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직업을 말하기 싫었다

하고 싶은 일과 먹고사니즘 사이에서

by 연두초록

외국으로 나갈 때 비행기 안에서 입국신청서를 작성한다. 이름, 생년월일, 여권 정보를 써내려가다 '직업' 란에서 멈칫한다. 외국인의 입출국을 관리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직업이 중요한 판단 요소일 수도 있겠지만 쓰는 사람으로서는 그리 달갑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편집 일을 할 때는 'editor'라고 적었다. 기획자일 땐 'planner'라는 영단어가 애매하기도 하고, 당시 내 업무에 대해 여러 의문이 있었기 때문에 'office worker'라고 썼던 기억이 있다. 직종과는 상관 없이 회사원이면 'office worker'로 적어도 상관 없다는 것을 알지만, 이 직업 란을 마주할 때마다 새삼 나의 직업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에 잠긴다.


직업의 사전적 의미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자신의 적성과 능력에 따라 일정한 기간 동안 계속하여 종사하는 일'이다. 생년월일이나 이름을 적듯이 객관적인 정보로서 적어내면 될 항목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직업 항목에 대해서는 생각이 많아진다. 생년월일이나 이름은 어찌보면 선천적으로 정해진 것(물론 이름은 개명할 수 있겠지만 일단은 주어진 것이라고 본다)이지만 직업은 내 선택이 들어가는 부분이기 때문에 성격이 사뭇 다르다.


지금 나의 직업은 나의 정체성을 잘 나타내는가. 나는 어떤 직업을 갖고 싶었나.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이런 문서 '직업' 란에 적고 싶은 직업인가.


다소 철학적인 의문들이 머리를 맴돈다. 스스로의 일에 만족하지 못했던 시절, 나는 누군가에게 내 직업을 밝히고 싶지 않았다. 기획자 자체는 멋진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직업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자신감이나 만족감 여부와 관련이 있는 문제다. 원하던 커리어로 진로 변경을 한 지금은 직업을 밝히는 게 예전만큼 꺼려지진 않는다. 오랜 기간 종사하진 않았기 때문에 말하기 어색할 뿐이지 꺼려지는 감정은 아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 자기소개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직업이다. 여러 번 이직을 했고 공백기도 많이 가졌던 나로서는 의문이었다. 직업이 없으면 나를 어떻게 규정해야 할까? 꼭 이름 붙일 수 있는 무언가가 되어야만 하는 걸까. 노동하지 않으면 나를 소개할 단어가 없는 걸까. 취준생? 만약 취업 의지가 없는 비노동자라면 자신을 어떻게 소개해야 할까. N잡러라면 여러 직업 중 어떤 걸 말해야 할까. 어떤 일을 하는가가 나의 정체성을 나타낸다는 문장을 납득하기가 힘들었다. 물론 어떤 일을 하는가는 사람의 사고나 가치관에 큰 영향을 준다고 생각한다. 그건 어디까지나 현상이 그렇다는 것일 뿐, 어떤 일을 하는가가 곧 정체성이라는 명제가 참임을 의미하진 않는다. 직업이 현대인의 삶에 꽤 중요한 부분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자기를 알리기 위한 최소한의 정보로 직업을 말하는 것이 이해는 간다.


현재 종사하는 일과 갖고 싶은 직업이 일치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주변을 둘러보면 애초에 하고 싶은 일을 갖고 있는 경우 자체가 드물다. 어떤 직업에 수반되는 조건을 갖고 싶은거지 그 직업 자체를 갖고 싶은 게 아닌 경우가 태반이다. 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해도 직업으로 삼기엔 어려워서 결국 다른 일을 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 주로 예술 계열 직업이 그렇다. 대부분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자신의 적성과 능력에' 어느 정도 맞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패턴이 일반적이다. 이 불일치가 괜찮은 사람도 있겠지만 나처럼 인지 부조화가 오는 경우도 있다.


되돌아 보면 예전에 직업을 말하고 싶지 않았던 건 하고 싶은 일을 직업으로 삼지 못했다는 좌절감 때문이었던 것 같다. 지금은 다르다. 생계를 고려해 선택할 수 있는 라인업 중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았다. 평생을 살기에 충분한 재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고서야 소위 말하는 '먹고사니즘'으로서의 직업도 중요하다. 사회초년생 때에는 이걸 몰라서 커리어 방황의 시기를 거쳤다. '돈을 벌기 위해' 하는 일이니 아예 적성에 안 맞는 일이 아니고서야 뭐든 상관 없다고 생각했다. 일반적인 회사원을 기준으로 평일중 깨어 있는 시간의 반 이상을 노동하거나 노동하기 위한 준비에 쓴다. 그저 돈을 벌기 위한 일이라고 선을 긋기에는 삶에서 직업으로서의 일이 엄청나게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을 미처 몰랐다. 주도적으로 생계형 직업을 고르고 나자 평생을 걸쳐 하고 싶은 일을 조금씩 해 나갈 용기가 생겼다.


나는 가끔 묘비 문구에 어떤 사람으로 적히고 싶은가를 생각하곤 한다. 사실 말할 것도 없다. 어릴 때부터 글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많은 사람들이 읽는 책을 쓰는 작가가 되면 더없이 좋겠지만, 만약 작가가 되지 못한다고 해서 글을 쓰지 못하는 건 아니다. 작가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글쓰는 사람이고 싶은 거니까. 직업이 작가는 아니지만 글을 쓰고 있다. 직업과 상관없이 나 자신을 글 쓰는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싶다. 글을 쓰는 사람이 내 정체성이니까, 글을 쓴다. 직업이 되어도 좋고 아니어도 상관 없다. 쑥스럽지만 처음으로 말해본다. 안녕하세요, 저는 글 쓰는 사람이고 직업은 데이터 분석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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