽지는 않았다.
<下岸發5> 중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시집을 읽으면서 이 말이 떠올랐다. 현재의 삶을 진정한 삶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비탄이 깔려 있는 말이다. 산 존재라고도 죽은 존재라고도 단정지을 수 없는 경계의 스산함이 이 시집의 지배적 정서다. 시적 화자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을 이 경계에 있는 존재로 생각하는 듯했다. 특히 우리의 삶을 회전하는 전기 통닭구이와 같다고 표현한 <서역 만리>도 인상적이다. '실은 이미 죽었는데, 죽은 채로 전기의 힘에 의해 끊임없이 회전하며 구워지는' 통닭같다는 현실 인식에 공감했다. 얼핏 보면 지나친 비관주의나 염세주의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이렇게 날카로운 현실 인식을 한다는 것 자체가 존재하기를 멈추지 않겠다는 치열한 노력의 결과다. <하안발下岸發1>의 화자는 자신의 삶 자체가 찢어진 깃발이라고 말한다. 그 깃발을 시로 올리는 치열한 과정을 거쳤기에 나올 수 있는 현실 인식이다.


도무지 나 자신으로서 살아가고 있는 것 같지가 않다. 생물학적 관점에서는 죽은 것은 아니지만 그 외 관점에서는 죽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심지어 <세기말>에서는 '맞아 죽은 개의 가죽으로 만든 양탄자가 되고 싶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곱게 소멸하는 것조차 바라지 않는 절망을 글로 남기겠다는 사명감이 시집 곳곳에서 느껴졌다. 절망을 기록한다는 희망을, 이 책을 선택한 이유였던 '내 무덤, 푸르고'라는 제목이 잘 드러내 주는 듯하다.


20년도 더 전에 출간한 책인데도 여전히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았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여전히 시적 화자는 '맞아 죽은 개의 가죽으로 만든 양탄자가 되고 싶'을까가 불현듯 궁금해진다. 여전히 당신의 무덤이 푸르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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